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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이브] 전우용 "독립운동가 동상 1호가 안중근 의사"

입력 2014-01-23 16:20 수정 2014-01-2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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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안중근 의사 철저한 폄하 공작"
- "일제 치하 국토 곳곳에 이토 히로부미 동상"
- "해방 바로 다음 달 '안중근 동상' 건립운동"

■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5:00-16:30)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전우용 교수

◇정관용-지난 월요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연 첫날 1,000여 명이 다녀가는 등 북새통을 이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다. 또 망언을 내뱉었죠. 한쪽에서 영웅, 또 다른 한쪽에서는 테러리스트. 역사 라이브 시간. 오늘은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한양대 동아시아연구소 전우용 교수 나오셨습니다.

◆전우용-안녕하세요.

◇정관용-우리 대통령이 사실 표지석 좀 세워달라라는 식으로 중국에 요청했는데 중국이 훨씬 크게 응대를 한 거예요. 기념관.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우선 첫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전우용-이에이츠카의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산 자가 죽은 자를 되살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한다. 역사가 이미 지난 일이 아니고 정치의 문제이자 생활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야기인데요. 이미 100여 년 전의 사건인데 그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이 일종의 국가 간 외교, 정치의 문제가 되고 어떻게 보면 역사 전쟁이라고 할 만한 사건으로 비화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중국에서 그렇게 크게 세운 것도 사실은 우리 정부에 대한 응답의 의미가 있겠지만.

◇정관용-일본을 겨냥한 거죠.

◆전우용-일본 보라고 한 거라고 생각이 되거든요.

◇정관용-그런데 일본에서는 안중근이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해서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다. 일본 법률적으로 보면 맞죠.

◆전우용-맞죠.

◇정관용-이런 식으로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일본 국민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입니까?

◆전우용-일본 메이지 유신 그러니까 근대 일본의 정치 체제 사회 구조를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공로를 세운 공로자, 이렇게 평가받고 있고요. 또 그래서 일본 메이지 헌법의 토대를 닦은 사람, 이렇게 보고 있고요. 특히 이제 메이지유신 이후에 일본의 대외정책 외교를 주도했던 탁월한 정략가 이렇게 보고 있어서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 20년간 일본 1,000엔권 화폐에 얼굴이 올라가기도 했고요. 그리고 또 당대에 이토에 대한 평가가 새로운 평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이제 호색한이다. 여자관계가 워낙 문란하다고 그래서 이토가 죽는 장면을 그린 당시 일본 한 잡지의 삽화는 죽어 쓰러지는 이토의 그림자를 계집 녀 자로 그려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고 그랬었죠.

◇정관용-그 당시에 그러면 1909년이니까 일제가 강제합병하기 바로 직전인데 그때 조선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역할을 했나요?

◆전우용-을사늑약에서부터 한일합방 직전까지 5년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총괄 지휘하고 추진했던 인물이고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영친왕의 스승을 자처하면서 통감이라는 직호보다는 태사, 큰 스승이다.

◇정관용-태사.

◆전우용-이런 직함으로 불리는 걸 더 좋아했고 또 그렇게 많이 불렀어요.

◇정관용-공식직함은 통감?

◆전우용-한국통감이고요. 그렇게 불렸고요. 일본, 당시 언론이 1907년부터 완전히 통제됐던 시절이어서 이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리나 문란한 사생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식 언론에서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토야말로 한국에는 일본 그 자체이고 이토가 부임한 이래로 치안이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하고 또 당파 싸움의 폐습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토가 한국 근대화의 공로자이자 은인이다. 이런 식의 이제 이야기가 공식적으로는 유포됐고요. 또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정관용-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전우용-그래서 이토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정부도 정부 차원에서 조문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정관용-대한제국 정부가?

◆전우용-이건 할 수밖에 없는 강압이니까. 상황이니까. 이게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조문사절단을 파견한 최초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거와는 별도로 일부 민간에서 일본에 우리가 한국인들이 대표해서 사죄하러 가야 한다며 사죄사절단을 모으기도 하고요. 유족들에게 사과하는 뜻에서 돈을 줘야 하니까 모금을 하자 하는 모금 운동이 벌어지기도 하고요. 심지어는 몇몇 좀 아주 적극적인 일본인들의 눈에 잘 보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토 동상 건립운동을 시작해요. 이게 아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실현됐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동상이 이토 동상이 될 뻔했죠. 물론 이토 동상은 나중에 섭니다.

◇정관용-저는 깜짝 놀랐어요. 당시 안중근 의사의 쾌거에 대해서 조선의 백성들이 환호성을 질렀을 줄 알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전혀 없었어요, 그러면?

◆전우용-아니죠.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의병전쟁의 여진이 남아 있었던 때고요. 의병에 참여했었던 사람들 또 그 가족들, 많은 분이 많은 사람이 통쾌했겠죠. 하지만 그걸 공식적으로 표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공식적인 담론은 오히려 안중근을 범죄자시 하고 이토가 희생된 것이 문제다. 그래서 일진회 같은 잘 아는 친일 단체 아닙니까?

◇정관용-일진회?

◆전우용-이 단체는 이토 죽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합방청원운동이라는 것을 벌여요. 이제 이런 논리였죠. 한국인이 일본의 원로대신인 이토를 죽였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침공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또 실제로 일본 내에서 한국을 침공하자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만약에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 사태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황제 한 사람만 책임지면 된다. 황제가 주권을 일본에 양도하면 온 백성이 편안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갖고 합방청원운동을 펼쳤고요. 그게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실렸죠.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일본 왕이 한국인들의 부탁을 받아들여서 합방한 거다, 우리가 강압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논리를 유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거죠.

◇정관용-지금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영웅으로 추앙합니다.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다 이렇게 평가가 딱 엇갈리는데 바로 그 당시, 1909년 그 당시 조선에서도 그렇게 엇갈렸었군요. 평가가.

◆전우용-엇갈렸죠. 이미 정치 권력 자체가 일본인이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권력 주변에서 나타나는 평가는 권력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봐야 될 것 같고요.

◇정관용-권력 주변은 거의 일본식 해석이었겠죠.

◆전우용-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고요. 다른 식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죠.

◇정관용-일제 치하 내내 그렇게 평가가 엇갈렸습니까?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에 대한.

◆전우용-한국 독립 운동 진영. 그러니까 공식적인 문건으로 표현된다면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이라든가 미국에서 발간된 신한 민보라든가 이런 곳에서는 안중근 의거 기념식도 하고요. 안중근 의사 추도회도 하고 계속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민족영웅으로 추앙하는 분위기를 끌어올렸지만, 국내 언론에서는 이게 공식적으로는 계속 이토 은인론을 유포시켰고요. 그 당시에 일제하에서 고위직에 있었거나 큰 사업을 해서 성공했거나 이런 사람들의 회고록들을 보면 거의 한결 같이 한국 근대화에 제일가는 은인으로 이토를 꼽고 있어요. 이토 덕분에 한국 사람들이 이만큼 살게 됐다,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유포시켰고요. 그래서 1934년에는 하필이면 위치가 그런데 장충단, 거기가 을미사변 때 희생됐던 사람들을 제향 하기 위해서 세웠던 국가 제단이거든요. 장충단 바로 옆 지금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를 기리는 절을 하나 지어요. 히로부미사, 방문사라는 절을 지었고요. 거기에 이토 동상을 세웠고. 또 전국 평양이나 의주 지역에도 이토 동상을 세웠다고 해요. 동상을 세우면서 이토를 한국 근대화의 제일 제일가는 은인으로 추앙하는 그런 이야기가 공식적인 이제 언론이나 교육이나 이런 지면들을 지배했죠.

◇정관용-해방되고 나서 그 동상들은 다 철거됐겠죠?

◆전우용-이토라는 사람이 바로 이렇게 한국 근대화의 제일가는 은인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에 상징 자체는 개인 이토가 아니죠. 일본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 지배 자체가 이토로 표상되는 거잖아요. 일본 식민지 지배가 끝났으니까 당연히 이토의 상징성도 전복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거고요. 조선 신궁이나 각지 신사들을 허는 것과 거의 같은 시점에서 동상들을 철거했고요. 특히 동상들은 일제 말기 전쟁 때 군수물자를 다 일본인 동상을 제외한 동상들. 한국인 동상도 일부 있었고요. 학교 설립자라든가 이런 사람들, 또 서양인 동상도 일부 있었는데 그건 다 철거해 갔는데 이토 동상이나 일본인 동상은 남겨놨었거든요. 그런데 그거 철거했고요. 동값이 비싸던 때니까 여러 이유로 철거해야 마땅했던 거죠.

◇정관용-그런데 1939년인가, 안중근 의사의 아들과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 만났다고요? 그건 무슨 사건입니까?

◆전우용-조선총독부 주선이죠. 1937년 이후에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이른바 내선일체라고 하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화해, 일체화 이런 걸 강조하는 시점이니까 상징으로서 화해 퍼포먼스를 연출한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아들 자체가 워낙에 고통스럽게 어렵게 살다 보니까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크게 대대적으로는 보도는 안 됐지만, 일본신문에 안중근의 아들, 이토 히로부미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다, 이런 제목으로 붙었고요. 그다음 다음에는 딸과 사위도 방문사에 이토를 참배하고 아버지 죄를 대신 비는 이런 의식을 거행했는데 일종의 강요된 의식이고 강제의식이었다고 봐야 하죠.

◇정관용-해방 이후에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가 조금 조금씩 다 바뀌게 되겠죠?

◆전우용-조금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바뀌었죠.

◇정관용-한꺼번에 확 바뀌었습니까?

◆전우용-대한민국 헌법이 그렇게 시작하잖아요. 우리 대한국민은 삼일운동으로 건립된 이런 것으로 시작됩니다, 전문이. 무슨 얘기냐 하면 이토에 대한 표상, 이토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자,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미지 속에서, 전략 속에서 만들어졌던 이미지였단 말이에요. 식민지 지배를 끝내야 하니까 끝났으니까 그것과 달리 독립 운동가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겠다고 하는 선언이었던 거죠. 그래서 1945년 9월. 해방된 바로 다음 달에 안중근 의사 동상 건립 준비회가 만들어져요.

◇정관용-최초였겠네요?

◆전우용-그게 최초였습니다. 해방 후 최초로 동상 건립운동이 일어난 것도 안중근이었고요. 사실 최초로 만들어진 독립운동가 동상도 안중근 동상이었고요.

◇정관용-그래서 어디에 세워졌나요?

◆전우용-처음에는 지금 숭의여전 자리.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던 뒷자리거든요. 처음 통감부라고 해서 이토가 직무 했던 장소 바로 뒤에다 세웠다가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다음에 지금 자리. 거기는 조선 신궁이 있던 자리예요. 일본 식민통치의 상징이자 식민통치의 핵심이었던 자리에 안중근 동상을 지금 세워놓고 안중근 기념관이 바로 남산에 있죠. 그게 바로 이제 일본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완전히 대비시키고 독립 운동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인지하겠다고, 인식하겠다고 하는 그런 현재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관용-안중근 의사께서 일제 식민통치의 본거지였던 장소를 꽉 누르고 있다, 그런 의미로 장소를 거기다 잡은 거였군요. 또 안중근 의사 어머님도 참 대단하신 분 아닙니까?

◆전우용-그렇죠. 사실은 그런 생각을 좀 해 봐요. 그러니까 우리 교과서가 우리 근대사가 워낙 식민지배 하에서 신음하던 역사이다 보니까 우리의 민족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다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잖아요. 저희도 부모들로서 안중근, 윤봉길처럼 살아라. 이렇게 자식한테 얘기 못 하겠거든요. 그렇게 얘기하기 어려운데 그 당시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로 보편적이고 넓게 확산했었는지 그걸 보여주는 삶이었던 것 같아요. 아들에 대해서 그렇게. 아들이 그렇게 죽음의 길을 가는데도 의연하게 지켜봤다는 그렇게 봐야 하겠죠.

◇정관용-편지가 있지 않습니까? 안중근 의사가 옥에서 항소할까 이런 걸 편지를 보내니까 답장에 그냥 죽어라. 어머니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전우용-어차피 안 되는 거 아는 일인데요.

◇정관용-그래도 어쨌든.

◆전우용-아버님도 그렇고요. 결기가 대단한 분들이었고요. 그런 의지가 사실은 안중근 의사가 없었다면 또 그때 의병전쟁이 없었다면 우리 한국사가 얼마나 허망했을까. 뭘 아이들에게 가르쳤을까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단 세 발의 총알이지만 그것이 한국 역사, 한국인들의 근대의식을 심어준 영향은 대단히 컸던 거죠. 저런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속절없이 망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었던 거겠죠. 다만 한 가지 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본이 테러리스트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영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한국어, 중국어가 한자어가 의사예요. 우리는 안중근 의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이제 일본에서 테러리스트라고 하니까 중국정부에서 저명한 의사다라고 반박을 했는데. 이 개념이 이제 식민지 피압박을 겪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나 그 정도에서 통용될 수 있었던 말이거든요. 우리가 의사, 열사 막 섞어 쓰는데 의사라고 하는 것은 대의를 위해서,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나 민족의 사형당한 사람을 의사라고 하고요. 또 열사라고 하는 것은 이제 사람을 죽이지는 않고 항거하다가 단순히 체포되거나 단식으로 스스로 자결한 사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당한 사람을 열사라고 부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테러리스트라고 영어로 부르는 표현이나 일본에서 단순하게 범죄자 이렇게 부르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얘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역사를 이제 기억하는 방식이죠.

◇정관용-그렇죠. 어쨌든 테러리스트라는 발언을 내놓는 자체가 식민통치에 절대 사과할 생각이 없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우용-여전히 일본 우파의 인식은 그 당시와 똑같아요.

◇정관용-알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전 교수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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