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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규칙의 연속' 중국 당대회 역사…권력승계도 '예측 불가'

입력 2017-10-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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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역대 전국대표대회(당대회)는 불규칙과 파란의 연속이었다. 5년마다 당대회를 개최하는 것도 40년전에야 정착했고 권력투쟁 속에 예상을 벗어나는 후계 승계로 점철됐다.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열리는 당 대회는 중앙위원회와 중앙기율검사위의 업무보고를 청취, 심사하고 당의 중대문제를 논의 결정하는 한편 당장(黨章·당헌) 개정과 차기 중앙위원회 및 중앙기율검사위원회 구성의 역할이 맡겨져 있다.

1차 당대회 당시 53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은 오는 18일 개막되는 19차 당대회까지 9천만명에 이르는 초대형 정당으로 발전한 상태다.

중국 공산당의 창건이 이뤄진 1차 당대회는 1921년 7월 23일 상하이(上海)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열렸다. 전국 53명의 당원을 대표해 창사(長沙) 소조의 마오쩌둥(毛澤東) 등 13명의 대표가 출석해 천두슈(陳獨秀)를 중앙국 서기로 선출했다.

1차 당대회부터 1928년 6차 당대회까지 초기에는 그 개회일정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7년 사이 6차례의 당대회가 열렸지만 다시 6차 당대회부터 1945년 7차 당대회 개최까지 17년이 걸렸다.

그 사이 시안(西安)사변, 항일전쟁 2차 국공합작 등 중대사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6차 당대회는 국민당 정부의 단속 등을 피해 당시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됐다. 유일하게 해외에서 열린 당대회다.

오히려 1935년 '준이(遵義) 회의'라 불리는 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군 지휘권을 확보하고 이후 41년간 중국 공산당의 최고지도자 자리를 확보하게 됐다.

1945년 7차 당대회에서는 마오쩌둥 사상이 처음으로 당장에 삽입됐다. 류사오치(劉少奇)는 7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및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돼 마오쩌둥에 이은 2인자가 됐다.

7차 당대회에서 차후 당대회를 3년마다 열기로 결정했으나 이때부터 1956년 8차 당대회까지는 또다시 11년의 간격이 생겼다. 이 기간 당원 1천만명이 넘는 대규모 정당으로 커졌지만 국공내전, 전후 복구, 한국전쟁 참전, 당내 정치투쟁 등으로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8차 당대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이어 8기 1중전회에서 중앙서기처 총서기로 피선됐다.

그 다음 9차 당대회도 13년후인 1969년에야 열렸다. 이 기간에는 1958∼1960년 극좌노선인 대약진운동으로 3천만명이 아사하는 대기근 사태가 벌어졌고 1966년부터는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앞서 1962년초 '7천인 대회'라고 불린 확대중앙공작회의는 마오쩌둥이 자아비판을 통해 대약진운동의 오류를 인정한 대회로 의미를 갖는다.

9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장은 당대회의 5년 개최를 명시화하는 한편 린뱌오(林彪)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됐다. 하지만 1971년 비행기로 탈출하던 린뱌오가 몽골에서 추락사하자 이 일의 충격으로 마오쩌둥은 10차 당대회를 1973년에 앞당겨 개최하고 38세의 왕훙원(王洪文)을 새로운 후계자로 내세웠다.

마오쩌둥이 1976년 사망한 직후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왕훙원 등 사인방이 몰락하면서 11차 당대회도 예정보다 1년 앞당겨진 1977년에 열렸다.

4인방 제거의 주역 화궈펑(華國鋒)이 11차 당대회에서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에 선출되면서 화궈펑 시대를 열었으나 1978년말 11기 3중전회에서 실용주의를 내세운 덩샤오핑(鄧小平)에 정권이 넘어갔다.

11차 당대회부터 지금까지 당대회는 5년마다 한차례 열리는 것으로 고정됐고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회수도 1992년 14차 당대회부터는 7차례로 확정됐다. 권력승계는 여전히 예측 불가능했다.

1982년 12차 당대회 개막사에서 덩샤오핑은 처음으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을 천명하고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실시했다.

그러면서 당 최고지도자가 두차례 임기 동안 총 10년 집권하는 모델을 확립했다. 하지만 실행 과정에서 권력 승계문제는 순조롭지 않았다.

학생시위에 적극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야오방(胡耀邦)이 총서기에서 해임된데 이어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후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자오쯔양(趙紫陽)이 돌연 실각하고 장쩌민(江澤民)이 총서기로 전면에 등장했다.

이후 1992년 14차 당대회와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는 덩샤오핑의 설계대로 각각 장쩌민과 후진타오(胡錦濤) 를 총서기로 한 지도부가 수립했다.

현 총서기 시진핑(習近平) 주석 역시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취임해 이번 19차 당대회에서 재임하게 되지만 그가 관례를 깨고 앞으로 3기 연임에 도전할지, 차기 후계자를 세울지도 불투명한 상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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