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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이브] "임진왜란 전후 일본, 무차별 사람 사냥"

입력 2014-02-25 13:02 수정 2014-02-25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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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한명기 교수

◇정관용-군 위안부는 전쟁 중인 어느 나라나 있었다고 망언했던 NHK 회장 결국 사과했지만, 최근에 대단한 실언이 아니었다고 뒤집어서 또다시 논란이 일고 있죠. 일본군 위안부 또 근로보국대,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끌려간 일종의 노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숱한 전쟁을 겪는 동안 타국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 역사라이브 조선 시대 타국으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해서 한번 알아볼까요? 명지대 사학과의 한명기 교수 어서 오십시오.

◇정관용-안녕하십니까?


◇정관용-임진왜란, 병자호란 등등 왜침이 워낙 많았으니까 끌려간 사람 많았겠죠, 조선 시대에도?

◆한명기-15세기 이후에 왜구들의 피해가 간헐적으로 있어서 그때마다 왜구들이 물건을 약탈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납치를 했고요. 그런데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일어난 인신 납치는 아무래도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 동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관용-임진왜란 때 모두 몇 명 정도가 어디로, 어떤 용도로 용도란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마는.

◆한명기-보통 이야기를 할 때는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이후에 가장 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발생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7년 전쟁 동안 거의 빼지 않고 계속 이루어졌죠. 그런데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끌려갔던 포로들의 숫자를 10만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포로 문제를 가장 열심히 연구했던 학자가 애초에는 한 5, 6만 정도로 추산을 했다가 최근에는 2, 3만 명 정도라고 축소를 해서 이것이 일본학계에서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정관용-모두 우리 주장으로는 10만 명.

◆한명기-10만 명 이상이죠.

◇정관용-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을 특별히 포로로 데려가는 겁니까?

◆한명기-그러니까 1592년 4월 13일 날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해서 잘 아시는 것처럼 대단히 빠른 속도로 경상도에서 서울에 이르는 지역들을 석권했기 때문에 사실 조선군이 변변한 방어를 못 하니까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서 일본군에게 노출됐겠죠. 그러니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주민들 가운데 피난을 제대로 못 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해서 일본군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고. 그리고 노동력으로 끌고 간 조선 사람들을 다시 군적에다가 편재를 해서 일본군으로 활용할 수 있고. 아니면 일본 군대에서 필요한 노비라든가 기타 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까 포로 사냥은 사실상 상당히 광범위하고 전 시기적으로 자행됐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관용-무차별적으로?

◆한명기-그렇습니다.

◇정관용-조선에서는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을 피로인 이렇게 불렀다고.

◆한명기-그렇습니다. 로자라고 하는 것이 이제 잡아간다고 하는 의미이고 피는 수동의 의미니까 민간인 가운데 전쟁요원이 아닌 상태에서 잡혀간 사람들을 보통 피로인이라고 명명을 합니다.

◇정관용-또 특별히 도자기 잘 굽는 사람, 바느질 잘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잡아와라, 이런 것도 있었다면서요?

◆한명기-네, 침략을 도발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부하장수였던 나베시마라는 자에게 보낸 기록을 보면 아예 바느질에 능한 사람을 잡아오라고 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적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내부적으로 다도 같은 게 상당히 발달해 있던 나라니까 도공들을 끌고 가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도자기를 제작하면 상당한 이익이 된다고 해서 도공과 같은 특별한 기계를 갖춘 사람들은 아주 전면적인 납치의 대상으로 떠올랐죠. 그래서 오늘날 잘 알려진 인물만 해도 가고시마로 끌려갔던 심수관 그다음에 규슈의 아리타지역으로 끌려갔던 이삼평, 그다음에 야마구치 현으로 끌려갔던 이양자 같은 도공들이 사실상 일본에서도 왜란 당시에 데려간 가장 중요한 인력이라고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정관용-끌려간 사람들의 삶은 참 비참했겠죠, 말할 필요도 없죠?

◆한명기-우선 잡히는 순간부터 일정 지역에 수용돼서 대마도로 갔다가 각 다이묘가 있는 개별적인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고 끌려간 사람 중에는 아주 드물게 사무라이로 상승한다든지 또 나름대로 기술을 인정받아서 그 지역에서 대접받은 사람도 있지만 거의 한 70% 이상의 대다수는 노비 신세로서 종신 때까지 사실상 어떤 고통을 벗을 수가 없는 그런 하층민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관용-이렇게 조선 시대 끌고 갔던 사람들은 일본에서는 일단 역사학계에서 인정은 합니까?

◆한명기-끌고 갔다고 하는 사실은 인정합니다마는 그러면서도 약간은 변형을 해서 자기들의 어떤 책임을 회피하려는 그런 꼼수가 보이고 있는데요.

◇정관용-어떻게 변형을 해요?

◆한명기-그러니까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일부 학자 중에는 왜란 당시에 끌고 간 피로인들을 도래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관용-도래인?

◆한명기-그러니까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이죠.

◇정관용-자발적으로 왔다는 뜻으로?

◆한명기-그런 뉘앙스가 상당히 강한데. 원래 도래인이라는 개념은 백제라든가 고구려에서 어떤 특별한 기술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을 지칭한 용어였는데 이게 16세기 후반의 현상인 피로인들을 도래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떤 피로인 연행의 강제성이라든가 잔인성 같은 걸 호도하기 위해서 아주 꼼수로 사용하는 용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정관용-그렇군요. 임진왜란, 정유재란까지 7년 동안 전쟁을 했습니다마는 결국 일단은 우리가 일본을 패퇴시키지 않았습니까?

◆한명기-아무래도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에 물러간 셈이니까 패퇴시켰다고 할 수 있겠죠.

◇정관용-그 후에 조선 정부는 끌려간 사람들 되찾기 위한 노력을 안 했나요?

◆한명기-아무래도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인구 한 사람, 노동력 한 사람이 아쉬우므로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송환하려는 노력은 상당히 기울입니다. 그래서 1604년에 사명당이라고 하는 승려를 일본에 파견해서.

◇정관용-사명대사?

◆한명기-그렇습니다. 누구입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랑 강화회담을 한 직후에 그간 약 1,000여 명의 조선 포로들을 데리고 귀환을 하죠. 그리고 1607년에 회답 겸 쇄환사라고 하는 명목으로 다시 사신을 보내는데.

◇정관용-회답 겸 쇄환사.

◆한명기-네, 그렇습니다. 회답이라는 말은 일본 정부가 먼저 강화를 하자고 요청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답한다는 의미이고 쇄환이라는 말은 끌려간 조선 포로들을 데리고 온다는 얘기죠. 그래서 수차례에 걸쳐서 쇄환사를 보내서 송환 노력을 기울입니다마는 조선에서 추정하고 있던 10여만 명의 포로들 가운데 나중에 조선을 밟는 행운을 누린 사람은 대략 한 6,000여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정관용-10분의 1도 안 되는데.

◆한명기-그렇습니다.

◇정관용-왜 그렇게 왜 그렇게 조금밖에 안 됐을까요?

◆한명기-아무래도 이들을 노동력이자 인력으로 끌고 간 일본인 다이묘들이 이들을 송환하는 데 굉장히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었던 측면이 우선 컸겠죠. 그래서 겉으로는 조선 정부가 요구하니까 받아들이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이 사람들의 귀환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은 끌려간 사람들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시간이 지나게 되면 아무래도 일본에서 결혼하거나 나름대로 가족을 이루어서 정착을 하기 때문에.

◇정관용-그냥 눌러살겠다?

◆한명기-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적응된 상태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일종의 모험일 수 있죠. 그래서 아예 조선인 포로들 스스로 귀환을 좀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끌려간 인원에 비해서 송환된 인원이 적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나타나게 되는 거죠.

◇정관용-부분적으로 귀환을 거부한 사람도 생겼겠죠. 하지만 우리 힘이 약하니까 그것밖에 못 데려온 것 아니겠어요.

◆한명기-전체적으로 보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관용-그렇죠. 우리가 일본을 강하게 응징하겠다, 이럴 정도의 힘이 됐으면 더 많이 우리가 데려올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임진왜란 후에 병자호란 이때는 청나라도 많이 끌려갔습니까?

◆한명기-그러니까 아무래도 조선이 왜란이라는 전쟁이 끝나서 한숨 돌리는가 싶었지만 명청교체라는 또 다른 격변에 휘말렸고 그 결과가 1636년에 병자호란으로 폭발하는 데 문제는 임진왜란 때는 그래도 일본에 항복을 하지 않았습니다마는 병자호란 당시에는 국왕 인조가 삼전도에 내려와서 항복했거든요. 또 그리고 항복도 무조건 항복이다 보니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동안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는 아주 광범위한 역시 포로사냥이 자행이 되죠. 그래서 당시 포로 문제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최명길의 기록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게 붙들린 포로의 수를 최대 50만까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관용-50만.

◆한명기-그렇습니다.

◇정관용-임진왜란 때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군요.

◆한명기-그러니까 아무래도 임진왜란 때는 의병이 일어나거나 나중에 조선 관군이 전열을 정비해서 일본군에게 저항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피로인 발생의 수를 줄일 수 있었지만, 병자호란 당시에는 개전 이후로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몰리고 또 정부 자체가 남한산성에 포위돼서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하다 보니까 일반 백성들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던 셈이죠.

◇정관용-그리고 완전히 항복했으니 나중에 돌려달라고도 못 했을 것 같아요.

◆한명기-그렇습니다. 청태종이 인조에게 항복을 받은 직후에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내가 조선에서 잡은 포로들은 예외 없이 다 심양으로 끌고 간다, 이끌고 가는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가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그것도 능력이니까 붙잡지 않는다, 그러나 한 발짝이라도 만주땅을 밟은 다음에 조선으로 도망쳐오는 포로가 있으면 인조 그대가 도로 붙잡아서 우리한테 보내줘야 한다. 이런 약조에다가 서명하도록 강요를 하니까 인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왕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청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포로 송환을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죠.

◇정관용-그렇게 끌려간 사람들 다 노비 신세였겠죠?

◆한명기-물론 거기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이 왜란 당시처럼 청 내부에서 나름대로 신분상승을 했던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역시 청나라 사람들의 노비로 전락해서 만주지역의 농장에서 사역되면서 종신토록 고생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정관용-나라의 힘이 약하면 결국 백성이 고생입니다.

◆한명기-그렇습니다.

◇정관용-그런데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 후에 참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특히 여성들의 경우는 환영받지 못했다면서요?

◆한명기-특히 여성들은 영화에도 이미 묘사가 됐습니다마는 끌려가는 도중에 상당수가 청군에게 정조를 잃게 되고 특히 여성들 가운데서도 양반집 유부녀들의 경우에는 설사 몸값을 치르고 도망 등을 통해서 돌아온다더라도 정조를 잃은 여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니까 원래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거나 시댁으로부터 며느리로 인정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정관용-그래서 그 당시에 왕까지 직접 그 문제를 거론하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한명기-그래서 일부 관리나 사대부 중에는 상환된 본래의 처와 이혼을 할 수 있게끔 허락해 달라고 국왕에게 청혼하는데 일단 그 물꼬를 트게 되면 대부분의 사대부가 다 본래의 처들과 이혼을 해서 아예 심양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여자들이 없어지겠죠. 그래서 최명길 같은 인물은 사대부들에게 본래의 처들과 이혼을 허용하게 되면 절대로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지만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 위주의 성 관념이 퍼져 있는 조선에서는 사실 최명길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수용되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정관용-이래서 나온 말이 환향녀.

◆한명기-그래서 환향녀라는 말 자체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고 하는 뜻인데 거기서 일설에 따르면 환향년 이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당시에 돌아온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아주 냉담한 시각에서보다 보니까 등장한 용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관용-돌아와도 환대받지 못하는 처참한 역사였습니다. 그분들의 처지에서 보면 말이죠. 어떤 교훈 얻을 수 있을까요? 나라가 강해야 한다?

◆한명기-말씀하신 것처럼 전쟁을 감당할 역량이 제대로 안 되는 상태에서 커다란 전쟁을 몇 십년 사이 두 차례나 겪다 보니까 그 피해는 온전히 하층 백성들에게 전가가 된 셈인데. 지금도 동아시아 정세가 격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이런 전쟁으로 휘말리지 않을 수 있도록 나름대로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고 또 외교를 잘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의 원론적인 답변밖에는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정관용-알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한명기-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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