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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유브라질월드컵기 ⑧ 전 재산 털어 월드컵 보러온 한국 청년

입력 2014-06-16 16:44 수정 2014-06-1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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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유브라질월드컵기 ⑧ 전 재산 털어 월드컵 보러온 한국 청년


폭탄 맞은 듯한 머리에 짙은 수염, 슬리퍼에 반바지, 그리고 등에는 커다란 가방. 아르헨티나 쪽 이구아수 폭포에서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상의 오른쪽 가슴팍의 태극기가 아니었다면 한국 사람인 줄 몰랐을 겁니다.

"저 차 좀 태워주시면 안 돼요?"

그가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쪽 이구아수 폭포를 촬영하고 브라질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청년 어디선가 본 듯 합니다. 생각해보니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오던 국경에서였습니다. 입국심사를 받고 처량하게 버스를 기다리던 바로 그 남자였습니다. 승용차로는 40분이면 갈 거리를 또 3시간 동안 버스를 타야 하는 그가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요, 가는 길이니 태워다 드릴게요. 타세요."

청년은 덕분에 '시간과 차비'를 벌었고, 저는 덕분에 청년의 '이야기'를 벌었습니다.

"브라질엔 무슨 일로 왔어요?"

29살 청년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축구 보러요. 한국팀 경기를 모두 볼 수 있는 티켓을 샀어요. 결승전까지 말이죠."

190만원 정도 줬다는군요.

"한국이 결승에 못 가면 어떡해요? 티켓 날리는 거 아니에요?"

"환불 받으면 돼요."

청년은 자신을 한국축구에 미친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대뜸 티셔츠를 올려 옆구리에 새긴 문신을 보여줍니다.

'투혼'

축구대표팀 유니폼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저 전 재산 1천만원 털어서 브라질 왔어요. 인생을 걸었습니다."

인생을 걸게 할만큼 그를 브라질로 이끈 원동력이 뭔지 궁금했습니다.

"왜 전재산을 털어서까지 브라질에 온거예요? 이유가 뭐예요?"

"저는 한국의 축구 문화를 바꾸고 싶어요."

의외였습니다. 치기 어린 20대의 철없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너무나 심오한 답변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승부에만 집착해요. 물론 승부도 중요하죠. 하지만 축구는 승부를 떠나 하나의 문화잖아요. 축구 자체를 즐기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청년의 말을 듣자 머리가 띵~ 했습니다. 가장 기본이지만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즐.기.다.'

브라질 월드컵을 취재하러 온 저 자신조차 승부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 상대국의 약점은 뭔지 등만 파고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기적이 오히려 '즐기는' 축구 문화에 독이 된 듯 합니다. 팬들의 눈높이는 2002년에 멈춰 있습니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잡은 우리 태극전사가 왜 이렇게 이기지 못할까?' '골도 못넣고 이기지도 못해. 재미없어'

이제 2002년의 기적을 놓아주는 건 어떨까요. 너무나 큰 승리에 취한 나머지, 지금 바로 눈 앞에 있는 새 주머니의 술맛은 느끼지조차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전 재산을 털어 브라질에 온 한국 청년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긴 말입니다.

"저는 저보다 축구에 미친 사람이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참 신기해요. 브라질에 와 보니 전세계에서 몰려든 축구광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우리나라에도 저처럼 축구에 미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즐기는거죠!"

청년은 손을 흔들며 해가 뉘엿뉘엿 지는 브라질 거리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틀 뒤면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조별리그 첫 경기를 합니다. 이기면 물론 좋겠지만 질 수도 있습니다. 알제리, 벨기에와 경기를 치른 후에는 16강에 못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응원해 줍시다. 이길 때보다 질 때 응원하는 게 진정한 팬의 자세가 아닐까요. 즐겨봅시다.

- 브라질 이구아수에서
JTBC 스포츠문화부 김진일 기자
사진=중앙일보 포토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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