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아티클 바로가기 프로그램 목록 바로가기

[역사라이브] "일본, 18세기 초 조선에 산업 스파이 보내"

입력 2014-02-11 13:14 수정 2014-02-11 14:56

"일본 산업스파이, 인삼 모종도 훔쳐가"

크게 작게 프린트 메일
URL 줄이기 페이스북 X

"일본 산업스파이, 인삼 모종도 훔쳐가"

-일본 ‘어둠의 외교’…뿌리 깊은 첩보전 역사
-조선 침투 ‘매수 공작’ 통해 인삼 모종 훔쳐
-임진왜란 뒤에도 조선 북부까지 ‘군사 염탐’

■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한명기 명지대 교수

◇정관용-요즘 일본. 미국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해 달라. 집단청원을 하기도 하고요. 버지니아 주의 동해병기법안 통과 막기 위해서 조직적인 로비와 방해도 끊이지 않고 있죠. 이처럼 집요한 일본의 방해공작과 주변국에 대한 첩보전은 살펴보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역사라이브 일본의 집요한 첩보전 그 역사와 내막을 알아보겠습니다.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 나오셨어요, 어서 오십시오.

◆한명기-안녕하십니까?


◇정관용-우리나라 일본 하면 임진왜란하고 일제 시대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이전 옛날부터 우리 일본과의 관계를 정리해 보죠.

◆한명기-삼국시대 경우에도 일본에 대한 감정은 별로 좋았던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나서 일본이 백제의 유민들하고 군대를 합쳐서 금강 부근으로 쳐들어왔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서 격퇴가 됩니다. 백촌강 전투라고 하는데 그 이후로 일본하고 한반도의 관계는 상당히 냉각기에 접어들죠. 오죽하면 문무대왕이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고 나면 동해에 용이 돼서 일본의 침략을 막겠다,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가 되는데.

◇정관용-끊임없이 일본은 어쨌든 한반도 쪽으로 오려고 했었군요?

◆한명기-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려 시대만 해도 양국 사이는 정상적인 국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려가 일본과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교섭을 하게 된 게 뭐냐 하면 14세기 중반부터 왜구라 불리는 일본 해적들의 한반도 연안에 대한 침략이 굉장히 극심해집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였냐 하면 남해, 서해 쪽으로 왜구들이 워낙 자주 출몰하니까 전라도 쪽에서 개성으로 올라오는 조운선의 진로가 방해가 되고 개성과 가까운 강화도 일대의 왜구들이 워낙 자주 나타나다 보니까 수도권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을 받게 되죠.

◇정관용-저는 동해로 올 줄 알았더니 거기까지 와요, 빙 돌아서?

◆한명기-그래서 우왕, 이 무렵이 되면 극심해서 한때는 수도를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기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왜구 피해가 극심해지죠.

◇정관용-왜구들은 그럼 왜 생기는 겁니까?

◆한명기-그러니까 대체로 왜구의 출신 지역은 대마도를 비롯해서 이끼, 마쓰오라 등등의 일본 서부해안 지역 사람들이 중심인데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고 어로 활동을 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일찍부터 한반도 연안이나 중국의 동남해안으로 나가서 노략질하고 인신 납치를 일삼죠. 그러니까 조선이 건국될 무렵에도 사실 왜구의 피해가 워낙 심하니까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일본하고 교섭을 통해서 왜구를 어떻게 좀 견제를 해 볼까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그러니까 일본 중앙정부가 왜구들을 좀 막아 달라, 그런 거죠?

◆한명기-그런데 문제는 14세기 후반, 15세기 초반에 일본 자체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 있는 천왕이나 막부 정권이 변방에 대한 통제를 못 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세종 때는 대마도를 정벌을 했는데 이게 정벌이 생각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그 이후에도 왜구가 쉽사리 없어질 것 같은 기미가 보이지 않죠. 그래서 사실 대마도 정벌 이전에 조선 정부는 어떤 카드를 꺼냈냐 하면 이 사람들이 조선 땅에 거주하는 것을 일부 허용하고 그 거주하면서 무역 같은 것도 열어줘서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면 해적질을 안 하지 않을까. 1407년부터 부산 그다음에 지금의 웅천, 그리고 울산지역의 경상도 지역에다가 일본인들의 도항하고 거주를 허용을 하죠.

◇정관용-집단주거지 비슷하게?

◆한명기-그렇습니다. 그리고 1420년대가 되면 그 지역에다가 일종의 거주를 관리하는 센터이자 무역거점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데 왜관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정관용-왜관.

◆한명기-그래서 이런 강경책하고 포용책을 같이 써나가면서 왜구를 평화로운 통교자로 전환시키려는 정책을 쓰죠. 그래서 15세기의 유화책, 강경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해서 15세기 당시에는 왜구 문제가 별로 심각해지지 않는데

◇정관용-왜관 설치 이후 나아졌군요.

◆한명기-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일본 서부지역 거주자들이 보니까 조선에 가서 거주하면 거기서 땅도 대주고 가재도구도 주고 심지어는 결혼까지 시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삼포라고 한 지역, 아까 말씀드린 울산, 부산, 웅천 지역으로 일본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는 겁니다. 규정보다 많은 인원이 몰려오니까 이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줄 재원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조선 정부는 16세기쯤 되면 가능하면 인원을 줄이고 이 사람들을 규제하려고 하는 데 문제는 이미 거기에 단맛을 본 일본인들은 그런 조선 정부의 규제에 대해서 굉장히 강하게 반발합니다. 그 귀결이 1510년에 이른바 삼포왜란이라고 해서 대마도와 조선족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합작을 해서 폭동을 일으킵니다.

◇정관용-폭동.

◆한명기-그래서 16세기에는 그런 폭동이 조선 정부의 정책에 따라서 계속 빈발을 하죠. 재정문제 때문에 발목을 잡히게 되고 이후에 잘 아시는 것처럼 일본 자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자가 등장한 다음에 전면적인 임진왜란이라는 침략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정관용-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최초의 인물 아니겠습니까? 이런 통일된 일본의 강력한 힘을 조선은 그 당시 몰랐었죠?

◆한명기-그러니까 아무래도 왜구 활동이나 이런 걸 관행적으로 하다 보면 상륙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조선 내부 사정을 잘 알게 잘 알게 될 수밖에 없겠죠.

◇정관용-의도적으로 정탐하고 그런 것들이 많았었습니까?

◆한명기-맞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사례가 이제 임진왜란 때 대마도가 조선을 앞장서서 침입을 해 오니까 1598년에 왜란이 끝난 다음에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포함한 일본하고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죠. 그런데 이 대마도라고 하는 지역은 척박하고 농토가 없어서 조선하고의 무역이 없으면 경제적 생활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대마도는 필사적으로 조선을 설득해서 국교를 재개하려고 하죠. 1905년에 대마도 사절들이 부산에 나타납니다. 부산에 나타나서 호소 반, 협박 반을 하죠.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우리한테 무역을 허용해 달라. 우리 과거 반성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에 허용을 안 해 주면 본토를 움직여서 또 쳐들어올 거다,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죠. 그래서 당시 대마도와 접촉하고 있던 부산 첨사라는 지방관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청천강, 대동강 일대는 아직도 명나라 군이 주둔하고 있다. 너희들이 만약에 또 쳐들어오면 그 명나라 군대가 바로 내려와서 너희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을 만만하게 보지 말고 명까지 같이 염두에 두고 봐라. 그래서 이 대마도 사절이 처음에는 네네하고 물러갑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6개월 뒤에 또 오는 거예요. 또 와서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갑자기 품속에서 부스럭 뭘 꺼내냐 하면 이정표를 이렇게 톱으로 잘라온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냐 너희들이 한 얘기처럼 평안도 일대의 명군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가 거기 답사하고 왔다. 그런데 평안도 가 보니까 명군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없더라. 우리를 속이려면 좀 단수가 높게 속여라,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니까 부산 첨사는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607년에 국교를 재개하고 부산 일대에 다시 왜관을 설치해서 일본하고의 관계를 다시 유지하게 됩니다.

◇정관용-정말 대단하군요. 그 정도로.

◆한명기-집요하죠. 그러니까 이미 간첩을 들여보내서 조선 곳곳을 살펴본 다음에 그걸 토대로 해서 오히려 역으로 조선 정부를 협박하는 그런 상황이 이미 임진왜란 이후에 벌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이 왜관 일어나고 하는 것의 규모가 점점 커져서 1638년 인조 때가 되면 부산에 가면 용두산 공원이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지역이 왜관이 있던 옛 터인데 왜관이라는 게 일종의 일본인의 거주지이자 무역센터이자 좀 크게 보면 간첩들의.

◇정관용-소굴이죠, 소굴.

◆한명기-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많을 때는 1000여 명의 성인들이 득실득실한데 이 친구들이 사실상 항상적으로 주변에 조선인들하고 접촉을 하면서 조선 정보를 사실상 매일 빨아들이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확보된 정보가 왜관에서 대마도를 거쳐서 일본 본토로 계속 건너갑니다. 그러니까 사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 이후 조선을 침략을 했는데 장기적 관점에서 놓고 보면 일찍부터 그런 왜관이나 정탐활동을 통해서 조선 정부를 굉장히 잘 알고 있었고 내부사정에 대해서 아주 밝았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정관용-사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도 일본은 조선의 상황을 잘 아는데 조선은 일본통일 이후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당한 것 아닙니까?

◆한명기-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대마도인들은 왜란 이전에 조선하고 무역이나 통교를 했던 경험을 토대로 해서 부산에서 서울을 계속 왕래하니까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어떤 성이 있고 어떤 군사기지가 있고 방어태세는 어떤가 하는 전반적인 정보를 다 알고 있는데 조선은 사실상 통신사라고 하는 걸 그 전에도 보냈지만 이게 거의 몇 십 년에 한 번씩 부정기적으로 보내는 거니까.

◇정관용-몇 년도 아니고 몇 십 년에 한 번요?

◆한명기-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7년에 국교가 재개가 되고 19세기까지 통신사라고 하는 사절 파견도 재개가 되는데 모두 12번이었습니다. 12번을 조선 후기에 보냈다라고 하면 따지고 보면 20년 정도의 한 번 꼴 정도인데. 조선에 항상적으로 거주하는 왜관의 일본인들이 매일매일 정보를 빨아들이는 거하고 거의 20년에 한 번 부정기적인 사절을 통해서 갔던 일본 사정 파악하고는 양과 질에서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정관용-조선 후기의 왕이나 이런 사람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일본을 경계하고 주시해야 한다는 인식은 없었나요?

◆한명기-있었죠. 강한데 17세기 초반이 되면 일본에만 신경을 쓸 수 없는 것이 만주 쪽에서, 또 청나라가 일어나니까 조선 입장에서는 청하고의 관계를...

◇정관용-그게 우선이죠.

◆한명기-우선적으로 처리하려면 일본하고의 관계는 어쨌든 우호적으로 유지하거나 최소한 현상을 유지해야 되니까 자연스럽게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는데 참 웃지 못 할 희극이자 비극은 뭐냐 하면 일본에서 어떤 프로젝트가 벌어지냐 하면 당시 일본 쇼군,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라고 하는 자가 조선의 인삼을 몰래 반입해서 인삼을 국산화시키라고 하는 지시를 내립니다. 대마도가 일본 막부의 명령을 받아서 어떤 프로젝트를 하냐 하면 왜관을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으니까 왜관 주변의 조선인들에게 돈을 푸는 거죠. 한반도에서 나는 동식물을 직접 잡아오던가 아니면 약재가 될 만한 동식물을 그림으로 그려서라도 우리한테 가져와라. 이런 어떤 한반도에 대한 동식물 조사를 1721년에 합니다.

◇정관용-생태조사까지.

◆한명기-그래서 그 와중에서 이제 조선의 산삼 모종이 일본으로 유출이 되는 거죠. 그래서 몇 년 동안 일본 각지에서 시험 삼아 재배를 해 보다가 어떤 특정 지역에서 이게 재배에 성공을 합니다. 또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조선 인삼의 대일 수출이 그 이후로는 막힐 수밖에 없죠. 그 정도로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일본은 대마도와 왜관이 연결된 커넥션을 통해서 한반도 정보라든가 내부의 사정을 정탐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정관용-상대적으로 우리는 청나라나 이런 쪽 신경 쓰느라고 여력이 없었다.

◆한명기-워낙 지방 차원에서 은밀하게 막대한 뇌물을 뿌려서 매수한 상태로 움직였기 때문에.

◇정관용-사전 차단은 불가능했다?

◆한명기-제대로 차단을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관용-그 후에 인삼의 대일 수출이 급격히 줄어드는 걸 보면 알았을 거 아닙니까? 알지만 어떻게 못 하는 거죠.

◆한명기-그렇죠. 이미 반출이 된 상태고 일본에서 품질이 조선 것보다 떨어지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국산화에 성공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죠.

◇정관용-이런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말씀 정리해 주신다면?

◆한명기-일본을 나름대로 관리를 하려다가 왜란을 당하고 그 후에 19세기에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결국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겪었는데 가장 확실한 대책은 우리가 일본보다 역량이 커지는 거겠지만 그건 간단한 일은 아니고, 일단은 우리 내부의 어떤 건강성을 잘 유지를 해서 어떤 일본에 대해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되는 거고 이번에 버지니아 주에서 동해하고 일본하고 병기하도록 된 법안이 성공했던 것을 보면 역시 어떤 양심적인 바깥세력하고 연대를 해서 일본의 이런 의도 같은 것을 충분하게 알리면서 어떤 대책을 마련해 가는 그런 강온양면의 작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정관용-하나만 더 덧붙인다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과거 보면 일본은 우리를 잘 알고 우리는 일본을 모르고 그러면서 계속 당했던 거 아닙니까? 우리가 일본에 대한 연구도 더 충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명기-맞습니다.

◇정관용-세밀한 동향까지 예의주시해가면서 우리 힘을 키우고 국제사회와 연대하는 대응을 해야 할 것 같네요. 한 교수님 고맙습니다.

◆한명기-감사합니다.

관련기사

[역사라이브] 전우용 "일본, 중세적 배외주의 회귀" [역사라이브] 한명기 "광해군, 정통성 콤플렉스로 몰락" [역사라이브] 전우용 "독립운동가 동상 1호가 안중근 의사" [역사라이브] "일본, 검정제 만들어 민족 교과서 추방"
광고

JTBC 핫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