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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희망퇴직의 그늘, 저성과자가 버티는 이유

입력 2015-12-2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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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희망퇴직의 그늘, 저성과자가 버티는 이유


여기 단단한 사람이 있다.

작은 키에 짧은 목, 흡사 갓 입대한 것 같은 네모난 각진 머리. 그다지 융통성이 있을 것 같은 외모는 아니다.

28년을 한 회사를 터전 삼아 일했지만, 올해 초 희망퇴직 대상자로 선정됐다. 본인이 희망하지 않았는데, 대상자가 됐다는 용어의 어폐는 차치하자.

그는 버텼다. 아니, 버틸 수밖에 없었다.

거부했더니 회사는 그에게서 출입카드를 빼앗고 다른 건물에서 진행되는 업무향상 프로그램에 집어넣었다.

'편의점 창업'과 '중소기업 취직', '행복한 부부관계', '자기소개서 잘 쓰기' 등의 교육을 받았다. 교육 틈틈이 배려랍시고 '기체조'와 '이제는 나도 SNS 전문가', '사진교실 수업'도 진행됐다.

아, 업무 관련 교육도 있었다. '해양플랜트 한 달 만에 마스터'라는 교육이었는데, 5일 교육하곤 80점 이하 과락으로 시험을 봤단다. 참, 현장실습도 있었다. 그는 일반 회사의 경리부에 해당하는 비용 관리부서에서 근무했는데, 플랜트 생산 현장에 가서 하루 동안 철제 구조물의 생산 과정을 견학했다. 그 뒤로 한 달간 방치됐고, 과제물로 '근골격계 질환 유해위험작업 개선안'을 제출했다. 어떻게 하면 뼈와 근육에 무리가 가지 않게 무거운 구조물들을 옮길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였다.

회사에선 "업무와 무관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해 평가가 어렵다"며 인사고과에서 최하등급인 D등급을 줬다. 업무와 무관한 일을 맡긴 건 회사였다.

수당과 상여금이 큰 중공업 회사 노동자 입장에선, 가뜩이나 현업 배제로 수당이 다 깎인 마당에 D등급을 받게 되면 상여금은 5%로 깎인다.

그는 회사 입장에선 그야말로 '저성과자'였다. 말로만 듣던 28년 차 만년 과장이 바로 그다.

동기는 물론, 후배들이 차장을 달고 부장을 달 때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만 버티라"는 한마디를 들었을 때 그 역시 흔들렸다. 그래도, 회사에서 바친 28년을 결코 쉽게 정리할 수는 없었다.

미안했지만, 기자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버티시는 건가요?"

"내 자식놈이 곧 있으면 대학을 갑니다. 졸업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해요. 아들한테도 얘기했습니다. 재수고 군대고 나발이고 일단 아버지 상황이 이러하니 무조건 4년 안에 졸업부터 해야 한다고.."

그에게 자존심은 사치였나 보다. 아들이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는데, 이 짓을 앞으로 최소 5년은 더하겠다는 얘기였다.
"장학금 받고 다닐 수 있는 학교를 가라", "대학 안 보내면 그만이다" 등 가정의 형편은 따지지 말자.
버텨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로서는 버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50대 중반을 살며 만년 과장으로 낙인 찍히면서도 "대기업 관리부서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는 모난 돌 정 맞는다고 시키는 일이 고달파도 군말 없이 해왔을 것이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도 눈앞의 상사가 던진 보고서 뭉치가 흩날리는 걸 쳐다만 봤을 게다. 돌덩어리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인 거다. 반대로 말하면, 나가라고 해서 배신감과 자존심을 운운하며 홀연히 떠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누가 이 남자를 풍파를 견디겠다며 땅속 깊이 자신을 파묻게 만들었을까? 가장이라는 책임감 외 달리 떠올릴 수 없는 현실은 잔인하다.

모든 사람이 회사가 기대하는 수준의 성과를 낼 수는 없다. 누군가가 빛이 나려면, 누군가는 시궁창에서 굴러야 한다. 시궁창에서 빛이 나길 기대할 것도 없다. 누군가가 나 대신 그 일을 했을 뿐이라 생각해줄 수도 있다.

성과가 나쁜 사람을 보다 쉽게 내보내기 위한 '일반 해고지침'이 추진 중이다. 전 세계와 무한 경쟁해야 하는 기업이, 한없이 자비로울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성과 측정법은 세상에 없는데, 이 애매한 잣대가 누군가를 밑바닥으로 벼랑으로 내몰 수도 있다는 현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정원석 경제산업부 기자 jung.wonseok@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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