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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이브] "일제시대, 모던걸 연애상대는 유부남 학생"

입력 2014-02-13 13:09 수정 2014-02-1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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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전우영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교수

◇정관용-내일이 밸런타인데이입니다. 그런데 밸런타인데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얼마 안 됐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1930년대 젊은 청춘남녀들도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했다고 하네요. 오늘 역사라이브 일제 강점기 이른바 모던보이, 모던 걸들의 연애풍속도를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전우용 교수 어서 오십시오.

◆전우영-안녕하세요.


◇정관용-몇 년도에 처음 들어온 거예요, 밸런타인데이가?

◆전우영-들어왔다기보다 소개됐다. 1925년경 당시 신문에 연애의 명절. 제목 자체가 그랬어요.

◇정관용-연애의 명절?

◆전우영-서양에 연애의 명절이 있는데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라고 한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소개됐는데 실제로 그걸 흉내 낼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소개는 됐고 들어왔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봐야 하겠다.

◇정관용-소개할 때 기사는 뭐라고 소개를 했습니까, 그 날을? 뭐 때문에 그걸 연애의 명절이라고 불렀던 겁니까?

◆전우영-유래를 아주 잘생긴 가톨릭 사제를 사랑한 한 젊은 아가씨의 비련. 또 그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때문에 교황에게 노여움을 사서 목숨을 잃은 가톨릭 젊은 신부. 이 사람들의 애절한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 서양에서는 이날 젊은이들을 모아서 무도회를 열거나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편지를 주고받거나 아니면 가벼운 꽃이나 리본 같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정관용-외국에 이런.

◆전우영-신기한 풍속이 있다.

◇정관용-있다고 소개하는 기사가 25년에 실렸다? 그러면 실제로 그걸 청춘남녀들이 즐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라고 봐야 합니까, 물론 극히 일부라고 봐야겠습니다마는.

◆전우영-일제강점기에는 즐겼다는 내용은 없어요. 얼마 안 됐죠. 이후에나 우리가.

◇정관용-최근에? 그러니까 일본강점기에는 밸런타인데이를 소개하는 정도였다?

◆전우영-알고 있었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죠.

◇정관용-저는 또 그때도 초콜릿 선물하고 그랬나 했더니...

◆전우영-그렇지는 않았었고요.

◇정관용-그때는 초콜릿도 굉장히 귀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전우영-거의 아마 구경을 못 했을 거예요. 대체로 이제 캐러멜 일본식 발음으로 미루꾸라고 하죠. 밀크카라멜을 미루꾸라고 했죠. 그런 것조차 쉽지 않았던 때니까.

◇정관용-그러면 그때는 청춘남녀들이 선물 주고받고 이런 문화 풍속은 없었다?

◆전우영-아니요.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해서는 아니지만, 사랑하는 감정이 싹트거나 연애하고 싶을 때 선물을 주고받기는 했죠.

◇정관용-그때는 주로 어떤 선물들을 했을까요?

◆전우영-가장 흔한 선물은 책이었어요. 이게 책 선물하는 사람의 가치관, 취향 이런 걸 볼 수가 있고.

◇정관용-상당히 지적인 연애를 하셨군요.

◆전우영-요즘처럼 무슨 가방이니 구두니 양산이니 이런 것들은 청춘남녀 간의 선물은 아니었고 사실 그런 일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나이 든 유부남하고 젊은 미혼 여성 사이에 연애관계 이런 것들이 많았죠.

◇정관용-불륜이네요.

◆전우영-그렇죠.

◇정관용-그러면 그게 스폰서입니까, 요즘으로 치면?

◆전우영-그에 가깝다고 봐야겠죠. 그런 방식의 선물일 경우는 작게는 액세서리라든가 의상들 이런 거고 크게는 피아노나 집 이런 것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정관용-피아노, 집? 그 정도면 거의 첩 수준 아닌가요?

◆전우영-그렇죠.

◇정관용-그런데 왜 우리가 밸런타인데이 얘기가 도입부는 됐습니다마는 일제강점기 밸런타인데이 풍속은 없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그 시대 모던보이, 모던 걸의 연애 풍속도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대뜸 소개하시는 게 불륜이나 첩 이거만 소개하십니까?

◆전우영-지금 모던걸, 모던보이 말씀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근대화는 곧 서구화다, 이런 생각을 하고 살게 된 게 일제강점 전부터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그런 방식이었죠. 그런데 서구화를 하고 싶어도 돈도 경제적 문제도 있고 실제로 소품들, 물건들을 구할 수 없었던 상황이 오래 지속됐죠. 그러다가 20년대 말, 30년대 들어오면서 그런 문물들이 들어왔을 때 서양식 생활풍속을 따라하고 실제로 서양식 외형을 갖추고 이런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모던... 이런 사람들 일컬어서 모던 걸 그랬죠. 그런데 속도랄까요, 거리라고 할까요? 이게 문제가 있어서 근대화가 사회적으로 일부 영역에서 진전되기는 했지만, 당시 한국사회 그러니까 식민지 조선 사회 전체로 보자면 아주 제한된 영역에서 전개된 거란 말이에요.

◇정관용-그렇겠죠.

◆전우영-너무 앞서 가는 사람들이다 보니까.

◇정관용-경성의 극히 일부.

◆전우영-일부 좀 여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다 보니까 거기에 대한 저항감, 반발감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퍼지는 거죠. 그래서 모던걸, 모던보이를 다른 말로 예컨대 모던 걸 같은 경우에는 모단 걸 이렇게 부르기도 했어요.

◇정관용-모단?

◆전우용-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털이 짧다 해서 모단걸. 심할 경우에는 못 돼 먹었다, 못된걸.

◇정관용-모단걸, 못된걸.

◆전우용-그렇게 부르기도 했던 거죠. 이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가 좀 불륜 얘기를 말씀드렸던 것은 이게 이제 어지간한 경제적 여유가 없고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젊은 여성 같은 경우는 쉽게 그런 형태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쉽게 불륜이나 탈선으로 빠지는 경우가 생겼던 거죠. 또 그런 이른바 전통적인 여성상보다는 신여성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부자들의 심리가 일부 있어서 그 둘이 결합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고 그게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이거나 여론의 집중적인 비난거리가 되는 일들이 잦았던 겁니다.

◇정관용-아마도 그런 모던걸들은 그런 문물이 탐나서 돈이 필요해서도 있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른바 자유연애사상, 이런 것이 실천한다는 것이 결합됐겠군요.

◆전우용-결합이 됐죠. 그런데 사실은 이용당하는 면이 있었던 거죠. 전체적으로 아직까지도 조혼 풍속이 남아 있었던 데다 남존여비니 이런 식의 전통적인 풍습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있던 시절이다 보니까 젊은 여성들이 자유연애의 상대로 보는 경우가 유부남인 경우가 굉장히 많았던 거죠.

◇정관용-그렇죠. 열 몇 살이면 다들 장가를 갔으니까, 그때는.

◆전우용-시골에 본처 두고 20살도 안 돼서. 고등보통학교, 전문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연애 상대를 구하다 보니까 그런 문제가 생겼던 거죠.

◇정관용-시골 만석꾼의 지주 아들들이 올라와서 시골에서 부쳐주는 돈 가지고 흥청망청 쓰면서 본처는 내팽개쳐두고, 그런 풍속들. 그래서 그런가 언론의 만문 만화라는 걸 제가 몇 개 좀 준비를 해 봤는데 대체로 안 좋은 평가들이 나와요, 그런 것에 대해서. 만문 만화가 뭡니까?

◆전우용-한 컷 만화에다가 조금 긴 글을 쓴 시사 만화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정관용-요즘 만평하고 다르군요. 글이 많군요.

◆전우용-글이 많죠. 원고지 한 2매 정도. 그러니까 그 정도 분량이 나올 만한 그런 책들이죠, 그런 만화죠.

◇정관용-저런 만문만화에 등장하는 모던걸, 모던보이들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전우용-지금 화면에 보시다시피 이제 굉장히 사치스럽고 그리고 아까 잠깐 보여드렸지만, 전차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여학생들을 쭉 늘어놓은 사진이 있었죠? 자리가 나도 안 앉는다는 거예요. 시계를 자랑하기 위해서.

◇정관용-시계?

◆전우용-당시 시계가 굉장히 비싼 물건 이였죠.

◇정관용-지금 저 모습이군요.

◆전우용-저런 식의 그림 보시면 좌석이 다 비어 있어요. 그래도 시계 찬 팔뚝을 들어내기 위해서 일부러 서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듯한 과시적이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고 이런 것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거죠.

◇정관용-요즘으로 치면 된장녀라고 하는 표현으로 약간 좀 비꼬는 그런 게 있는데 그 당시는 그거보다 좀 더 강도가 셀 것 같군요.

◆전우용-그러니까 표현이 속되기는 한데요. 그런 표현들이 조금 더 심한 표현으로 예를 들어서 스틱걸이라고 하는 게 있었어요.

◇정관용-스틱걸? 그건 무슨 뜻입니까?

◆전우용-남의 지팡이 노릇 하는 걸이다라는 거죠. 돈 많은 영감, 영감이라고 봐야겠죠. 거의 영감에 들어가는 그런 사람 옆에 붙어서 팔짱을 끼거나 부축을 하거나 하는 형태로 따라다니는 사람. 그렇게 해서 저런 허영심 또는 소비심리 이런 걸 채우는 사람들을 스틱걸이라고 했죠.

◇정관용-그런 것, 상대 남성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건 별로 없었습니까? 주로 여성들을 공격하는군요.

◆전우용-많이 비판도 하는데 그런 심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체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책임을 묻는 그런 분위기가 굉장히 오래됐기 때문에.

◇정관용-남존여비 사상의 그거고 조선시대 처첩 문화의 어떤 잔재 이런 것들이 남아 있었던 거라 봐야겠군요.

◆전우용-잔재죠. 남자가 뭘 하면 다 용서가 되고 여자가 하면 용서하기 어렵고. 이런 식의 대단히 불공평하고 차별적인 발상이죠.

◇정관용-알겠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만큼의 화제가 된 연애사건들도 여러 건 있었죠?

◆전우용-굉장히 많았죠. 음독자살 또 따라서 죽는 동반자살 이런 것도 있었고 대표적인 사례로 보자면 일단 자유연애의 전도사, 근대문물의 전도사 역할을 자행했고 인정했던 춘원 이광수 같은 경우에도 본처를 두고 자유연애를 했는데 연애도 두 사람이랑 양다리 연애를 했었어요.

◇정관용-본처가 있고. 일본 유학 중이었죠?

◆전우용-그렇죠. 유학 중에 만났고 따라서 상해까지 갔다가 돌아와서도 계속 연애를 지속을 했는데 한 사람은 당대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이라는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당대 유명한 예술가 나혜석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다가 또 결국 허영숙과 같이 지내는 이런 사례가 당시 화제가 됐던 일이고요. 가장 유명하기로는 사회 참여를 불렀던 윤심덕...

◇정관용-동반 자살했죠?

◆전우용-그렇죠. 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배 안에서 실종됐죠. 함께 실종이 됐는데 행적을 못 찾았기 때문에 배에서 둘이 투신해서 동반 자살했다, 이렇게 알려졌고.

◇정관용-윤심덕과 김우진.

◆전우용-김우진. 부호의 아들로서 극작가였고 역시 유부남이었고 윤심덕은 미혼이었고 이런 것들이었죠. 그러니까 당시 이런 연애감정에 빠졌던 많은 미혼 여성들이 사회의 인습을 원망을 했던 거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게 만드는 이런 풍조를 원망했던 건데. 사실 따지고 보면 유럽에서도, 유럽 학계에서도 그런 얘기를 해요. 자유연애 풍조가 공인되기 전까지는 부부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깃드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고 행운이었다.

◇정관용-다 가문과 가문 간의 결혼이고 이런 식이었죠.

◆전우용-전략적 결합이었지 사랑은 아니었다는 거죠. 인류가 혼인관계를 유지해 온 게 적어도 5, 6000년은 될 텐데 그동안의 이른바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결혼에 이르는 그런 역사를 만들어낸 게 우리의 경우에는 길어야 50년. 이렇게 보시는 될 겁니다.

◇정관용-50년 전만 해도 또 중매결혼이 더 많았었고 하니까.

◆전우용-제가 대학 다닐 때도 아직 그런 분위기가 좀 있었어요. 연애결혼은 좀 되바라진 사람들이나 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좀 있었죠.

◇정관용-그나저나 남녀칠세부동석 이런 식의 풍습이 있었던 시절인데 연애들은 주로 어디서들 했습니까?

◆전우용-쉽지가 않았죠. 주로 이제 정동 길 보면 저 길을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 이런 속설이 있지 않습니까?

◇정관용-그건 요즘 나온 얘기 아닌가요?

◆전우용-꽤 오래됐어요. 꽤 오래됐는데 일설에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말이다라는 말도 있는데 믿기 어렵고요. 제가 추정하기로 배재, 이화가 같은 골목길로 걸어들어가다가 이화학생들은 오른쪽으로, 배제학생들은 왼쪽으로 꺾어지는 그런 것을 보고 나온 얘기가 아닐까 싶기는 한데요. 그렇게 길거리, 길거리에서 눈이 맞는 게 첫 번째 일이죠. 어떻게 어떻게 연애편지를 주고받고 해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 만날 수 있는 데가 많지가 않아요. 조금 여유가 있으면 유람택시라는 게 있었어요.

◇정관용-유람택시?

◆전우용-유람임대택시라고 하는 게 있는데, 30년대에는. 그걸 타고 별 볼일 없이 한강 다리 야경 보면서 노량진까지 갔다 오더니.

◇정관용-그냥 드라이브 하는 거죠?

◆전우용-드라이브죠. 전차 타고. 당시 전차 종점이 청량리였니까 전차 종점인 청량리까지 가서 거기서 청량사라든가 그때는 좀 숲이 우거진 그런 교회였어요. 거기서 데이트를 하든가. 아니면 조금 심해서 사회적으로 비난의 소지가 됐던 건 이런 것들이 있었어요. 한강다리, 지금 제1한강교죠. 한강대교. 한강대교 밑에는 보트 임대해 주는 업소들이 있었어요. 그 보트를 타면 지붕 위에 차양을 치게 돼 있어요.

◇정관용-천막이 있는.

◆전우용-천막이 있는 보트죠. 젊은 남녀학생이 보트를 같이 타고 있는데 그걸 누가 보고 쓰는 거예요. 보트가 한동안 흔들리고 그리고 젊은 청춘남녀가 얼굴이 뻘게져서 내려온다. 이런 식의 그런 식의 것들이 있었고요. 때로는 이제 시내 여관 이런 것들이 좀 이용되기도 했었죠. 어쨌든 좀 남의 눈에 띄면 또 연애한다는 소문이 나면 젊은 여성 같은 경우는 그게 곧 신세 망친다는 등식이...

◇정관용-신세 망친다, 시집 다 갔다 이런 거죠?

◆전우용-이게 성립하던 때였기 때문에 남 눈에 띄는 곳에는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즐기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죠.

◇정관용-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감수하고 나서는 분들은 조금 지식인, 신여성 가운데서도 유명인, 전문직 종사자 이런 몇몇으로 제한되겠군요.

◆전우용-그렇죠. 그러니까 소문이 나면 일단 그건 신문에 날정도 사건이 돼버리니까 쉽지 않았던 형태고요.

◇정관용-모던보이, 모던걸들의 연애풍속 그랬는데 이거 정말 그 당시 인구로 치면 0.01%에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전우용-0.01보다는 많았을 것 같기는 한데 워낙 희귀했죠.

◇정관용-그리고 연애할 때 명심해야 할 지침 10가지, 이런 게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는데 이건 또 참 특이한 현상이에요. 그런 게 잡지까지 나올 만한 정도입니까?

◆전우용-워낙 서구화라고 하는 것이 당시에는 낯선 것들 천지였어요. 연애뿐 만 아니라 심지어 1934년에는 어떤 잡지에 전문연구라는 글이 실린 적이 있었어요.

◇정관용-무슨 뜻이죠?

◆전우용-입술을 맞대기 연구. 키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워낙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그게 뭐냐, 어떻게 하는 거냐. 이걸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만해 선생이 ‘님의 침묵’에서 ‘날카로운 님의 첫 키스는’이라는 내용을 썼을 때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죠. 그런 것처럼 하나하나 설명이 필요했던 거예요. 연애라고 하는 것도 1910년대부터 자유연애 사조가 소개가 됐고 청춘남녀가 그러고 싶어서 마음을 졸이면서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르니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는 거죠. 예를 들어서 한 십계명 같은 것이 1935년 주로 여성잡지였던 신가정이라는 잡지에 실렸는데 이런 내용들이 있어요. 가장 흔한 두어 가지를 예를 들자면 일단은 이성과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면 주저하지 말고 그다음에 무슨 얘기를 나올 것 같습니까?

◇정관용-뭐죠?

◆전우용=요즘 같으면 고백해라겠죠. 그게 아니고 부모에게 통사정해라.

◇정관용-부모에게 말해라?

◆전우용-다른 데 시집보내지 말아 달라 그 얘기겠죠. 그다음에 이제 처음 만난 이성을 연애상대로 생각하지 말라, 알게 된 최초의 이성을 연애대상으로 생각한다. 안 된다 세상에 남자는 많고 여자도 많다.

◇정관용-한 눈에 가지 말아라 그런 뜻이군요.

◆전우용-그런데 또 그런 연구가 나왔다는 건 워낙 갇혀 있다 보니까 이성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정관용-알겠습니다. 오늘 방금 키스 연구까지 실렸다 하는 것. 그걸 넘어서서 연애라는 것 자체가 서구문물이었다는 것. 이렇게 역사를 통해 배웁니다. 그나저나 밸런타인데이에 대해서 전 교수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 마무리 지을까요?

◆전우용-지금 우리가 서구화에 대한 열망이랄까요, 충동이랄까요, 이런 것들을 좀 적절히 견지하면서 우리 전통과 관련해서 사랑 풍속을 만약에 발전시켜 왔다면 청춘남녀들의 사랑 고백날은 아마도 칠월칠석이 되지 않았을까.

◇정관용-당연하죠. 칠월칠석.

◆전우용-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세시풍속이 사라졌어요. 그러니까 명절이 없다는 것은 일상이 단조로워졌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까 억지로 밸런타인데이, 화이트 데이 무슨 블랙데이, 빼빼로데이, 로즈데이 수많은 데이들을 만들어서.

◇정관용-그런 거 다 상술이죠, 상술.

◆전우용-그런데 상술인데도 사람들이 따라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전통과 격조된 분리된 삶을 살아왔던 하나의 부작용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궁극적으로도 장기적으로는 우리 전통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상술과 좀 떨어져서 진심을 담은 명절들을 즐기는 그런 문화가 앞으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입니다.

◇정관용-알겠습니다. 역사라이브 오늘 여기까지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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