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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이브] 한명기 "광해군, 정통성 콤플렉스로 몰락"

입력 2014-02-04 13:38 수정 2014-02-0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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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조선 ‘필벌’ 원칙 잃고 책임정치 실종
-승전국 청나라가 되레 혹독한 ‘필벌’ 원칙

■방송 : JTBC 정관용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한명기 명지대 교수

◇정관용-박근혜 대통령은 개각은 없다, 이렇게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현오석 경제부총리의 부적절한 발언 또 여수 기름유출 사고에서 코를 막는 모습 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윤진숙 해양수산부장관까지 계속해서 고위공직자들의 말과 행동이 논란을 빚고 있고요. 야당에서는 해임건의안 내겠다, 이런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대통령의 용인술에 대해서 오늘 역사 라이브 시간에 조선의 격변기 왕들은 어떤 용인술을 펼쳤는지 공부 좀 하겠습니다.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 어서 오십시오. 조선에서 용인술 1등 하면 누구입니까?


◆한명기-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역시 세종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정관용-세종대왕? 어떤 점이 그렇게 훌륭했나요?

◆한명기-그러니까 세종대왕 자신이 잘 아시는 황희 정승이나 맹사성, 허조 이런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활용을 했고 또 자신이 인재 등용의 폭 자체를 굉장히 넓히지 않았습니까?

◇정관용-집현전?

◆한명기-그렇습니다. 집현전은 일종의 인재들의 집합소이자 싱크탱크 역할을 했는데 그걸 만들었다는 자체가 대단한 거고 거기에 이제 당시 천민이었던 장영실이라는 인물까지 능력을 보고 발탁을 해서 세종대에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여러 가지 업적들이 바로 그 세종의 용인술 덕분에 기본적으로 가능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정관용-그러면 역으로 조선 최악의 용인술은 누구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한명기-글쎄, 그건 쉽게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예를 들어서 내부가 안정되어 있고 외부로부터 외압이 없을 때는 용인술이 문제가 있어도 별 문제가 없는데 예를 들어서 17세기 초반처럼 밖에서는 대륙정세의 변화가 아주 급격하고 내부에는 개혁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문제가 생기게 되면 용인술의 여부가 결정적인데 오늘 주제도 관련된 거지만 선조, 광해군, 인종 이 세 사람이 왕으로 있었던 17세기 초반의 경우에는 용인술의 여부에 따라서 국가 운명이 결판났다, 결국 그렇게 놓고 보면 역시 병자호란을 당해서 최악의 비극을 초래했던 인조 임금의 경우에는 용인술의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관용-선조 때도 임진왜란이 있었지 않습니까?

◆한명기-선조는 물론 임진왜란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초반에 의주까지 밀려왔던 그런 아픈 상처가 있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나름대로 당시 선조가 다행이었던 것이 뭐냐 하면 침략은 당했지만, 인물이 굉장히 많았죠. 잘 아시는 것처럼 우선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지켰고.

◇정관용-한때 이순신을 저기하지 않았습니까?

◆한명기-그건 선조의 용인술 중에서 노회한 측면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죠. 그러니까 자신은 전쟁 초반에 별다른 역할을 한 것 없이 의주까지 피난을 갔는데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남쪽 해안에서 일본군을 연거푸 격파하면서 서해를 지켜내서 궁극적으로 나라를 수호하니까 백성들이나 관료들 사이에서는 이순신의 인기가 어떤 면에서는 하늘을 찌르는 거고 자신에 대해서는 왕이지만 당시 한 게 뭐가 있느냐.

◇정관용-도망만 갔지 않느냐.

◆한명기-이런 인식이 나오니까 결국 선종 입장에서는 권력의 사수라는 측면에서 놓고 보면 이순신이 한편으로는 고마운 존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왕권에 대단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이라고 할 수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아마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서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관용-그 시대에 정말 인물이 많았군요. 이순신뿐만 아니라.

◆한명기-선조 때는 정말 다행인 것이 이순신 같은 무장뿐만 아니라 곽재우 그다음에 고경명 이런 의병장들도 정부에서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일본군하고 싸웠고 또 잘 아시는 유성룡,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이런 인물들은 외교일선이나 전쟁수행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죠.

◇정관용-그분들이 다 같은 시대에 계셨던 게 다행이네요. 그리고 또 어떻게 보면 같은 시대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들한테 그런 역할을 맡긴 것은 선조 아니겠습니까?

◆한명기-선조는 어쨌든 전쟁을 피하지 못한 건 단점이지만 전쟁을 수행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그래도 용인술에 상당한 내공이 있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정관용-선조 또 재임 기간이 길었죠?

◆한명기-그렇습니다.

◇정관용-모두 몇 년이죠?

◆한명기-41년입니다.

◇정관용-조선 최장 아닌가요?

◆한명기-그건 영조가 최장.

◇정관용-그래요? 41년 재임 기간. 그래도 국난을 겪었기는 했지만, 그것을 극복해 내는 데는 용인술이 있었다.

◆한명기-그렇습니다.

◇정관용-광해군은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한명기-광해군은 잘 아시는 것처럼 선조의 둘째 아들인데 정비 소생이 아니라 첩의 자식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왕좌에서 왕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왕 자리에 오를 때까지도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인물이 왕 자리에 오른 것이 1608년인데 1608년부터 한 5년 동안은 용인술에 있어서 상당한 내공을 발휘합니다. 아버지 선조 때 활약했던 아주 고참에 노성한 신하들하고 자신이 왕이 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던 북인의 신하들을 적절히 선별해서 나름대로 연립정국이라고 하는 걸 꾸려서 전쟁이 남긴 상처라든가 이런 것을 회복하는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죠.

◇정관용-연립내각으로까지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까?

◆한명기-그 정도입니다.

◇정관용-그래서 5년은 그랬는데?

◆한명기-문제는 이 인물이 둘째 아들이자 첩의 자식이라고 하는 자기 타고난 왕권 자체에 콤플렉스를 이기지 못하고.

◇정관용-정통성 시비.

◆한명기-그렇습니다. 나중에는 정통성 확보에 매몰되다 보니까 이제 어떤 한계에 빠지느냐 하면 자기 측근을 좀 양성하는 데 빠지게 되는 거죠. 대표적인 인물이 북인 중에서도 광해군에게 아주 밀착했던 이이첨이라고 하는 인물인데 이이첨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신임을 너무 심하게 해서 이이첨에 대한 어떤 반대여론이라든가 이런 것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인물에 대해서만 집중적인 자세로 나아가니까 이게 정치판의 상당한 파란을 가져오게 되고 또 이이첨의 권력은 그 과정에서 비대해지니까 비대해지면 아무래도 부정이라든가 비리를 저지를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고 거고 그게 막판에 광해군의 실책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정관용-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이첨 한 사람한테 권력을 너무 많이 준 거죠.

◆한명기-이이첨 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지만 이이첨이 영수로 있는 대북이라고 하는 강파에게 너무 집중적인 힘을 실어주면서 당시 또 다른 당세기였던 서인이라든가 남인이 적절한 균형과 견제 역할을 할 수 있게 용인을 해야 하는데 그걸 차단한 것이 결국은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이런 속언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정관용-문제 제기가 없었습니까, 이이첨에 대해서 권력을 비판한 얘기들이 계속 있었을 것 같은데.

◆한명기-많이 있었죠.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윤선도라는 인물이 전하는 너무 이이첨에게 모든 것을 신임하고 그를 아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태도를 바꿔라라고 얘기했는데 일단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 데 이이첨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을 한 다음부터는 반대 여론의 귀를 기울이지 않은 셈이죠.

◇정관용-결국 그러니까 좀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체제화할 수 있을 때 그때가 용인술을 잘하는 거고 그게 무너지면 결국 문제가 생기는 거군요.

◆한명기-그렇죠. 인물을 넓은 범위에서 뽑아서 적재적소에 맡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왕 자신이 인재들을 보는 눈 그리고 인재들에게 문제가 있었을 때 신상필벌. 그러니까 적당하게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문제가 있는 사람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 있는 그런 과단성이 있어야 하는데 광해군은 초창기에는 그게 좀 보였는데 중반으로 갈수록 그런 면에서 상당한 문제를 보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관용-그 원인은 자신 스스로 권력 정통성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콤플렉스를 가진 것. 선조 봤고 광해군 봤고 이제 인조.

◆한명기-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조카입니다. 그리고 이제 광해군 대에 저질러진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이런 것들을 내가 즉위해서 개혁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1623년에 유명한 인조반정이라는 것을 통해서 즉위 하죠. 그런데 반정이라는 게 뭐냐하면 신하들에 의해서 추대를 받은 형식이거든요. 그래서 집권 직후에는 과거 정권이 남긴 문제점을 개혁하겠다고 하는 표방이나 의지가 상당히 컸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아무래도 이게 추대된 임금이다 보니까 자신을 왕 자리에 올린 신하들의 눈치를 너무 심하게 본 겁니다. 예를 들면 이제 1등 공신이었던 김유란 인물이 있었고 이귀가 있었는데 사실 김유나 이귀가 인조를 왕 자리에 올리는 데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사람들이 집권해서 권력을 차지하다 보니까 그다음에 욕심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이이첨는 아니지만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광해군대 문제가 있던 행태하고 별로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인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뭔가 정권이 바뀌면 변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거 기대했는데 지난 정권하고 이 정권하고 차이가 뭐냐, 이런 식의 비판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정도 되면 인조가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해서 인물들에 대한 교체라든가 이런 걸 시행했어야 되는데 역시 자신을 추대했다고 하는 원초적인 공로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까 이 사람들을 끝까지 포용한 거고 편애한 겁니다. 그게 결국 인조 정권이 인사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 가장 결정적인 측면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관용-그러면 사실 광해군 때나 인조 때나 비슷하군요, 유형은. 결국, 어느 한쪽의 권력이 독점하는 걸 방치하면 왕은 위태로워지더라. 지금까지 해 주신 말씀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신상필벌의 원칙. 물론 적재적소 기용이 있고요. 그다음에 견제와 균형 이거 세 가지입니까?

◆한명기-거기에다가 우선 인물을 갖다가 발굴하는 눈 자체가 집권자에게 필요한 것이고 신상필벌의 원칙을 넘어서서 그다음에 계속 폭을 확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정관용-포용적 용인? 탕평인사 이런 겁니까?

◆한명기-탕평을 하더라도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하는 건 아니고 원칙이라든가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서 거기에 맞는 인물들이 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뽑아서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으면 인사는 별 문제가 없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겠죠.

◇정관용-말씀 다 정리해 놓고 보니까 정말 다 좋은 말이기는 하네요. 좋은 인물을 발굴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신상필벌과 동시에 포용과 탕평의 그리고 견제와 균형을 만들 수 있도록 해라.

◆한명기-거기에 하나 추가한다고 하면 조선 시대 특히 후기의 경우에 우리가 뭐가 좀 약했느냐 하면 신상필벌 중에 필벌 측면이 상당히 약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항복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패전국이죠. 그래서 신하들 중에는 왕에게 이런 치욕을 겪게 하고 백성들을 도탄으로 내몰게 했던 책임자들을 과감하게 처벌해야 한다, 이런 건의가 이제 전쟁 끝나고 물밑 듯이 올라오는데 인조는 전혀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면 당시 청나라는 어쨌든 침략국이기는 하지만 전쟁 자체에서 놓고 보면 승전국이거든요. 당시 청나라 황제 태종이라는 사람은 심양으로 개선한 다음에 제일 먼저 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비록 조선에 나간 출전에서 이겼지만, 조선의 전쟁터에서 문제를 저질렀던 인물은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처벌해야 한다, 오히려 승전국이 패전국보다 더 철저하게 신상필벌의 원칙 특히 필벌의 원칙에 주목을 했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관용-인조는 왜 그런 걸 안 했을까요?

◆한명기-역시 제가 볼 때는 본인의 능력이라고 매도해버릴 수는 없겠지만 역시 왕자의 1인이었다가 갑자기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는 그런 반정의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측면이 상당히 큰 것 같습니다.

◇정관용-오늘 대통령의 용인술하고 조선 시대 왕의 용인술. 물론 왕과 대통령은 전혀 다른 자리기 때문에 똑같이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기본 원칙은 그래도 배울 게 많지 않을까요?

◆한명기-오늘날 대통령하고 조선 시대 왕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점이 임기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 단임 5년인데 조선의 왕의 경우에는 중간에 비명횡사하지 않는 한은.

◇정관용-종신이죠.

◆한명기-그렇죠. 즉위한 이후에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임기를 갖게 되니까 조선 왕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있습니다. 설사 한때 기용했다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쳤던 인물을 나중에 자기 임기 중에 능력이 다시 발휘되거나 뭔가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면 다시 등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정관용-그런 거 많이 보죠.

◆한명기-그런데 단임 상태에서는 이게 사실 상당히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애초부터 사람을 보는 집권자의 눈이 중요하고 혼자의 힘으로 안 된다고 하면 그걸 시스템적으로 만들 수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어떤 인사에서의 문제를 갖다가 그래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어떻게 보면 더 어렵네요, 조선시대 때보다.

◆한명기-임기가 제한되어 있고 기회라고 하는 게 널려 있지 않으니까 조선 왕에 비해서는 요즘 집권자가 훨씬 어렵다고 봐야 하겠죠.

◇정관용-게다가 사회 변화도 빠르고 언론이나 이런 것들의 전파속도도 빠르고 하니까 말이죠. 더 어려운 곳에서의 용인술. 그런데 조선 시대 때 말이에요. 요즘처럼 많은 사람들이 누구 문제 있습니다, 누구 교체해야 합니다. 막 상소 올리고 그럴 때 왕들의 대처방식이라는 게 좀 혹시 흥미롭게 지적할 게 있습니까?

◆한명기-왕들마다 조금씩 다른 경우가 있지만 예를 들어서 가장 격변기였던 선조, 광해군, 인조 때를 놓고 보면 역시 이 시기가 격변기다 보니까 왕이 생각하기에는 도덕성이냐 능력이냐 이런 문제를 따질 때 아무래도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실무적인 능력이 상당히 중요하죠.

◇정관용-당연하죠.

◆한명기-그래서 신하들이나 여론은 저 사람이 도덕성에 문제가 있으니까 채차. 채차라는 말은 요즘 개념으로 험하게 하면 잘라야 한다는 얘기인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끝까지 이 사람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제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에 왕의 아집이 작동을 해서 자신에게 좀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하는 인물들은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감싸는 경우가 있었죠.

◇정관용-천편일률적으로 말할 수 있겠군요. 시대를 읽는 눈,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뭘 문제 삼는가를 보는 눈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때마다 다르게 대응했다.

◆한명기-역시 중요한 것은 신상필벌의 원칙을 철저하게 하는 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근본적인 중심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관용-알겠습니다. 깊이 있는 공부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용인술에 대해서는.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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