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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유브라질월드컵기 ⑭ 우리 축구는 왜 '멋진 패배'가 없는가

입력 2014-06-2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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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유브라질월드컵기 ⑭ 우리 축구는 왜 '멋진 패배'가 없는가

알제리전이 끝나고 포르투 알레그리 미디어센터에 들어오는 길에 차범근 감독을 만났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드리자 저를 붙잡고 격앙된 목소리로 묻습니다. 차 감독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또 단도직입적으로 뭔가를 물어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오 기자, 뭐가 잘못된 것 같아요."

"네? 축구 전문가께서 저에게 물어보면 어떻합니까."

웃으며 피해가자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밖에서 본 사람이 더 정확할 수 있어요. (패인이) 뭐라고 생각해요."

우물쭈물하며 "너무 안일했던 것 같다. 러시아전과 비슷한 전략 아니었나"라고 말을 흐리자 차 감독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알제리가 벨기에전에서 쓰지 않았던 히든카드를 내놓은 거야. 빠르고 개인 능력이 좋은 자부 등 걔네들, 벨기에전에서 왜 뺐을까 했는데, 우리나라 경기에 딱 냈잖아요. 알제리가 벨기에와 러시아와 견줘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말줄임표에는 차감독의 아쉬움, 안타까움, 후회, 분통함 등 많은 것이 담겨있을 겁니다.

한국 축구의 레전드, 차범근 감독을 뿔나게 한 알제리전. 새벽잠을 설치며 응원전에 나선 우리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든 알제리전. 러시아전에서 예상보다 영리하게 경기했던 우리 축구대표팀이, 러시아보다는 더 쉬운 상대라 내심 생각했던 알제리를 상대로 왜 그토록 쉽게 무너졌을까.

많은 전문가들, 그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팬들이 알제리전의 패인을 분석하느라 다들 바쁜데요, 홍명보 감독이 1년 전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며 말했던 '한국형 축구'가 과연 알제리전에 존재했는지부터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형 축구'라는 말은 '이런 스타일의 축구다'는 식으로 구체성을 띤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간의 경기들을 종합해보면 홍 감독이 말한 '한국형 축구'란 빠르면서 연결이 좋은, 그런 축구가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국형 축구'는 홍명보팀에서 아직 미완성인 것 같습니다. 러시아전을 두고 우리는 스스로는 "성공적인 경기"라고 평가했지만, 그건 한국형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축구에 전술적으로 잘 대응했을 뿐이었죠. 압박에 이은 빠른 역습이 능한 러시아의 공격을 무디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일부러 전열을 내려 공을 돌리면서 지공을 했고 공을 요리조리 돌리다 틈새가 보이면 한 번씩 러시아 문전을 찔러보곤 했습니다. 나름 그 전략은 잘 먹혀들었습니다.

이근호의 행운이 깃든 선취골로 승기를 잡았지만, 결과적으로 1대1 무승부로 끝난, 그야말로 아쉬움이 큰 경기였으니까요.

알제리전은 어땠나요.

알제리전은 분명, 러시아전에서 주도권을 잡고 우리식의 패턴에 상대를 길들이며 기회를 엿봤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막의 여우' 알제리는 초반부터 늑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좌우 측면을 거세게 흔들었고, 그 결과 위기에 위기를 거듭하던 우리나라는 의외의 상황에서 첫 골을 내줬습니다.


[취재수첩] 유브라질월드컵기 ⑭ 우리 축구는 왜 '멋진 패배'가 없는가



알제리가 행운을 기대하며 우리 수비쪽으로 길게 내찬 공을, 홍정호와 김영권의 샌드위치 수비를 뚫고 슬리마니가 골로 연결했습니다.

두 번째 실점은 코너킥 상황에서 수문장 정성룡의 위치 선정이 좋지 않았고, 자부의 세 번째 골은 우리 문전에서 세컨드볼을 따낸 알제리의 집중력이 돋보였습니다. 롱볼을 자주 하되 세컨드볼에 대한 투쟁심으로 상대 문전에서 찬스를 잡는 것, 그런 알제리 공격은 우리가 런던 올림픽 3-4위전에서 일본을 이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알제리전에선 우리가 하고자 했던 축구를 뽐낼 겨를이 없었지요. 세 골을 먼저 잃고 후반전에 들어가자마자 거세게 몰아쳤던 우리나라. 그러나 알제리에 네 번째 골을 내주면서 추격에 대한 의지는 상당 부분 꺾이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9차례 월드컵 도전사에서, 말 그대로 우리 만의 축구인 '한국형 축구'를 해본 게 얼마나 될까요. 세계축구의 변방에 있는 약자가 만에 하나 강자를 상대로 자신의 축구를 했다가는 대패로 이어질 게 자명했으니까요.

대체로 월드컵 무대에서는 '수비 위주의 전술, 그러다 어렵게 한두 번 공을 잡으면 빠르게 역습'의 방식으로 경기를 펼쳐왔던 우리나라입니다.

이젠 한 경기 남았습니다. 벨기에전,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언론이 산술적으로는 아직 살아있는 16강의 가능성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건 정말 실낱같은 희망입니다. 개인적으로 벨기에전에서만큼은 이제 '16강의 멍에'에서 해방돼, 기죽지 말고 그라운드에서 맘껏 '놀아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꼭 이겨야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혀, 우리 축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상대에 대한 대응전술만 고집하다 무너지는 것보다는, 홍명보 감독이 애초 생각했던 것처럼 많이 뛰고, 빨리 나아가고, 골까지 노리는, 그런 축구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상대와 멋있게 붙어볼 수 있는 그런 경기. 그래서 우리의 한계를 발견하고, 우리 스스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경기를 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지더라도 우리 스스로 '멋진 패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JTBC 스포츠문화부 오광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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