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처음엔 사람들로부터 천박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얼마 안 가 세상은 그의 음악에 푹 빠졌습니다. 그건 미국의 대중문화가 지구촌의 주류가 되는 중요한 계기였는데요.
80년 전 오늘 태어난 엘비스를 강나현 기자와 함께 만나보시죠.
[기자]
높이 빗어 넘긴 머리에 까만 구렛나루과 껄렁한 몸짓, 장난기 가득한 눈길 한 번에 여성들은 어쩔 줄 모릅니다.
그렇게 등장한 엘비스는 순식간에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습니다.
1956년 데뷔 첫 해, 지금 흐르는 러브 미 텐더 등 4곡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남무성/음악평론가 : 기성세대가 볼 땐 도발적이라고 느끼는 요란한 무대매너와 역동적이고 샤우팅(외치는 창법). 전후 신세대들이 볼 때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보수적이거나 고리타분했기 때문에 (젊은 세대의)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던 좋은 아이콘이었죠.]
그때까지도 문화의 변두리를 전전했던 일이십대 젊은 세대가 엘비스를 통해 문화의 중심으로 이동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천박한 날라리, 엘비스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악에 끌려들어갔습니다.
인기 절정이던 1958년 엘비스는 군에 입대한 뒤 미리 취입했던 앨범으로 음악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엘비스는 역동적인 몸짓과 매너도 매력적이지만, 그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들을 사로잡은 건 목소리였습니다.
전형적인 백인 가수인데, 그 목소리에는 흑인 가수에게서 나올 법한 소울이 묻어난 겁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노예 출신 흑인들이 많이 살던 미국 남부에서 자라나면서 그들의 음악을 익혔던 덕분입니다.
[강일권/음악평론가 : 그 당시 백인 음악 제작자들의 가장 큰 숙제이자 흥미로웠던 부분이 '흑인 음악을 백인들이 멋있게 부르면 어떨까'였는데 엘비스가 갖고 있던 기본적인 보컬 능력들이 결합되면서 (로큰롤이) 탄생하게 된 거죠.]
해방 후에도 여전히 천대받던 흑인과 그들의 문화를 백인 사회로 끌어온 엘비스.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결과적으로 음악, 더 나아가 문화세계의 흑백평등을 가져오게 된 건데요, 42살이던 1977년 심장마비로 죽기 전까지 엘비스는 음악을 통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임진모/대중문화평론가 : '가난한 사람도 창의와 노력과 믿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신분상승 할 수 있다'는 것을 미국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주장할 수 있게 됐어요. 미국은 전 세계 문화전쟁에서 50년대 이미 승리할 수 있었는데 그 주역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던 거죠.]
엘비스가 죽기 직전 살았던 테네시주 멤피스의 그레이스랜드는 미국 국가문화재로 지정됐는데, 전 세계에서 매년 50여만명이 찾아와 그를 추모합니다.
엘비스가 살아있다면 꼭 80세가 되는 오늘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남긴 음악을 들으면서 행복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