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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빨리 더 멀리'…인종차별 뛰어넘은 제시 오언스

입력 2015-03-3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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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36년 베를린올림픽 하면, 우리는 고 손기정 선생을 떠올리지만, 미국의 흑인 스프린터 '제시 오언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35년 전 오늘, 세상을 떠난 오언스는 극심한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흑인들이 스포츠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는데요.

오광춘 기자입니다.

[기자]

멀리뛰기 결승 3차시기, 10만 관중이 독일 루츠 롱을 주목합니다.

7m87. 미국 제시 오언스와 공동 1위, 히틀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마지막 시기가 남은 오언스는 손에 난 땀을 닦은 뒤 힘차게 달려나가 구름판을 딛습니다.

8m6. 세계신기록.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뽐내는 선전장이었던 베를린 올림픽, 멀리뛰기 시상대 풍경은 히틀러가 원했던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하켄 크로이츠 대신 베를린 하늘에 나부낀 성조기, 패자 롱과 승자 오언스가 다정하게 걸어가는 장면이 히틀러에겐 못마땅했을 겁니다.

오언스는 그 당시 지구촌에서 가장 빨랐습니다.

100m 예선 10초20, 이 역시 세계신기록이었습니다.

조금은 엉거주춤 뛰는데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오언스.

[이기광 교수/국민대 체육학과·체육역학 전공 : 그 트랙이 우레탄 트랙이 아니라 그냥 흙이었고요. 우사인 볼트하고 똑같은 트랙 환경과 신발을 신었다면 그 기록 차이는 얼마일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멀리뛰기와 100m에 이어 200m와 400m 계주까지 금메달. 올림픽 육상 첫 4관왕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의 유일한 다관왕이었습니다.

[이준 감독/제주도청 육상팀 : 키가 큰 선수가 아니기때문에 회전속도를 빨리하는 주법으로 뛰면서 상체를 앞으로 경사를 줘 (빠른 발로 속도를 높이는) 피치주법으로 뛰었습니다.]

미국에 금메달 4개를 선사한 영웅, 뉴욕 맨하튼에서 열린 퍼레이드가 환영의 끝이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선수단을 백악관에 초대했는데 오언스는 빠졌습니다.

숙소도, 식당도 백인선수들과 함께 쓸 수 없었던 오언스, 미국에서는 멸시받는 흑인일 뿐이었습니다.

인종차별보다 더 무서운 건 어쩌면 가난이었습니다.

"금메달 4개를 땄지만 그 금메달을 먹을 순 없지 않느냐"는 오언스의 말은 흑인의 궁핍한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올림픽 후 육상으로 돈벌이를 하려다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고, 돈을 위해 말과 시합하기도 했습니다.

[정윤수 교수/한신대·스포츠평론가 : 서커스의 어릿광대처럼 놀림을 당할 정도로, 특히 제시 오언스는 특별한 자의식 없이 그것을 즐겁게 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울분이 있고, 견뎌야되는 것을 견딜수 밖에 없는….]

하지만 오언스가 의도했든 안했든 그의 존재는 세상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육상 남자 200m 시상식에서 검은장갑으로 흑인들의 울분을 표시했던 미국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 메이저리그의 첫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1947년), PGA 최초 흑인 멤버 찰리 시포드(1961년), NFL의 첫 흑인 쿼터백 말린 브리스코(1968년), 테니스 첫 흑인 메이저 우승자 아더 애쉬(1968년), 모두 차별의 벽을 넘은 흑인 스포츠스타들인데, 그 시작은 오언스였습니다.

[정윤수 교수/한신대·스포츠평론가 : 흑인 제시 오언스가 뜀으로써 흑인이 우월하다는 걸 증명한게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증명한 겁니다.]

오언스는 편견과 차별, 모욕과 수모의 대상이던 흑인의 페이소스를 더 빨리, 더 멀리 가는 걸로 풀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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