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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또 한 사람의 알츠하이머'

입력 2019-11-12 21:59 수정 2019-11-12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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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나의 이름은 김병수. 올해 일흔이 되었다"

작가 김영하는 한 노인이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를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는 전직 연쇄살인범.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 왔는데, 살인의 순간과 방식은 또렷이 기억하지만 알츠하이머에 걸린 이후 가장 최근의 일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아침에 은희를 알아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의사 말로는 은희도 곧 기억에서 사라질 거라고 했다"

메모하고, 녹음하고, 기록하는 작업.

그는 부서지는 기억을 붙들고자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작업인 동시에 하나뿐인 딸을 또 다른 살인범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사투였습니다.

"괜히 치매에 걸린 척하는 것 아닙니까? 처벌에 피하려고… 왜 죽였습니까?"
"내가요? 언제요? 누굴요?"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끝없이 계속했고…

그러나 실제의 세상에는 하나뿐인 딸도, 또 다른 살인범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모든 상황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비극이었을 뿐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결말. 

그가 만들어낸 세상은 정말 알츠하이머라는 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을 이른바 '선택적 기억' 때문이었을까.

한참 전에 출간된 이 책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짐작하실 것 같습니다. 

"광주하고 내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추징금) 자네가 좀 내줘라"

그는 쏟아지는 가을볕 아래 라운딩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여유로운 표정과 몸짓은 병을 앓고 있다는 스스로의 주장대로였을까…

모두 '잊고' 살아가는 것 같았지요.

그러나 책임과 죄의식을 지워버리는 대신 그가 끝까지 움켜쥐고자 했던 것은 끝없는 자기애일 뿐…

이젠 기억하지 못한다는 그 가해의 기억은 자부심으로 포장되어 왔습니다.

'나는 오직 역사적 진실이 빛나는 태양 아래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다"
< 전두환 회고록 >

그는 지금도 가해를 멈추지 않고 있는 동시에 알츠하이머로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모욕과 상처를 가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책이 쉽게 읽힌다면, 당신은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 권희철/평론가

알츠하이머를 다룬 김영하의 책을 해설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이 담고 있는 함의를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의미…

그러나 책의 제목은 이미 많은 것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악인이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를 다룬 그 책의 제목은 "살인자의 기억법" 이었습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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