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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민주화 동지이자 필생의 라이벌…'정치역정 60년'

입력 2015-11-2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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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을 얘기하자면 앞서 리포트에서 보신 것처럼 박정희 전두환 군사 정권과의 투쟁 또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가 없을 텐데요. 임종주 정치부장과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임 부장, 우선 정치인 김영삼 하면 1970 80년대를 살아온 분들은 아직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민주화 투사 이런 이미지일 거 같은데요.

[기자]

앞으로 정치적, 또 역사적 평가와 해석이 뒤따르겠지만, 먼저 업적을 꼽자면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부분이 가장 크다고 봐야할 겁니다.

군부 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문민정부의 길을 연 것이죠.

그 하나가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한 군사독재 정권 잔재의 청산, 두번째가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이었습니다.

하나회 척결은 역설적이게도,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도 꼽힙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보자면 금융실명제와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 일련의 개혁 정책을 시행한 것이 공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앵커]

경제 분야 공을 얘기하셨는데, IMF나 경제위기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도 적지 않거든요?

[기자]

김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개혁 성과를 설명하면서도 아쉽고 미흡한 부분이 더 많다는 말을 했다고 당시 언론이 전하고 있습니다.

앞서 금융정책 실패로 IMF 위기를 초래했고, 차남 김현철 씨가 한보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부분을 염두에 뒀던 발언으로 보입니다.

[앵커]

사실, 집권 과정에서부터 실망을 했다는 분들도 많이 있거든요. 3당 합당이라는 게 정권만 잡을 수 있으면 된다는 명분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많이 나왔었죠.

[기자]

네, 그때 제기됐던 비판이 자신이 평생을 싸워 온 군사정권 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이냐 이런 부분이었는데 두고두고 부담이 됐을 겁니다.

[앵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애를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빼놓고는 어려운 것 아닌가요? 두 사람은 반평생 민주화 동지이면서도 필생의 라이벌이었는데요. 둘 관계를 설명해주시죠.

[기자]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영문 이름의 앞철자를 따서 YS와 DJ로, 또 양김씨로도 흔히 불렸습니다.

두 사람 다 섬 출신이라는 거죠. YS는 경남 거제도 DJ는 전남 신안군 하의도 출신이죠. 그러나 그밖엔 다른 점이 더 많습니다.

YS는 멸치 어업을 하던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인 반면, DJ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도 알려져 있죠.

성격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선이 굵다고 그럴까요, 메모를 해도 거꾸로 하기도 빼뚤빼뚤 쓰기로 하고 그랬다는데요. 반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빼곡하게 일목요연하게 색깔별로 정리했다고 해요. 그만큼 섬세했다는 것이죠.

[앵커]

YS와 DJ, 라이벌 관계를 할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게 1970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때였는데, 드라마틱한 내용이었는데요. 그때부터 경쟁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기자]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이어서 서로 부딪치는 부분을이 부각될까봐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두 사람은 민주화 동지이면서도 실제 라이벌답게 싸운 적이 많았습니다.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 게 1970년 9월,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이었습니다.

당초 김영삼 후보의 승리가 예상됐는데, 결과는 김대중 후보의 역전승이었습니다.

이후 서로 경쟁하면서도 유신체제와 신군부에 맞서 힘을 합했죠.

그랬다가 1987년 대선 때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되죠.

당시 6.29 선언으로 정권교체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잡았으나,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무산됐죠.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0년 3당 합당을 하면서 반목을 거듭했습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승리했고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죠.

그리고 5년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도 불편한 관계는 지속됐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상을 탔을 때는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비판도 했습니다.

[앵커]

DJ 집권 이후에 YS와 DJ의 관계는 복원하기 힘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에 극적으로 화해했다고 양측이 얘기하고 있죠?

[기자]

몇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 이뤄지지 못하다가 2009년 8월에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이때 투병중이던 DJ와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이희호 여사와 만나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당시 YS가 병원을 떠나면서 " 두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질문에 이제는 그럴 때가 되지 않았느냐 그렇게 봐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8일 뒤에 DJ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앵커]

1980~90년대 정치를 얘기하자면 상도동계 동교동계 이렇게 나뉘었는데 상도동계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하생이었던 이른바 YS키즈들이 아직도 정치권에는 많이 있죠?

[기자]

대표적으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등이 꼽힙니다.

홍준표 경남지사와 정의화 국회의장도 김 전 대통령이 외부에서 영입한 인물들입니다.

손학규 새정치연합 전 상임고문도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당시 운동권 출신이었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이재오 의원을 영입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이런 배경 탓에 그런 분석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앵커]

지금까지 임종주 정치부장의 데스크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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