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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이지 않는 '노동자 비극'…숨진 경비원 기록으로 본 실태

입력 2020-05-28 12:02 수정 2020-05-2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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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저희 JTBC는 현대중공업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 김성인 씨 사안을 집중 보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서 아파트 입주민에게 폭행당했다고 호소하며 목숨을 끊은 노동자, 고 최희석 씨도 있었죠. 갑질을 당했거나 산재를 당했거나. 먹고 살기 위해서 뛰어든 일터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이 일상이 돼 가고 있습니다. JTBC는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온전히 보호받는 그 날까지 추적하고 집중 보도하겠습니다. 저희는 고 최씨가 작성한 지난 1년 다섯 달 동안의 업무 일지 전체를 입수했습니다. 이 내용을 중심으로 지난 1년여 시간과 경비노동자의 현 실태를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박준우 기자입니다.

[기자]

"아파트에서는 경비 업무보다 재활용 분리수거, 폐기물 처리, 택배 관리, 주차 관리…같은 게 기본적인 일이에요."
- '임계장 이야기' 59쪽

경비노동자의 일상이 담긴 '임계장 이야기'의 한 구절입니다.

주차장 담배꽁초 청소
분리수거장 쓸기 대청소
음식 폐기물통 갈기
개똥 치우기

입주민의 폭행으로 목숨을 끊은 경비원 최희석 씨의 일상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비일지를 빼곡히 채운 업무들.

[아파트 상가 관계자 : 담배꽁초도 다 쓸고 저희도 여기 맨날 쓰는데도 여기 주변도 다 쓸어주는 거예요. 저기 하천변까지.]

2020년 3월 4일 수요일
[가로등]
· 점등시간 : 18시 28분
· 소등시간 : 06시 49분

2020년 4월 27일 월요일
· 20시부터 1시까지 분리수거 뒤처리

24시간 내내 근무를 해야 하는 최씨에게 주어진 휴게시간은 총 10시간.

식사 시간과 잠자는 시간까지 포함해서입니다.

그마저도 최씨가 가로등을 확인하거나 작업한 시각과 겹칩니다.

[고 최희석 경비원 친형 : 너무 좁고 열악해도 그냥 견딜 수 있다고, 그거 못 견디면 어떻게 일하겠냐고 해가면서 나하고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휴게시간이라고 경비실 블라인드 내리지 말라고. 인사도 건성건성하지 말고 우렁찬 목소리로 씩씩하게!"
- '임계장 이야기' 99쪽

[최강연/공인노무사 : 경비 노동자분들은 경비 업무만 하셔야 되는 거예요. 특정된 업무에 대해 변경이 있을 때는 개별적인 노동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최씨가 일한 아파트의 관리사무소 측은 "경비원이 경비만 하게 하려면 현실적으로 경비원 수를 줄일 수밖에 없다"며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슈퍼맨이 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수십가지 비정형적 업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주어졌다."
- '임계장 이야기' 64쪽

■ 경비원 취업규칙 곳곳에 독소조항…노동권은 '실종'

[앵커]

저희는 고 최희석 씨가 일하던 아파트의 취업 규칙도 입수했습니다. 갑질에 취약한 독소조항들이 곳곳에 담겨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아파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예원 기자입니다.

[기자]

경비노동자 최희석 씨는 철저한 을이었습니다.

해고의 가능성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요청하거나 3번 이상 경고하면 해고될 수 있었습니다.

최씨가 작성한 경비일지 지시사항에 가장 많이 써 있는 말.

주민께 친절히 봉사, 인사 철저입니다.

취업규칙은 이런 지시사항을 위반할 경우 '해고 사유'로 규정했습니다.

[아파트 입주민 : 경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럴 때마다 경비를 갈면 근무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최강연/노무사 : 취업규칙을 심사할 때 한 번씩 걸러져야 하는 부분들이거든요. 고용노동부가 그런 부분을 세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헌법이 보장한 집회와 시위의 자유.

불가능했습니다.

관리사무소 승낙이 필요하고, 집단행동 역시 원천적으로 차단됐습니다.

[동료 경비원 : 무슨 얘기를 합니까 경비가. 저희는 아예 모르는 게 제일 편한 방법이에요. 경비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노동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조항은 없었습니다.

직무를 변경하거나 정원을 조정할 때 경비원들의 동의나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최씨가 근무한 곳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진아/노무사 : 이런 조항이 관행적으로 경비직 분들의 취업규칙에 들어가 있고 입주민들의 갑질 문제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고 최희석 씨 유족은 내일(28일) 기자회견을 열고 최씨에 대한 산업재해보상을 신청할 예정입니다.

■ '비극의 씨앗' 주차 문제…지난해 경비일지에도 등장

[앵커]

경찰은 폭행과 상해, 협박 등의 혐의로 가해자로 지목된 심모 씨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습니다. 저희는 최씨 경비 일지에서 심씨와의 갈등이 오래전에 시작된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주차 문제가 지난해부터 기록된 걸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하혜빈 기자입니다.

[기자]

고 최희석 씨를 죽음으로 내몬 주차 문제는 5개월 전에도 있었습니다.

지난해 12월, 최씨는 경비일지에 폭행 가해자 심씨의 주차 문제를 두 번 기록했습니다.

12월 5일엔 브레이크 잠김. 12월 7일엔 주차 문제로 민원, 차 관리, 견인조치하라고 함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론 민원이 더 있었던 정황도 담겼습니다.

12월 5일 일지에 3일과 5일, 그리고 일요일 민원 7~8건이 적혔습니다.

일요일은 12월 1일이었습니다.

기록대로면 12월 1일부터 7일까지 네 번의 민원이 있었고, 주민들의 민원도 여러 번 있었던 셈입니다.

경비일지엔 심씨와 관련된 내용이 이로부터 열달 전인 지난해 2월에도 두 차례 등장합니다.

'심씨 어머니가 아들 문제로 신고해 경찰이 출동했다'고 돼 있습니다.

출동 시각과 순찰차에 대한 상세한 기록도 남겨뒀습니다.

이 때문에 최씨 유족은 심씨의 가족 문제가 갈등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고 최희석 씨 친형 : (심씨 어머니가) 오셔서 도와달라고 그랬답니다, 동생한테. (어머니 짐을) 몰래 숨겨주는 것을 (심씨가) 본 거죠. 내 동생한테 막 뭐라고 그러면서…]

당시 심씨는 관련 사건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영상취재 : 박대권 / 영상디자인 : 신하림·오은솔·정수임 / 영상그래픽 : 김지혜·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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