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경복궁 뒤편에 있는 세검정은 이름 그대로 인조반정 때 칼을 씻은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조선시대 '세초'가 행해졌던 곳입니다.
세초란 사관이 먹으로 한지에 써온 기록, 즉 사초를 지우는 일을 말합니다.
왕이 승하하면 사관들은 그동안 기록해온 사초를 바탕으로 실록을 완성하는데 실록이 완성되면 그 자료들을 모두 물에 씻어서 흘려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조금 이례적인 일도 있긴 했습니다. 1776년 영조임금이 승정원일기 1년 치를 세초한 것이죠. 그 안에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손을 위해… 세초했다"
기록은 물로 없앴지만 기록을 없앴다는 사실이라도 기록해서 후대에 남겼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래서 인간이 함부로 지워낼 수 없는 두렵고도 두려운 무언가가 아닐까.
자료를 지워서 기억마저도 지워버리고 싶은 그 욕구들은 기록의 형태가 컴퓨터로 옮겨간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지난 2006년에 출간된 소설 < 빛의 제국 > 작가 김영하는 귀환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이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삭제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에 잠기자 하드디스크의 내부에서 물방울들이 보글보글 올라왔다…고작 몇 방울의 물거품이라니" (김영하/빛의 제국 )
공교롭게도 여기에도 물이 등장하는군요.
그리고 지금은 원하기만 한다면 자기장을 이용해서 문서의 흔적을 지울 수 있는 시대.
그러나 우리는 흔적도 없이 봉인됐거나 지워져버린 것으로 알았던 수많은 자료들과 오늘도 대면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우려 지우려 해도 더욱 선명해지는 그 모든 것들.
캐비닛 속에 기록을 남겨두었던 누군가 역시 그 옛날 영조 시절, 왕명을 받들어 승정원일기를 지우면서도…지웠다는 기록만이라도 남겨두고자 했던 그 사관의 심정이었을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