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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 시대 이끈 주축…김영삼 전 대통령, 파란만장 '정치 60년'

입력 2015-11-22 12:01 수정 2015-11-2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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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3김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3김 시대는 끝났지만, 역사에 세 사람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김승현 기자입니다.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에 첫 발을 내디딘 건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입니다.

서울대 재학 시절 웅변대회 입상을 계기로 알게 된 장택상 당시 국회부의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 경남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만 26살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경남중학교 재학 시절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붓글씨를 써붙였던 '야망'의 첫 단추였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자유당을 탈당한 뒤 정치적 스승인 조병옥 박사를 만났고, 1960년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신민당을 창당하자 합류해 기나긴 야당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제1야당인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으로 활약하며 박정희 정권과 대립했습니다.

42살 때이던 1969년엔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정권 교체를 꿈꾸지만 1971년 결선 투표에서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졌습니다.

1972년 미국에 머물때 10월 유신이 발표되자 미 국무부의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귀국해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탄압과 저항의 세월. 김 전 대통령은 1979년 가발수출업체인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원한 이른바 YH사건으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부마 항쟁의 발단이 됐고, 유신 정권은 문을 닫게 됩니다.

1983년 광주민주화 운동 3주년을 맞아 신군부에 맞서 23일 간의 단식투쟁을 벌였고, 정계 은퇴까지 선언하지만 다시 민주산악회를 결성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대권 경쟁자이던 김대중·김종필은 말그대로 3김 시대의 라이벌이자 동반자였습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됐고, 김 전 대통령은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대권을 노리던 김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습니다.

3당 합당.

14대 대통령에 당선돼 '문민 정부'를 출범 시킨 김 전 대통령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았다"고 자평했지만 '대통령병 환자의 야합'이라는 비난도 감수해야했습니다.

이후 금융실명제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지만 차남 현철씨 비리와 외환 위기 등으로 가장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으로 퇴임해야 했습니다.

특유의 입담으로 후배 정치인들에게 일침을 날렸고, 지난 해 대선 때는 그를 따르는 상도동계 인사들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면서 정치권의 변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거제도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 특유의 뚝심과 용인술로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김영삼 전 대통령.

60년 정치 인생의 발자취와 공과는 이제 역사 속에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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