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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사활] 신원권을 아십니까?

입력 2024-01-18 16:30 수정 2024-02-2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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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신원권이라고 아세요?"
법조인 "그게 누구시죠?"
기자 "사람이 아니고 권리입니다."
법조인 "아……. 들어본 거 같습니다. 억울함을 풀어 달라, 뭐 그런 거 아닌가요"
기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거 같습니다."
법조인 "주장하는 경우가 몇 번 있던 거 같은데…. 잘..."

'신원권(伸寃權)'이라는 권리가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어대사전에는 신원을 '원통한 일이나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풀어 버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신원권에 대해 “현재 신원권의 법적 근거에 관한 명문화된 국내법규는 물론, 이에 대한 학설 및 판례가 형성된 바도 없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현직 판사들과 변호사들에게도 낯선 권리입니다.

서울고등법원 전경 〈사진=연합뉴스〉

서울고등법원 전경 〈사진=연합뉴스〉


1993년에 등장한 권리… 30년간 억울한 죽음에서 언급

신원권은 1993년 7월 2일 서울고등법원 제2민사부가 선고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판결문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신원권을 "혈연으로 맺어져 운명적으로 고락과 영욕을 함께하는 가족공동체에서는 가족 중 누가 뜻밖의 죽임을 당한 경우에 나머지 가족들이 그 진상을 밝혀내고 그 결과 억울한 일이 있었을 때는 법절차에 호소하여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할 것인바, 이것은 죽임을 당한 가족에 대한 내부관계에서는 의무이지만 대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될 하나의 권리"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소위 가족권 내지 친족권의 한 내용을 이룬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진상 은폐 행위는 원고 등에 대한 가족권의 침해로서 정신적 고통을 가한 경우에 해당하므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원인과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남은 가족의 의무이며, 권리다. 그런데 외부에서 그런 노력에 반해 사실을 숨기려 하거나, 왜곡하고 돕지 않는다면 이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불법행위'라는 겁니다.

이 판결은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고(故) 박종철 군의 유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2심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피고는 국가였습니다. '신원권' 판결은 당시 법원 안팎에서 주목받았습니다.

신원권은 이후 다양한 죽음에 대한 소송에서 언급됐습니다. 과거 국가의 폭력적 행위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들, 해외에 근무하다 갑자기 목숨을 잃은 공무원 등의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입니다.

다만 법원이 신원권을 인정한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일부에선 고 박종철 군 유족의 소송 상고심(3심)에서 대법원이 신원권 부분을 파기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대법원 측에서 받은 판결(93다41587)로 확인해 보니 당시 재판부는 "원심의 설명 이유에는 다소 부적절한 점이 있으나 위 피고들이 원고들에게 위와 같이 진상을 은폐한 행위로 인한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결론이 정당하므로 이점에 관한 논지도 이유가 없다"는 정도를 밝혔습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가 지난해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해경 지휘부 2심 판결 결과에 대한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이날 2심 재판부는 김석균 전 해경청장 등 해경지휘부에 무죄를 선고 했다. 〈사진=연합뉴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가 지난해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해경 지휘부 2심 판결 결과에 대한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이날 2심 재판부는 김석균 전 해경청장 등 해경지휘부에 무죄를 선고 했다. 〈사진=연합뉴스〉

풀지 못한 세월호… 의혹을 키운 정부

신원권이 다시 주목받은 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구조변경과 과적 등 다양한 불법행위, 거기에 더해 구조과정에서의 잘못으로 안산 단원고 학생 등 304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고 발생 이틀 뒤 세월호 선사와 구조를 담당한 해경 등에 대해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검찰은 목포에 경찰과 함께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인천에선 선주 일가를 쫓는 자체 특별수사팀을 꾸렸습니다.

정부는 해경 해체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합동수사본부가 수사를 빠르게 진행하자 선이 그어졌습니다. 수사가 일선 구조 담당자들을 넘어설 가능성이 보이면서입니다.

구조 상황과 관련해 해경 본청 압수수색을 청와대에서 막으려 했다거나, 구조 실패 책임에 대한 당시 해경의 현장 책임자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 적용 문제를 두고 법무부가 반대했다는 내용 등입니다.

일선 지휘관에게 업무상과실치사가 적용되면 국가배상 책임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부담이 커진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당시 광주지검은 입장을 지켜내고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이후 2017년에 외압 정황과 당시 대검 형사부와 법무부, 광주지검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수사가 이뤄진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각종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10년 동안 다양한 조사 위원회를 거쳐, 2019년 검찰 특별수사단이 출범했고, 2년 뒤엔 상설특검법에 따른 이현주 특검팀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세월호는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이 1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최성범 용산소방서장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검찰수사심의위원회와 관련해 입장을 밝히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이 1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최성범 용산소방서장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검찰수사심의위원회와 관련해 입장을 밝히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풀어야 할 이태원 참사

그리고 8년 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의 작은 골목에서 또 다른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159명의 시민이 '압사'라는 낯선 사고 원인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핼러윈 데이를 즐기기 위한 이들은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었습니다.

또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경찰이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경찰과 소방, 용산구청 등을 압수수색했습니다.
그런데 수사가 확대되자 선이 그어집니다. 현장에 있던 경찰과 소방 담당자들이 불려가고, 윗선에서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지붕 아래서 이뤄진 수사는 서울경찰청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꼬리 자르기 의혹이 제기됩니다. 이후 구속됐던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이 모두 풀려났습니다.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의결됐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역시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다시 복귀합니다.
정치인들과 극우 유튜버들은 이태원 참사에 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색깔과 정치를 덧씌웠습니다.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1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 합동분향소에서 연 '이태원 참사 유가족 침묵의 영정 행진'에서 참가자들이 영정을 들고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이들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의 신속한 공포와 독립적 조사기구 설립을 촉구했다.〈사진=연합뉴스〉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1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 합동분향소에서 연 '이태원 참사 유가족 침묵의 영정 행진'에서 참가자들이 영정을 들고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이들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의 신속한 공포와 독립적 조사기구 설립을 촉구했다.〈사진=연합뉴스〉


특별법 시행과 서울청장 기소 갈림길에 멈춰선 정부와 검찰

이태원과 세월호 참사, 다른 듯 같아 보이는 국가적 비극입니다. 수백 명의 국민이 이유도 모르고, 어느날 갑자기 바다에서 길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거기엔 재난 방지와 구조 시스템의 부재라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회재난입니다.

유족들과 시민사회단체의 노력으로 1년여가 지나 '10ㆍ29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에 대한 수정안이 통과됐습니다.

그러나 조사위원회의 권한을 키우고, 특검 요구까지 가능했던 내용이 빠지고, 총선이 끝난 뒤에야 조사가 시작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특별법이 시행될지도 불투명합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국론분열'을 얘기하며 거부권 행사에 무게를 싣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법을 통과시킨 민주당이 선거에서 지면, 법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 더해 검찰은 최근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을 재판에 넘길지를 두고 장고에 들어갔습니다.

앞서 경찰이 김 청장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를 적용해 송치한 지 1년이 넘었지만, 검찰 내부에서도 김 청장의 기소·불기소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그러자 이원석 검찰총장이 지난 4일 직권으로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수심위는 지난 15일 9대6으로 기소를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는 전날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부실 대응 책임을 물어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을 재판에 넘길 것을 권고했다.〈사진=연합뉴스〉

이원석 검찰총장이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는 전날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부실 대응 책임을 물어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을 재판에 넘길 것을 권고했다.〈사진=연합뉴스〉

신원권 보호는 법과 정의에 대한 믿음

1993년 신원권을 처음 도입한 재판장은 권성 부장판사였습니다.

그는 10년 뒤엔 헌법재판관으로 근무하며 '신원권' 논리를 헌재 결정문에 수차례 담았습니다.

특히 첫 도입 때 내용에 더해 헌법재판소 결정문에는 “이는 인간의 생명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본질적인 내용이며, 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국가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란 논지를 덧붙였습니다.

우리 국민이 어딘가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국가는 유족의 요구가 있기 전 입법 행정 사법의 총력을 동원해 원인을 밝히고 억울함을 풀어준 뒤 위로하고 재발방지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법기술자들은 권성 재판관의 의견이 반대의견에 제시된 '소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신원권 행사와 그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국가가 이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비로소 국민의 신뢰를 얻고, 법과 정의에 대한 믿음도 강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도움말 주신 분들
1993년 7월 손해배상 사건 선고 당시 법원에 근무한 법조인과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의 판사들
법원 근무 경험이 없는 변호사들과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 관련 국회 관계자 등

※ 참고
2009년 발간 역사 속 사법부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시스템 등록 판결문 (서울고법 1993. 7. 2. 선고 89나50586) 등
헌법재판소 결정문 (소2003. 5. 15.선고2000헌마192, 508(병합), 2003. 6. 26.선고2000헌마509) 등

서초동 사활(死活)

서울 서초동에는 대법원과 각급 법원들, 검찰청, 그리고 수많은 변호사 사무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법조인의 절반 이상이 밥벌이를 하는 곳입니다. 시민들에게 멀지만 가까운 곳으로 이 곳의 변화가 대한민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서초동'이 법조계의 고유명사화 되었습니다.
사활(死活)은 바둑에서 돌의 삶과 죽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활문제를 잘 풀어야 바둑 실력이 늡니다. 사법개혁 검찰개혁 등등 이곳에서 시민들은 잘 모르지만 벌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잘 모르지만 중요한 일들, 모두의 사활을 건 사건과 현상, 정책을 분석하고, 정리해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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