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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이브] "명·청나라, 미국처럼 한반도 무장 제한"

입력 2014-03-11 13:12 수정 2014-03-1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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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한명기 교수

◇정관용-오는 19일이면 한미원자력 협정 2년 연장 안이 발효가 됩니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원자력협정 내용을 보면 핵연료 재처리 금지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그 내용이 있고요.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는데 이 같은 강대국의 군사적인 견제 역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역사 라이브 조선의 무장을 막아라, 이런 제목을 붙여봤어요.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한명기-안녕하십니까?

◇정관용-베트남한테는 사실 핵 재처리 아직 요구할 단계가 아니다, 금지까지 요구할 단계가 아니다, 이렇게 봤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좀 기분 안 좋습니다.

◆한명기-그렇습니다.

◇정관용-그쪽은 요구 안 한 거 우리는 요구 당하고 있고 또 미사일 발사 사거리 하나 하려고 해도 우리는 미국 허락 맡아야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한명기-탄도미사일의 경우는 한 300km 정도였다가 겨우 이제 아주 매우 곤란한 협상을 거쳐서 800km 정도로 늘렸는데 주변에 있는 북한은 물론이고 다른 강대국들이 대부분 우주공간까지 쏘아 올릴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봐야 되겠죠.

◇정관용-우리 주변에 중국, 일본, 미국 다 강대국들이라 그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우리만 지금 못하는 거죠. 그런데 과거에도 그랬다고요, 조선 시대에도?

◆한명기-그러니까 강대국들이라는 나라의 속성은 자기들이 일정단계에 올려놓은 범주 안으로 약소국이 들어오는 것 자체를 굉장히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관용-그게 바로 미사일 사거리 제한 이런 것 아닙니까?

◆한명기-네,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의 경우에도 명나라나 청나라의 경우에 자국의 첨단무기라고 할 수 있는 대포라든지 아니면 화약제조의 반드시 필요한 염초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어떤 제조법이나 활용방법을 조선에 알려주는 데 대해서 굉장히 인색했었죠.

◇정관용-그래서 우리는 직접 화약 같은 것을 못 만들었나요?

◆한명기-화약에 대한 사용법이라든가 활용은 공민왕 무렵 한 14세기 정도면 알고 있었는데...,

◇정관용-우리 최무선, 고려 말에 최무선이 활약 발명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한명기-발명했다고 얘기를 하는데 문제는 화약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려면 대충 3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가 염초라고 하는 물질이고요. 그다음에 광물인 유황이 필요하고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목탄 이것이 필요한데 목탄이야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별 문제가 없는데 유황의 경우는 일종의 수입품입니다. 수입품이고 염초라고 하는 게 질산칼륨으로 주로 구성된 물질인데 이게 화약 만드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겁니다마는 이거 제법을 사실은 당시 고려나 조선이 제대로 모르고 있다가 최무선이라고 하는 분이 강남지역에서 온 중국인을 설득을 하고 사실상 매수해서 알아냈던 셈이죠.

◇정관용-염초 제조법을?

◆한명기-네, 그렇습니다. 1377년에 염초 제조법을 알아내서 거기서 개발된 화약을 활용하는 화통도감이라고 하는 기구를 만들었고 거기서 만들어진 무기를 가지고 당시 한반도 해역에서 창궐이라고 있던 왜구를 대단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정관용-그런데 아까 교수님께서 조선 시대에 와서 명나라도, 청나라도 염초 제조법을 조선에 알려주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했잖아요.

◆한명기-그 기술 자체는 물론 최무선을 통해서 알아냈지만 문제는 염초라고 하는 것을 진흙을 통해서 제조를 하는 건데 명에서 갖고 있는 진흙하고 조선 쪽에서 갖고 있는 진흙하고 효율성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달라서 조선 측 입장에서는 이게 공력에 비해서 성과가 미미하니까 결국 자체개발을 시도했지만 이거 자체보다는 명에서 수입한 것이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을 해서 계속 수입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명 입장에서는 이 염초 공급권을 조선을 일종의 길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그런 경우를 보였었습니다.

◇정관용-그러니까 독점수출국이 되는 거네요?

◆한명기-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겠죠.

◇정관용-어떻게 보자면. 그런데 최무선이 발명했을 때는 그만큼 효력이 떨어지는 기술이었다 이 말입니까?

◆한명기-그런데 그걸 처음 알면서 그나마 최무선 단계에서 알게 된 것이고 그다음에 이걸 국산으로 해서 계속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까 많은 문제가 있던 셈이죠.

◇정관용-명, 청은 대신에 원료도 좋고 기술도 더 발전시켰고 우리는 그게 없었다, 그 얘기군요. 철저히 막았군요, 명, 청이. 게다가 어떤 자료를 보니까 명이 와서 도와줬잖아요. 임진왜란 끝난 다음에 여기 남겨둔 무기를 다 가져갔다고요?

◆한명기-잘 아시겠지만 임진왜란 초반에 조선의 경우 일본군의 조총에 굉장히 호되게 당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울까지 순식간에 뺏기고 육군이 일방적으로 수세에 처하다 보니까 조선 지배층이나 지휘관들은 조총 얘기만 들으면 거의 노이로제 수준의 공포심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일종의 반전의 계기로 삼게 된 것이 뭐냐 하면 명군이 1393년 1월에 평양성을 공격하면서 당시 평양성에 있던 일본군들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자신들이 끌고 온 대포를 통해서 무력화시킵니다.

◇정관용-대포로 총을?

◆한명기-당시 명나라는 마카오를 통해서 포르투갈 사람들을 통해서 서양의 블랑기포라고 하는 당시로써는 최신 대포를 끌고 와서 평양성을 대포로 강타해서 조총을 무력화시키거든요. 그런데 그 장면을 목격하니까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조총을 넘어서는 무기는 명나라의 화포뿐이다, 우리가 저걸 배우고 저 기술을 익혀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선조나 지배층이 명 측 지휘관들하고 접촉을 해서 대포의 제조법이나 사용법을 좀 알려달라고 요청을 하는데 실제로 명 정부는 굉장히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왜란이 끝나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명군이 철수하면서 빠뜨리고 갔던 대포들까지 남김없이 찾아서 자신들에게 돌려보내라고 하는 공문을 조선 쪽에 보내올 정도로 철저하게 자국의 대포기술이 조선으로 유출된 것을 막으려고 시도를 합니다.

◇정관용-임진왜란 때 조총. 우리는 만들 줄 몰랐죠?

◆한명기-일단 당하고 나서야 그 위력을 실감을 했죠. 사실은 1990년에 대마도에 사절이 와서 일본에서 한창 사용되고 있던 조총을 선물로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당시 전시상황도 아니었고 조총 자체에 대한 수요가 아무래도 없다 보니까 그것을 활용하거나 하는 데 대단히 무심했고 실제 이제 왜란이 딱 터져서 일본군으로 맞붙어서 그 효력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보다 보니까 조총에 대한 열망이 왜란 중에 상당히 커지게 됩니다.

◇정관용-그다음에는 자체 개발을 해서 생산을 할 수 있게 됐습니까?

◆한명기-네, 일본군 가운데 조선에 항복한 사람들을 보통 항왜라고 하는데 항왜들 중에 조총을 제조하거나 다루는 기술을 가진 자들이 있어서 그런 일본군 투항자들을 활용해서 제조를 했고 조선인 중에도 일본에 끌려갔던 이른바 피로인들 중에 조총 제조와 관련된 일과 관련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나중에 모아서 조총 제도에 나서게 되죠.

◇정관용-그러면 조총으로는 조선 시대도 뭔가 무장을 했어요, 임진왜란 끝난 후에. 그러나 명나라에 화포 그건 계속 못 만들었습니까?

◆한명기-그건 화포 기술도 조선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명 수준 정도의 단계까지는 금방 못 갔죠. 명나라가 어느 정도로 집요했냐 하면 당시 임진왜란 당시 병사들이 화살을 쏠 때 화살 끝에 독을 바르면 이게 설사 심장이나 이런 급소에 맞지 않더라도 독이 퍼져서 상대방을 살상하기가 상당히 용이한데 당시는 독의 제조법을 몰랐거든요. 그래서 명군 지휘부에 화살에 바르는 독 제조법을 알려달라 누차 간청을 했지만 명군 지휘부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정관용-그래서 그나마 우리 조총 실력은 뛰어나게 발전시켜서 청나라 때는 우리가 좀 파병도 하고 그랬다면서요?

◆한명기-왜란 당시 조총에 당한 건 사실이지만 역시 한국 사람들도 외래문물이 들어왔을 때 그것을 익숙하게 수용하는 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부류거든요. 그래서 이 왜란을 겪고 나서 직후가 되면 조선도 급속하게 보병들의 편제가 조총병 중심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과거에다가 조총 사격하는 사격술을 시험하는 과목도 넣고 또 선조나 광해군 같은 인물은 만주 쪽에서 여진족의 위협이 커지니까 그들의 기마대를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총을 비롯한 화기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상당히 열심히 양성을 하죠. 그래서 1619년에 명나라가 만주를 공격할 때 조선도 원병을 보내라고 했는데 그 당시 조선이 파견했던 병력 가운데 수천 명이 조총수였고 또 말씀하신 것처럼 효종 연간에 러시아가 헤이룽 강 쪽으로 접근을 해 오니까 당시 청나라가 나선정벌이라 해서 조선에서 조총수를 빌려서 러시아군에게 맞서는 작전을 펴는데 1658년에 벌어진 나선정벌에 조선군 조총수 수백 명이 참전해서 상당히 큰 전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정관용-그 조총의 조 자가 새 조 자죠?

◆한명기-네, 그렇습니다.

◇정관용-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는.

◆한명기-원래 조총이란 말은 중국에서는 날아가는 새를 맞춰서 떨어뜨린다. 그래서 조총이란 설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개머리판 앞에 삐죽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마치 황새의 긴 부리같다. 그래서 조총이라 하기도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조총이라는 용어 대신에 재질에 주목을 해서 쇠로 만든 화포다. 그래서 철포라고 하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관용-그나저나 일본은 그럼 조총 기술, 철포기술을 어디서 어떻게 입수를 했습니까?

◆한명기-보통 통설로 알려진 건 포르투갈하고 스페인 사람들이 15세기 후반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이쪽으로 몰려오던 대항해시대 때 바스코 다 가마라는 인물이 1498년에 인도까지 항로를 개척해서 처음 옵니다. 그러고 나서 그게 1년에 연쇄적인 여파를 미쳐서 1543년이 되면 동남아에서 마카오를 향해 가던 왜구 선박 한 척이 풍랑을 만나서 일본 규슈 남쪽에 종자도라고 하는 섬에 표류하는 사건이 벌어지죠. 종자도는 씨앗섬이라는 뜻인데 일본 말로는 다네가시마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상인 한 사람이 자신이 갖고 있던 조총을 당시 다네가시마의 영주에게 자기를 잘 봐달라는 의미에서 선물로 주죠. 이게 일본의 조총이 전해진 출발점인데 당시 일본은 마침 전국시대라고 해서 온 나라가 온통 전쟁 통에 빠져 있던 싸우던 나라니까.

◇정관용-다 분열돼서.

◆한명기-신무기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많았던 때죠. 그래서 조총이 순식간에 다네가시마에서 내륙으로 퍼져가고 한 1544년경이 되면 오사카 근처의 사카이라는 데서는 대량생산 체제까지 갖춰집니다.

◇정관용-총 한 자루 얻어서 그게 가능합니까?

◆한명기-그렇습니다. 모방시제품이 나온 게 6개월 뒤라는 얘기도 있고요.

◇정관용-분해해서 똑같이 만들어보고?

◆한명기-그러니까 워낙 수요가 많다 보니까 수요는 아무래도 공급을 낳게 되고 돈이 되니까 조총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게 되면서 일본의 군사력도 그와 함께 굉장히 강해지는 거죠.

◇정관용-조총으로 무장한 그쪽이 그러면 전국시대를 통일했나요?

◆한명기-아무래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죠. 당시 일본의 지방의 다이묘들 중에서 유독 조총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잘 아시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인데 이 인물이 조총수를 편제해서 1575년에 전국시대 최강의 기마군단이 있었습니다. 그 군단을 이끌던 자가 다케다 가츠요리라는 자인데 이 자는 기본적으로 기마대를 이끌고 오다군이랑 싸웠죠. 그래서 오다가 거느린 조 총대가 다케다가 거느린 기마대를 나가시노라고 하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야말로 박살을 냅니다. 그래서 일본말로 조총은 철포라고 불렀고 그걸 이제 일본식으로 읽으면 데뽀가 되는데 조총이 없다는 말이 사실 무철포, 무데뽀가 되는 거죠.

◇정관용-무데뽀?

◆한명기-그래서 조총을 가진 데뽀군단하고 조총이 없는 겁없는 무데뽀 군단이 싸워서 무데뽀가 박살 나면서 데뽀가 일본 보병에 주력 무기로 등장하게 되고 이 데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나 그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전국을 통일하는데 사실상 한 발짝 다가간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정관용-그리고 조선을 치고? 그렇게 되는 거였죠. 무데뽀란 말도 거기서 나온 거군요.

◆한명기-사실상 일본 말이라고 봐야 되겠죠.

◇정관용-그래요. 아무튼 자기들은 어디든 외래에서 들여온 무기를 가지고 빨리빨리 무장을 발전시키고 그러면 통일하고 침공하고 우리는 그냥 당하고.

◆한명기-그런 패턴이 많이 반복이 됐었죠.

◇정관용-뭔가 무기를 개발하려 하면 전혀 안 알려주고 오히려 있는 무기도 도로 가져가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뭘 배워야 할까요?

◆한명기-아주 재미있는 내용은 왜 아까 조총이 전해진 데가 다네가시아마라고 하는 쿠슈남쪽의 섬이라고 했는데 사실 포르투갈 상인의 입장에서는 우연히 일본에 전해준 조총이 결국 조선을 침공해서 조선 민족을 학살하는 무기가 될 거라고는 아마 꿈에도 생각을 못 했겠죠. 그러니까 사실은 다네가시마는 어떤 면에서 놓고 보면 임진왜란으로 가는 출발점이 된 문제적 장소인데 아주 우리가 한번 심각하게 고려해 볼 얘기는 뭐냐 하면 재작년 201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우리가 아리랑 3호라고 해서 인공위성을 우주공간에 쏘아 올렸는데 그 아리랑 3호의 해상도라든지 카메라 능력은 상당히 뛰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성을 공간에 쏘아 올릴 로켓 능력이 없어서 그걸 미츠비시중공업에서 만든 H2A로켓이라고 하는 일제 로켓에 실어서 쏘아 올렸습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그 로켓을 발사한 기지가 지금 다네가시마에 있다는 거죠.

◇정관용-그래요?

◆한명기-그러니까 420년 전에 임진왜란이 다네가시마에서 전해진 조총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면 여전히 우리는 아직도 국가 생존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한 로켓이나 미사일 기술을 제대로 갖지 못해서 일제 로켓에 그걸 실어서 우주공간에 위성을 띄운다, 이건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될 그런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일본이 혹시 조총이 거기로 들어왔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다네가시마현에다가 우주센터 지은 건 아니겠죠?

◆한명기-그건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지만 다네가시마에 가보면 조총 시발지라고 해서 기념석이 세워져 있는 것은 볼 수 있습니다.

◇정관용-그래요. 자주 국방 요원합니다. 강대국들하고 바로 맞경쟁할 수 없고 자주국방도 노력해야 하지만 국제평화를 위한, 동북아 평화를 위한 그런 대화 노력도 우리가 주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한명기-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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