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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이브] 소치 올림픽으로 본 100년 전 '근대체육 '

입력 2014-02-20 13:05 수정 2014-02-2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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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교수

◇정관용-오늘 역사라이브는 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우리 근대체육의 역사를 한번 총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전우용 교수 나오셨습니다. 전 교수님 어서 오세요.


◆전우용 -안녕하세요.

◇정관용-저도 기억나는 게 하나 있어요. 고종 왕이 외교관들 테니스 시합하는 걸 구경하면서 저 힘든 걸 하인을 시키지 왜 직접 하느냐, 이렇게 말했다는 것. 그거 진짜 있었던 일입니까?

◆전우용-그랬다는 말이 전해지죠.

◇정관용-그냥 전해지는 거예요, 확인된 거예요?

◆전우용-확증하기는 어렵죠. 그랬을 개연성이 워낙 충분하죠. 어느 지역 어느 문화권에서나 전근대는 땀 흘리며 노동도 아닌 일을 하는 것. 일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땀을 흘리며 움직이는 것은 양반지배층, 귀족지배층이 할 일이 아니다.

◇정관용-아랫것들이 하는 것이다. 하인, 노예.

◆전우용-이런 생각이었고요. 그래서 잘 아시는 박지원의 양반전에도 그런 대목이 있죠. 양반은 아무리 급해도 뛰어서는 안 된다. 뛰지 않는다, 이런 게 있었고요.

◇정관용-비가 오면 뛰지 않는다?

◆전우용-급해도 난리가 나도 이런 거죠. 비슷한 예로 정조 때 어의였던 강명길이라는 사람이 쓴 의서가 있어요. 제중신편이라고 하는 책인데 그 책 앞에 이런 특징적인 대목이 나와요. 부귀한 자는 심리학을 많이 쓰는 그러니까 마음과 두뇌를 많이 쓰니까 내과 병, 속병이 많이 생기고 빈천한 자는 수족을 많이 쓰고 몸을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외상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의학은 빈천한 자를 다루지 않는다. 이런 거죠. 그래서 한의학에 외과가 없어요. 그런 발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체육 활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독립된 인간의 활동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거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정관용-사실은 운동 안 해서 속병 걸린 건데 그건 몰랐군요.

◆전우용-그렇죠. 그럴 겁니다.

◇정관용-그러면 조선 시대 끝날 때까지는 전혀 체육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었습니까? 이 체육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없었나요?

◆전우용-말은 없었던 것 같아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우리가 스포츠라고 부르는 활동 그에 해당하는 것들은 당연히 있었죠. 예를 들어 군사훈련으로 진행되었던 승마, 씨름 그리고 활쏘기 이런 것들은.

◇정관용-그건 양반들도 했죠?

◆전우용-당연히 양반들도 했고 활쏘기는 여성들도 했던 것으로 보여죠. 그런 활동 자체가 독립된 신체만을 단련하는 것이라 천시했고요. 그게 심신수련이라고 해서 몸은 이제 호연지기를,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이런 정도로 생각해서 육체만을 독립적인 뭐랄까요, 육성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던 거죠. 그랬다가 아마 기록상 최초로 체육이라고 하는 말이 나온 것은 1895년 고종의 교육입국조서에서 교육의 목표로 지덕체. 3가지를 익히게 된다, 지육, 덕육, 체육 할 때 처음 나왔던 것으로 보이고 그 개념은 교육에서 몸을 별도의 수련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개념은 그 개념은 아마 1880년대 초, 1881년에 조사시찰단이 일본에 갔을 때 거기서 일본의 근대교육을 목격하면서 그런 개념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고요. 그런 체육활동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웠던 서양식 학교들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정관용-배재학당, 이화학당 이런 데?

◆전우용-네.

◇정관용-조금 아까 조선 시대 활쏘기는 여성도 했다고 하는데 또 하나 기억나는 게 이화학당 다니는 여학생들은 명리도 삼지 않겠다, 며느리로 이유가 체육 했기 때문이라면서요?

◆전우용-그랬다고 하죠. 사실 이화학당 같은 경우는 처음 학교를 만든 직후부터 상당히 많은 오해를 받았어요, 대중적으로. 여성교육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여성을 한 곳에 한곳에 모아놓고 집단으로 교육한다는 것 자체가 낯선 문화였고 또 더구나 낯선 외국인들이 가르치니까 저기 딸을 보냈다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고요.

◇정관용-내버린다, 이렇게 됐던 거죠.

◆전우용-게다가 한국인들에게 아주 익숙지 않은 여성에게 체육 활동을 시키는, 체육교육을 하는 그런 커리큘럼이 있다 보니까 딸을 기생 만드는 것 아닌가.

◇정관용-기생?

◆전우용-그렇죠. 기생이나 보다 더 심한 질을 떨어뜨리는 것 아닌가. 이런 두려움 때문에 조신하게 자라야 여자애들을 함부로 키운다, 이래서 도로 데려가는 그런 사례들도 있었다고 하죠.

◇정관용-도로 데려가고 이러면 이화학당에서 체육 교육을 안 했습니까? 그래도 계속 했나요?

◆전우용-했죠. 계몽이 필요했던 것뿐이고.

◇정관용-어떤 체육 활동들을 했나요?

◆전우용-간단한 체조부터 시작을 했고요. 체조하는 사진 같은 경우는 남아 있고요. 사실 이게 체육활동의 기본이죠. 지금도 유치원 아이들 같은 경우는 처음 들어가서 배우는 게 앞으로나란히, 좌우로 나란히 이런 것들이잖아요. 가장 기초적인 동작 맞추기 훈련부터 시작했고 그다음에 이제 사회적 분위기가 나아진 다음에 정구라든가 농구라든가 구기 종목도 시행을 했고요.

◇정관용-그러니까 조선 시대 말까지는 체육이라는 단어조차 들어와 있지 않았었고. 고종 때 비로소 처음 그 단어가 등장했고 인식도 그때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을 하고 즉 근대 교육체계가 만들어지면서 인식의 전환이 생겼다, 이렇게 봐야 할 것 같아요.

◆전우용-몸에 대한 생각이 더불어 바뀌게 된 거죠.

◇정관용-그전에 있었던 건 군사훈련 방식. 말타기 같은 것 이것밖에 없었다?

◆전우용-그렇게 봐야겠죠.

◇정관용-그래서 그런지 왕들도 병치레도 많이 하고 빨리 죽고 그랬잖아요.

◆전우용-그랬다고 봐야 될 것 같아요. 그런 면들이 있었다고. 아무리 좋은 걸 먹어도 몸을 움직여야 했겠죠.

◇정관용-운동은 안 하고 후궁들을 많이 거느리고 이런 것들이 겹쳤다는 분석도 있지 않습니까? 운동회라는 것은 언제 처음 시작됐나요?

◆전우용-교육직부가 교육입국조서가 나온 직후였어요. 최초의 운동회는 관립 영어학교에서 했다고 하고요.

◇정관용-관립영어학교.

◆전우용-미국의 교사가 학생들에게 운동을 가르치고 모여서 경쟁하는 **운동회를 열었다고 하는 게 있고요. 바로 그 뒤에 소학교가 교육입국조서가 발표되자마자 만들어지는데 1년쯤 뒤가 되는 거죠. 그해 5월에 지금 국립의료원이 있는 곳 그러니까 훈련원이라고 하는 곳이었는데요, 당시에는. 거기에서 관립소학교 연합운동회를 열었던 것이 우리 최초의 운동회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관용-학교별이 아니라 다 모아놓고?

◆전우용-학교끼리 경쟁하는...

◇정관용-아, 그런 방식으로. 운동회 풍경은 어땠을까요. 어떤 종목들을 어떻게 겨뤘나요?

◆전우용-종목은 그게 사실 요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하는 것과 거의 같았어요. 백보달리기. 미터로 계산하지 않고 백 걸음보다 좀 걸고 아마 한 5, 60m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백보달리기, 이백보달리기, 멀리뛰기, 이인삼각, 줄다리기, 줄다리기가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었고 이런 종목들을 했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게 한 종목으로 모아서 한 것이 아니고 각 종목마다 대인 종목이 있고 소인 종목이 있어요.

◇정관용-대인, 소인이 뭐예요?

◆전우용-신체를 봐서 덩치가 크면 대인에, 덩치가 작으면 소인종목에 하도록 한 것이죠. 균질적인 몸이라고 하는 사고는 없었고요.

◇정관용-나이별로 나눈 게 아니고? 그냥 덩치 큰 아이, 작은 아이 이렇게?

◆전우용-그렇게 나눴고요. 그런데 워낙 이게 당시로써는 희귀한, 신기한 구경거리였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경했다고 그러고요. 그래서 떡장수, 엿장수들이 돌아다녔다고 해서 당시로써는 굉장히 흥미로운 것이었는데요.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이 운동회가 사실 우리 국민의식 형성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요.

◇정관용-국민의식?

◆전우용-그러니까 나라라고 하는 것이 그 이전까지는 군주와 동일시됐었어요. 이게 상대적으로 여러 나라 중에 우리나라라는 개념을 갖기가 굉장히 어려웠거든요. 왜냐하면, 아는 나라라야 조선 시대까지는.

◇정관용-중국, 일본 밖에...

◆전우용-중국, 일본 정도였잖아요. 운동회는 아마 이게 유럽에서 올림픽의 영향이었는지 그렇게 좀 추정이 되는데 운동회장에 만국기가 걸리기 시작해요.

◇정관용-맞아요.

◆전우용-만국기 항상 걸었잖아요.

◇정관용-요즘도 거나요?

◆전우용-걸죠. 초등학교 운동장에 거는 걸 제가 봤어요.

◇정관용-운동회에 만국기를 왜 걸죠?

◆전우용-그게 올림픽의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전 세계의 평화의 제전이다, 이렇게 개념으로 걸었던 것 같은데 그중에 만국기를 보면 그중 우리 국기, 태극기가 있는 게 보이는 거죠. 자국을 상대화할 수 있고 여러 나라 중에서 자기 나라를 인지할 수 있고. 이런 훈련을 거듭하면서 국민의식을 형성해 나간다, 이게 연구의 최근의 결론들인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운동회가 한국의 국민의식 형성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 올림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김연아 선수 곧 다시 또 오늘내일 새벽에 경기를 하겠습니다마는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응원하잖아요. 그게 국민의식이거든요. 애국심이고 그런 걸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 스포츠였던 거죠.

◇정관용-초등학교 운동장에 왜 만국기를 거는지 계속 궁금했는데 이제 궁금증이 풀렸네요.

◆전우용-처음부터 걸었던 겁니다.

◇정관용-일제 시대는 체육회도 만들고 장려활동을 했죠. 어떤 방식으로 했나요?

◆전우용-따로 만들지는 않았고 조선체육회, 지금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한국인들만으로 만들어진 건 삼일운동 이듬해 1920년입니다.

◇정관용-일제가 만든 게 아니고요?

◆전우용-사회, 조선인 시대. 당시로 보면 조선인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었고요.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일본체육회, 조선일본체육회에 흡수 통합이 되어 버리죠. 강제병합이 되어버리고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체육이 급속히 확산되는 데는 물론 이런 근대교육과 운동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군사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군사적으로 유능한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학교가 기여해야 한다, 이런 것들 때문에 이른바 민족주의적 계몽학교들에서 체육교육을 굉장히 강조했던 경험이 있어요. 일제강점기에...

◇정관용-우리가 힘을 키워야 일제에 당하지 않는다, 이런 거죠.

◆전우용-체력은 국력 비슷한 개념이 생겼던 거죠.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이런 식의 민족의식과 결부된 체육교육은 금기시되었지만 사실 이게 자본주의 산업노동에 적합한 규율에 적응할 수 있는 균질적인 몸을 만드는 데는 유용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 체육은 그대로 유지가 됐던 편이고요. 또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이 모이는 기회들을 원천적으로 거의 봉쇄를 했었어요. 중국의 10년 대 같은 경우에는.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운동회 정도, 이런 거였기 때문에 상당히 빨리 성장한 편이었고요. 또 조선체육회가 만들어진 다음부터는 이 조선체육회 주최로 조선인들만이 참가하는 그런 체육대회가 여러 차례 벌어졌고요.

◇정관용-혹시 그런 민족 의식적 체육교육이라고 하는 걸 일제가 알게 되면서부터 조선인,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체육을 못하게 금지하고 일본 사람들은 막 저 잘하게 육성하고 이런 차별 같은 건 없었습니까?

◆전우용-굳이 일부러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사실 대다수의 체육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경제력하고 관계가 돼요. 첫째 노동 이외의 다른 형태로 몸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되고요. 또 대부분의 종목이 나름대로의 장비, 도구를 필요로 해요.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정관용-하다못해 공이라고 있어야 되고.

◆전우용-그렇죠.

◇정관용-야구를 하려면 배트도 있어야 되고. 그런 건 전부 일본한테 사와야 되잖아요.

◆전우용-그렇죠.

◇정관용-그러니까요.

◆전우용-그냥 놔둬도 경쟁을 해도 대부분의 종목에서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앞설 수밖에 없었고요. 그런 것들을 일본인들은 또 한편으로는 우생학적인 논리를 동원해서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열등하다, 이런 지표로 삼기도 했죠. 그래서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나요. 1930년대쯤 가서 당시 신문들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해요. 조선인이 잘하는 종목이 축구와 마라톤 정도라고 생각을 해요, 스스로.

◇정관용-축구와 달리기?

◆전우용-돈이 상대적으로 덜 드는 종목이죠. 경성제국대학 같은 경우에는 대학이니까 학교 안에 운동회가 있는데 학생 수는 3분의 2 정도가 일본인이었고요. 일본인은 수영, 승마, 검도 등 모든 종목에 골고루 참가하는데 한국인 학생들은 유독 축구부에만 들어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렇다 보니까 이 종목에서만이라도 일본을 이겨야 한다, 그래야 멸시를 피할 수 있다. 이런 의식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래서 요즘도 다른 종목은 몰라도 축구만은...

◇정관용-한일 축구전 하면...

◆전우용-축구만은 일본에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한데. 이게 하루아침에 형성된, 어제오늘 형성된 관념이 아니고 일제강점기 때부터 그런 관념이 굉장히 강했던 거죠.

◇정관용-다른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전우용-해서 일본과 경쟁해서 이기기도 어려운 이런 일들이었죠.

◇정관용-장비도 없고. 가서 뛰는 거군요.

◆전우용-간혹 일본인들을 이기는 종목. 예를 들어 엄복동의 자전거라든가 이런 것으로 전국적으로 영웅으로 추앙받는 그런 분위기였던 거죠.

◇정관용-마라톤 얘기하시면 떠올리는 게 손기정 베를린올림픽, 그렇죠? 그때 우리 국민들의 인식은 어땠을까요. 이제 일장기 달고 신문에서 사진을 떼어 내고. 어떻게 느꼈습니까?

◆전우용-그러니까 이중적이었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첫째로는 슬펐던 거죠. 그러니까 일장기 말소사건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아닙니까? 조선인인데 나라를 뺏겨서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한다는 하는 그런 망국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을 누르고 일본의 대표로 자격이긴 하지만 세계제일이 되었다, 자부심이기도 했고요. 두 가지 감정이 복합, 중층적으로 섞여 있었기 때문에 착잡했을 것 같아요. 또 그런 감정들이 표현이 됐던 거고요. 다른 종목들에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선수가 되어야 했지만 일본인들을 이길 수 있으면 그것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들 생각을 했던 거겠죠.

◇정관용-일제가 그 당시 대표선수 선발에서 차별하지는 않았나 봐요.

◆전우용-일부 차별이 있었다고 해요. 당시 선수들의 증언이나 회고를 보면 일부 차별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걸 뚫고 일본 국가대표가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예를 들어 동계올림픽에도 한국 스케이트 선수가 참가한 적이 있어요.

◇정관용-일제 시대 때요?

◆전우용-네, 일제강점기 때도요. 그렇게 해서 그런 차별을 뚫고 일본 대표에 선발이 됐으니까 더 자랑스럽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죠.

◇정관용-그렇지 않아도 지금 동계올림픽 계기로 오늘 이 얘기를 하는 거라서 겨울스포츠 얘기를 방금 여쭤보려고 했는데 그건 아마도 일제 시대 이후에 나왔겠죠, 우리나라에서도?

◆전우용-그렇지 않습니다.

◇정관용-그래요?

◆전우용-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스케이트를 탔다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1880년대. 미국과 수교한 지 얼마 안 돼서 미국 해군이 서울에 왔다가 스케이트를 들고 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스케이트를 탄 기록이 있어요. 아마 청계천에서 탔던 것 같아요. 굉장히 흥미로웠던 것 같고요. 피겨스케이트와 비슷하게 묘기스케이트를 봤던 것은 1895년 을미사변 직전인데 경복궁 향원정이 굉장히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장소예요.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발전소가 설치됐던 곳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피겨스케이팅 공연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정관용-공연까지?

◆전우용-외국인 선교사들이 아마 페어스케이팅이었던 것 같아요. 남녀가 스케이트 묘기를 보여줬는데 고종과 왕후가 같이 구경을 했다고 하는 그런 기록이 있어요. 당시 한국에 왔던 영국 지리학자 유명하죠.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고 하는 분이 기록을 남긴 게 있는데 그게 이제 최초의 스케이팅이에요, 물론 한국인이 한 건 아니에요. 그 정도였고 일제강점기에는 1910년대부터 조금씩 조금씩 YMCA 등을 통해서 한강에서 얼음을 타거나 심지어 사진도 남아 있는데 한강철교 밑에서는 아이스하키 경기까지 하고 그랬어요.

◇정관용-아이스하키까지? 그러니까 전부 한강, 청계천, 경복궁 연못 그런 곳이고 실내 빙상장 같은 게 만들어진 건 언제라고 봐야 하죠?

◆전우용-그건 해방 한참 뒤죠.

◇정관용-일제 시대 때도 그런 건 없었고?

◆전우용-그런 건 없었고요.

◇정관용-전부 빙상종목이고 소위 스키라든가 이런 것도 다 최근이죠?

◆전우용-그건 최근이죠.

◇정관용-일제 시대 때도 그런 건 없었고요?

◆전우용-그런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정관용-알겠습니다. 동계올림픽 계기로 우리 근대체육을 살펴봤는데요. 근대체육, 결국 민족의식 내지는 국민의식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인식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할까요? 고맙습니다.

◆전우용-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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