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아티클 바로가기 프로그램 목록 바로가기

[역사라이브] "서울, 이승만 호 따서 '우남시' 될 뻔"

입력 2014-02-27 13:10 수정 2014-02-28 17:50
크게 작게 프린트 메일
URL 줄이기 페이스북 X

■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전우용 교수

◇정관용-오늘 역사 라이브 그동안 서울시장들 한번 되돌아볼까요.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전우용 교수 어서 오십시오.


◆전우용-안녕하세요.

◇정관용-서울시장 얘기하기 전에 조선 시대부터 정리해 봅시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라고 불렀고 한성부 판윤이죠? 그런데 영의정보다 한성부 판윤 되기가 더 어렵다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전우용-그런 말이 있었다는데 조선왕조 500여 년간 한성판 윤을 지낸 분들이 1,450여 명.

◇정관용-1,450명? 500년 동안에?

◆전우용-평균 재임 기간 5개월. 그 정도였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자리라고 보기는 좀 어려웠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관용-그런데 그런 말은 왜 나왔던 거예요?

◆전우용-일단 왕경, 그러니까 근기. 왕경을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편부당. 또 재판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불편부당하고 청렴해야 하고. 이런 조건들은 좀 있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자리라는 건 근거가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관용-그런데 왜 이렇게 단명입니까?

◇전우용-그렇게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어요. 일시로 머물러 가는 자리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정관용-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 시대의 명사들도 그러면 한성판윤 거친 사람이 많겠네요.

◇전우용-많죠. 1500명 정도니까 황희 정승이라든가 권율 장군 가까운 시대로는 박영효, 민영환, 지석영, 이런 분들 다 한성판윤 거쳤죠.

◆정관용-그러면 지금 서울시장과 조선 시대 한성부 판윤. 역할과 기능이 어떻게 차이가 있었습니까?

◇전우용-그러니까 전제왕조 시대에 왕경을 관리하는 사람하고 민주주의 시대, 특히 지방자치 시대에 대도시를 관리하는 사람하고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울 거고요. 한성부가 일반적인 지방행정 업무들을 담당하면서도 독특한 것이 재판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있었고요.

◆정관용-재판 기능을요?

◇전우용-삼법사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형조, 사헌부, 한성부 이 세 기관이 재판기능을 나눠가졌어요. 그게 하나 있었고.

◆정관용-그때는 사법부가 따로 분리가 안 되어 있었죠? 행정이 곧 그냥 재판까지 했죠.

◇전우용-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깨끗하게 치러야 되니까 요즘하고 달라서 굉장히 사건사고가 요즘과 다른 형태의 사건사고가 많이 났거든요. 아침에 일어나면 거리에 시체가 이제 있다든지 지난번에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겨울철에 동사자가 있다든지 이런 시체 치우는 것 또 도로 청소, 하다못해 산에 송충이가 많으면 송충이 방제 이런 것들을 서울시민들한테 이를 분담시켰어요. 방역이라고 하는데 그 방역 부과, 호적 조사 이런 것들이 한성판윤, 한성부의 일이었죠.

◆정관용-그러니까 사법권을 갖고 있다는 면에서는 굉장히 힘이 센 자리지만 또 요즘 서울시장 같은 그런 도시 관리 이런 건 전혀 없는.

◇전우용-없고 예산도 독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정관용-직급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전우용-판자니까 판자는 다 판서급, 장관급인 거죠.

◆정관용-그건 지금이랑 같네요.

◇전우용-같죠.

◆정관용-지금도 서울시장은 그러니까.

◇전우용-국무회의에 참석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정관용-일제강점기 때는 어땠죠?

◇전우용-일제강점기 들어서 서울이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리니까 경기도 하부로 편입이 됩니다. 그러니까 경기도 장관의 지휘를 받는 하급 부윤이 된 것이고요. 그리고 직급이나 도시의 위계는 개성부, 수원부, 강화부 하듯이 지방 도시들하고 똑같이 되어버렸던 거죠. 다만 조선총독부가 있고 조선시대 중추시설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중시되기는 했지만 수도로서의 공식적 지위는 잃어버렸고요. 수도는 도쿄가 되어 버린 그런 상태였던 겁니다.

◆정관용-경성부의 책임자는 뭐라고 불렀었죠?

◇전우용-부윤이요.

◆정관용-부윤. 경성부윤은 조선인을 임명했습니까?

◇전우용-아닙니다. 전부 일본인이었습니다.

◆정관용-바로 서울시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서울특별시가 되고 서울특별시장이 된 그 과정을 좀 정리해 주시면요?

◇전우용-해방된 다음에도 지명을 그대로 썼어요. 경성부라고.

◆정관용-경성부라고 썼어요?

◇전우용-그래서 일본인이 물러갔기 때문에 한국인, 한국인을 새 부윤으로 임명을 해야 되는데 임명 주체는 다소 불분명한데 그냥 미 군정이 그냥 임명을 했던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에 경기도협의회 의원을 했고 그런 경력은 있지만 대신에 경성부립 도서관을 지어서 기부할 만큼 사회사업가로 명성이 높았던 이범승이라는 분이 경성부윤 자리를 승계했던 거죠.

◆정관용-해방 후 첫 한국인 경선부윤이죠. 이범승.

◇전우용-그냥 경성부의 유일한 경성부윤이었던 거죠. 이분이 46년 5월까지 그러니까 9개월 정도 부윤 역할을 맡았고요, 부윤 직함을 썼던 거고요.

◆정관용-이분은 사회사업가인데 관직에 있던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전우용-경성부협의회 의원이라고 해서 경성부 내에서 경기도 협의회 의원이였고요. 서울시에서는 인망이 있었던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해방 되고 나서 미군정이 들어와서 행정을 담당을 했기 때문에 한국인 부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다가 46년 5월에 현재 공식적으로는 46년 8월에 임명이 되는데 46년 5월에 경선부윤으로 제2대 부윤으로 부임했던 분이 김형민이라는 분이었어요.

◆정관용-김형민.

◇전우용-이분 회고에 따르면 이분은 미시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개성 송도보고에서 영어교사로 있었는데 미국하고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니까 미국 유학생들이 위험분자로 낙인이 찍힌 거죠. 그래서 학교에서 해직되고 경찰에 잡혀서 고생도 하고 그리고는 고향에 내려가서 낙향해서 숨어 지내다시피 하다가 세상이 바뀐 거죠. 자기가 미시건 대학을 나왔고 미국인들이 왔으니까 할 일이 있겠다 싶어서 석유장사를 시작했대요.

◆정관용-석유?

◇전우용-석유장사를 시작을 했는데 석유는 당시 미 군정한테 배급받아야 했으니까. 나는 건 아니니까 말이죠. 일본과의 교역도 끊겼고 석유 배급받으러 경성부에 왔다가 우연히 대학 동창을 만난 거예요. 미국인 장교였죠. 회고에 따르면 뭐하냐, 석유 장사한다고 했더니 그런 거 하고 있느냐. 시장을 네가 맡아보지 않겠느냐 그래서 고민 끝에 몇 번 고사했다, 아니다 이런 설이 있는데 수락을 했다는 겁니다.

◆정관용-영어교사였다가 일약 서울시장으로.

◇전우용-당시 나이가 39세. 그 당시로 보면 젊은 편이나 나이 든 편은 아니지만, 서울시장 하기는 경력이 좀 부족하다, 이렇게 느낄 만도 했던 건데 미국 사람들하고 친하니까 가능했던 거겠죠.

◆정관용-그때까지 경선부윤이었어요?

◇전우용-경성부윤이죠. 2대 경성부윤으로 들어왔는데 이분 말씀은 일본이 물러간 지 벌써 1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도 일본이 만들어놓은 경성부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수치스럽다. 그러니까 빨리 이름을 바꾸어야 되겠다. 해서 이분이 했던 일들이 서울에 도시 이름을 바꾸고 길 이름을 바꾸고 동네 이름을 바꾸고 하는 일들을 그러니까 다른 행정 일들은 미군 장교들이 돈 들어가는 건 하니까 돈 안 들어가는 것들을.

◆정관용-그래도 좋은 일을 했네요.

◇전우용-그렇죠. 그래서 고민을 했대요. 과거에는 한성부였고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였는데 한성부 그러면 조선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 같고 경성부 그대로 쓰면 일제강점기 같고 새 이름을 찾기가 마땅치 않았다라는 거죠. 이 분 회고는 그 무렵에 이승만 대통령 그 당시에는 대통령이 아니었는데 이승만 추종자들이 우남시로 하자.

◆정관용-우남시로 하자는 안이 있었어요?

◇전우용-우남시로 하자라는 압력을 많이 받았지만 자기가 단호하게 서울이라고 하는 순한글로 지어졌다, 이유는 사실 나중에 문제가 됩니다. 문제가 되는데 그 당시에는 아주 드문 결정이었죠, 미군에 익숙하고 또 이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기 때문에 굳이 한자 이름을 다시 만들기보다는 그냥 서울로 하자는 고집을 부려서 서울로 만들었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정관용-그러면 서울이라는 말은 미군한테도 익숙했다, 조금 아까. 국제적으로 통용됐다, 언제부터 어떻게 통용된 겁니까?

◇전우용-본래 우리가 서울 그러지만 이건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예요.

◆정관용-우리말로?

◇전우용-미국의 수도는 워싱턴, 영국의 서울은 런던 하듯이 우리가 서울을 부를 때 조선 시대는 그랬어요. 보통명사로서 수도를 뜻하는 서울이 있고요. 그다음에 한산 이남 한수 이북의 땅을 지칭하는 것으로 지명으로서 한양이 있어요. 그다음에 행정구역 명칭으로 한성부였죠. 그러니까 서울, 한성, 한양 여기에다가 또 서울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로 경주, 경도, 수선 이런 여러 용어들을 섞어 썼거든요.

◆정관용-복잡하네요.

◇전우용-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보통명사로 서울을 많이 썼던 것 같고요. 이게 18세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프랑스 선교사들 통해서 유럽 세계에 서울이라고 하는 이름을 알렸던 것이고요. 그래서 개항 이후에 서양인들과 통상조약을 맺은 다음에 서양인들도 일률적으로 서울이라고 표기를 했습니다. 독립신문도 영문판에는 서울로 표기했고요.

◆정관용-그러니까 이 한성부가 우리의 서울이에요. 이렇게 설명을 했겠군요.

◇전우용-그렇죠.

◆정관용-그걸 외국인들이 듣고 여기 서울인가 보다, 이렇게 된 거군요.

◇전우용-그런 셈이죠. 그렇게 해서 일제 감정기를 영어로 표기할 때는 서울로 표기를 해 왔기 때문에 미 군정도 서울이라고 썼고 그런 표현이 혼선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겠다, 이렇게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정관용-참 특이하네요. 한성부라고 쓰기가, 영어로 쓰기가 어려웠나 봐요, 제고 볼 때는.

◇전우용-그것도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렸듯이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강했던 거죠. 나중에 그런 얘기가 또 나옵니다.

◆정관용-또 언제 나옵니까?

◇전우용-56년도. 이따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 56년에는 아예 공식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전용론자였어요. 굉장히 유명한 한글전용론자였는데 본인의 평소 지론과는 아주 상반되는 그런 지시를 국무회의에서 해요.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가 한자 표기가 안 된다. 우리나라의 한자표기 안 되는 도시가 하나도 없는데 유독 서울만 안 된다. 그런데 서울 이름을 바꾸는 걸 고려를 해 봐라. 의도를 담은 지시였던 것 같아요.

◆정관용-자기 호를 쓰고 싶어서 우남시로.

◇전우용-여론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화도 없고 했으니까 여론조사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각 지방 군수들 통해서 여론조사를 했더니 압도적 다수로 올라온 안이 우남시였어요.

◆정관용-조작됐네요.

◇전우용-조작이라기보다 뜻을 알고서. 윗분의 뜻을 알고 그렇게 만든 여론조사였겠죠.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윗분의 마음이 그렇구나.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충성이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정관용-하긴 56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 국부라고까지 칭하는, 국민적 추앙 분위기도 있었으니까.

◇전우용-엄청나죠. 그 당시 세계 최대의 동상도 만들어 올렸잖아요, 25m짜리. 그런 분위기에서 나와서 국무회의에서 그러면 우남시로 하는 안을 결의할까요라고 했더니 조금 민망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 국민의 뜻이 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우남시가 될 테지만 지금 당장 바꾸는 건 내가 조금 민망하다. 당분간은 한도로 하자. 이렇게 지시를 했다고 해요. 그게 한도로 바꾸는데 수도이름 바꾸는 게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도로 표지판 다 바꿔야 되잖아요, 우편체계도. 그러니까 흐지부지 뭉개고 있다가 4.19가 났던 거죠.

◆정관용-그러면 56년부터 60년까지 4년 동안 그냥 줄줄줄 시간 끈 거군요.

◇전우용-그렇죠.

◆정관용-잘못하면 서울이라는 이름이 없어질 뻔도 했네요.

◇전우용-아마 4.19가 났으면 다시 또 환원되지 않았을까.

◆정관용-물론 그렇습니다마는 그런데 처음 서울시라고 했습니까, 서울특별시라고 했습니까?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전우용-그렇게 김형민 씨가 건의를 하고 미 군정도 흡족하게 받아들였던 거겠죠. 그래서 46년 8월 1일자로 서울시 헌장이 나오고 8월 29일인가 서울특별자유시라고 선포가 돼요.

◆정관용-서울특별자유시?

◇전우용-그러니까 스페셜 프리덤 시티로 명명을 해요, 공식적으로.

◆정관용-특별 붙은 건 이해가 되는지 자유는 왜 붙었을까요?

◇전우용-행정에 있어서 자유를 누린다 하는 것이고요. 특별이라는 하는 것은 다른 도시보다 우월한 지위를 준다, 이 두 가지를 같이 썼던 것이죠. 그래서 공식명칭은 서울특별자유시였어요. 46년 8월부터. 그랬다가 정부수립 이후에 그런 반론이... 그 무렵에는 언어 가지고 참 많이들 싸웠어요. 제헌헌법 만들 때부터 국민으로 해야 되느냐, 인민으로 해야 되느냐.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말을 우리가 꼭 써야 되느냐. 이런 분위기였는데 서울특별자유시 그러니까 그때는 자유가, 자유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다라고 하던 때인데 그러면 서울만 자유시고 부산은 자유가 없는 도시란 말이냐. 이런 오해를 줄 수 있다, 이런 판단을 사람들이 했던 거죠. 그래서 자유를 빼버리고 서울특별시로 정한 것이 49년 8월입니다.

◆정관용-49년. 그러니까 정확하게 서울특별자유시장은 초대 46년 9월경에 김형민 초대시장. 그렇게 봐도 되겠네요? 거기서 자유 자가 빠진 것은 49년이 돼서, 정부 수립 이후다. 오늘 일단 서울특별시가 만들어진 과정까지 듣겠습니다. 다음 주에 나오셔서 서울특별시장들이 그 이후에 각자의 개성에 따라서 서울시를 어떻게 바꿔냈는지 좋았던 일도 있고 나빴던 일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 얘기는 다음에 이어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관련기사

[역사라이브] 전우용 "일본, 중세적 배외주의 회귀" [역사라이브] 소치 올림픽으로 본 100년 전 '근대체육 ' [역사라이브] 한명기 "광해군, 정통성 콤플렉스로 몰락" [역사라이브] "일본, 18세기 초 조선에 산업 스파이 보내" [역사라이브] "일제시대, 모던걸 연애상대는 유부남 학생"
광고

JTBC 핫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