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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주고 떠난 정진석 추기경…정치권·시민 조문 이어져

입력 2021-04-28 20:52 수정 2021-04-2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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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고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추기경인 정진석 추기경이 어젯(27일)밤 선종했습니다. 고인을 위한 미사가 진행되고 있는 명동성당에 이수진 기자가 나가 있습니다.

지금도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기자]

성당에는 위령기도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고 어두운 옷을 입은 신자들이 거리를 둔 채 줄지어 서 있습니다.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시간 이어지는 추모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인데요.

현장에서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정진석 추기경을 누구에게나 인자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들어보시죠.

[이병숙/서울 수유동 : 죽을 때 가져가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나눔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시면서 우리한테 큰 어른으로서 본을 보여주고 가셨다…]

문재인 대통령도 페이스북에 나라의 어른이신 추기경이 우리 곁을 안타깝다고 전했습니다.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 정치권의 추모 발길도 이어졌습니다.

[앵커]

정진석 추기경도 고 김수환 추기경처럼 각막을 기증했죠?

[기자]

그렇습니다. 이 내용을 저희가 리포트로 준비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어젯밤 선종 후 안구적출 수술을 받았습니다.

2006년 장기기증과 각막기증을 약속한 데 따른 겁니다.

3년 전에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서명했습니다.

"내 주변의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저의 부족한 점을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십시오"

연명의료 계획서에 직접 펜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차근차근 마지막 길을 준비해 온 추기경은, 최근 통장에 남은 돈도 모두 기부했습니다.

총 1억 1000만원 정도로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인 명동밥집, 그리고 아동신앙교육기관 등을 지정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고, 월북했습니다.

발명가를 꿈꾸며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전쟁을 겪은 뒤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진석/추기경 (2009년) : 전쟁 중에 사제의 길을 걷는 걸 택하게 됐죠. 전쟁 중에 (교회법) 책을 입수했어요.]

1970년 서른아홉 살에 주교로 서품됐고, 2006년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추기경이 됐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늘 책상에서 공부하는 모습으로 기억합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거의 매년 신자를 위한 책을 썼고, 평생에 걸친 교회법 해설 작업은 지난해 마무리했습니다.  

[정진석/추기경 (2012년 / 서울대교구장 이임식) :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되돌아보면 부족함이 너무 많아 송구스럽습니다.]

세례명은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나눔의 성인 '니콜라오', 사목의 지표는 '옴니버스 옴니아', 즉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이 말처럼 가진 것을 모두 나누고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진석/추기경 (2009년 /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 믿는 이에게 죽음이란 희망의 문턱이요, 시작이라는 믿음을 갖고…]

정 추기경의 장례는 천주교 의례에 따라 오일장으로 진행됩니다.

다음 달 1일 용인 성직자 묘역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앵커]

명동성당에서 이수진 기자였습니다.

(화면제공 : 가톨릭평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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