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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거물 여간첩의 남자' 황 중위 "9년 만에 밝힌 진실은…"

입력 2017-11-09 14:00 수정 2017-11-0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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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거물 여간첩의 남자' 황 중위 "9년 만에 밝힌 진실은…"


2008년 8월, 검경과 군 기무사, 국정원은 어벤저스처럼 뭉쳤다. 남파된 특수 여간첩 원정화를 검거한 '합동수사본부' 얘기다. 당시 발표는 이랬다. 원정화는 15살부터 특수 간첩 훈련을 받았다. 온몸이 무기인 살인 병기인데, 탈북자를 위장해 잠입했다. 국정원을 속이려 임신까지 했고, 정보를 수집하려 여러 명의 군인과 동침했다. 황장엽 암살 지령도 받았지만 다행히 '우리가' 잡았다.

원정화의 자백으로 의붓아버지 '김동순'. 그리고 원정화의 연인 '황주용 중위'도 함께 구속됐다. 김동순은 원정화에게 지령을 내리고 공작금을 대준 보위부 간부. 황 중위는 간첩임을 알고도 군 기밀을 빼준 혐의다. 김동순은 무죄를 받았지만, 황 중위는 3년 6개월 실형을 살았다. 원정화 진술이 주요 증거였는데, 희비가 엇갈렸다.

[취재수첩] '거물 여간첩의 남자' 황 중위 "9년 만에 밝힌 진실은…"


26살이었던 황 중위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됐다. 그를 만났다. 사건 9년 만이다. 한눈에 봐도 내성적인 스타일. 건장한 체격은 여전했다.

▶ 출소 후 어떻게 지냈습니까?
=이런 저런 일 하다가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택시 운전을 하고 있어요. 장교 출신이지만 그 사건 때문에 기업에 지원서 내밀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신원 조회하면 금방 나올테니까.

▶ 원정화를 신고하지 않고, 군 기밀을 빼줬다는데?
=저는 정말 간첩인지 몰랐어요. 알았다면 애까지 있는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했겠습니까. 그때 제가 너무 바보였던 거죠. 기밀이란 것도 안보 강사 2명의 이름인데. 자기가 아는 사람 같다고 이름이 뭐냐고 해서 알려준 거죠.

▶ 9년 만에 TV 카메라 앞에 섰는데?
=아버지가 청와대에 청원을 하셨어요. 저는 나중에 알았죠. 언론에서 연락이 왔지만 한참 고민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과거의 진실이 하나 둘씩 밝혀지는 걸 보며, 저도 마음을 먹었습니다.

놀라운 얘길 꺼냈다. 기무사령부 수사 과정에 회유와 압박이 있었다는 것. "왜 이렇게 일을 어렵게 만드냐. 옷만 벗고 끝날 일을"이란 수사관의 말에 결국 허위 자백을 했다고 한다. "예, 저는 원정화가 간첩인 걸 알았습니다".

▶ 수사관의 말을 믿었다고요?
=법전을 보여주면서 그러더라고요. "넌 군인이라 무기 아니면 사형이야. 옷만 벗으면 돼".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믿었습니다. 그래서 조사 9일째 되는 날 허위 자백을 한 거죠.

[취재수첩] '거물 여간첩의 남자' 황 중위 "9년 만에 밝힌 진실은…"


거짓말은 아닐까. 그런데 기소 직전에 그가 적은 '메모'가 발견됐다. 자신의 허위 자백을 후회하는 내용인데, 성경책에 끼워뒀던 모양이다. 재판 도중 '허위 자백'을 밝혔지만, 실형을 받았다. 군사법원 재판이었다.

재판 기록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기무사 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CD 영상도 입수했다. 51시간 분량이다. 황 중위의 진술 변화가 생생히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허위 자백'을 한 그날(2008년 7월 25일) 3시간 분량이 없었다. 사라진 3시간. 그리고 7월 28~29일 이틀치 영상은 아예 빠져 있었다. 전문가와 함께 검증한 결과 이 자료는 '편집본'이었다. '원본'이 아닌 '편집본'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그때는 증거가 됐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원정화의 편지다. 각각 다른 교도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공범끼리 편지를 주고받다니 놀라웠다. 교도소 검열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날 편지가 왔다. 그 편지 전부를 입수했다. 주로 '진술 바꾸지 마라. 그럼 더 일이 커진다'는 내용이었다. '넌 군인이라 무기 아니면 사형'이란 기무 수사관의 말을 원정화가 똑같이 반복했다. 정말 원정화 쓴 걸까? 전문가 검증 결과, 일단 필적은 원정화의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의심스러웠다. 원 씨는 편지에서 '검사가 주소를 알려줬다'고 했다. 편지 봉투에는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그런데 기무사 측에 확인한 결과, 군 교도소에는 서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군가 지웠거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단 얘기다.

[취재수첩] '거물 여간첩의 남자' 황 중위 "9년 만에 밝힌 진실은…"


수소문 끝에 원정화를 찾았다. 거물 여간첩은 평범한 식당 종업원으로 살고 있었다. 취재진을 마주한 원정화.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회색 그랜저가 갑자기 나타나 그를 태우고 사라졌다. 이튿날엔 경찰차가 와서 그를 태우고 갔다. '숨는 자가 범인'이라 했던가. 뭔가 석연치 않단 느낌이 강해졌다.

원정화는 경찰이, 황 중위는 기무사가 수사했다. 경찰과 기무사는 일련의 조작 의혹에 대해 '사법부 판결이 끝난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원정화에게 "너를 김현희처럼 살게 해주겠다"고 말한 의혹을 받는 검사는 "바쁘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원정화가 북한인과 내통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금품이나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하위 '정보원' 수준이지, 결코 특수훈련을 받은 '마타하리'는 아니라는 게 전직 기무수사관 이 씨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연인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무얼까. 이 씨는 "윗선이 있어야 지령이 있는 것이고, 그래야 간첩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 보위부 출신인 한 탈북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를 특수 여간첩으로 만들었을까. 당시는 광우병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다.

그 내용은 오늘(9일) 밤 9시 30분,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추적! 여간첩 원정화와 연인 황 중위> 편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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