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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일 강제동원 '증거들'…우리가 없애려 하고 있다

입력 2021-10-11 20:24 수정 2021-10-11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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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추적보도 훅, 오늘(11일)은 우리 땅에 남은 일제의 강제동원 흔적을 찾아봤습니다.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들은 강제동원 피해를 외면하고 있지만, 수탈과 만행의 현장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산들이 사라져버릴 위기입니다.

신진 기자가 현장 취재했습니다.

[기자]

193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을 병참 기지로 삼겠다고 선포합니다.

인천은 만주와 일본을 오갈 때 요충지이기 때문에 거대한 군수 보급소가 됐습니다.

이곳 인천 신흥동은 과거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 관료와 사업가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방공호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안으로 들어와 보면 곡괭이 자국도 그대로 보입니다.

[유동현/인천시립박물관장 : 아사히 학교라고 일본인들만 다니던 학교였습니다. 학생들과 주민들을 위한 방공호 시설이죠.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곡괭이나 이런 걸로 파서 들어갔던 거죠.]

특히 조선인이 대규모로 강제 동원된 시설들은 역사적 가치가 큰 걸로 평가됩니다.

부평 캠프마켓 부지의 일본 육군 조병창이 대표적입니다.

일본이 식민지에 세운 유일한 무기 공장입니다.

광복 이후 미군기지로 쓰이다 내년 4월 우리나라에 완전히 반환될 예정입니다.

[김재용/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 : 소총이 4000점, 탄환이 70만발, 군도가 2만개, 그 포탄 이런 걸 해서 엄청 많이 만들었어요. 그걸 만들기 위해 강제동원을 한 겁니다.]

매년 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이곳에 동원돼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김우식/조병창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자료) : 총, 방아쇠. 주로 방아쇠 깎았어. (먹을 것) 주는 거는 조금밖에 안 주고. 그래서 몰래 훔쳐 먹기도 하고 들키고.]

해외로 강제동원 되거나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해 조병창에 들어간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마음대로 조병창을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김우식/조병창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자료) : 그때는 뭐 직장도 아니고 순전히 착취당하고 산겨.]

다치고 죽는 것도 일상이었습니다.

[유동현/인천시립박물관장 : 무기공장이기 때문에 손가락이 잘라진다든지 불에 화상을 입는다든지 다리가 절단된다든지…]

특히 조병창의 병원 건물은 상징성이 커 문화재청도 보존을 권고했습니다.

[김재용/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 : 일제 침략과 강제동원의 명백한 증거이고 흔적이라는 거죠.]

하지만 국방부는 토양 정화작업을 위해 건물을 없앨 수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문화재청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는 철거를 일단 미루기로 했습니다.

논란이 된 곳은 또 있습니다.

캠프마켓 맞은편엔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일하던 조선인의 합숙소가 남아있습니다.

미쓰비시는 당시 일본 조병창의 하청업체였습니다.

이렇게 낮은 일본식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보면 다섯 평이 채 안 되는 공간이 나오는데, 조선인 노동자 4~5명이 함께 생활한걸로 알려집니다.

당시 한반도에 미쓰비시가 들어왔다는 유일한 유형의 증거로 꼽히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몇 년 째 방치돼 있습니다.

[이명자/인천 부평구 주민 : 다니면서 보면 음산하다고 느껴야 하나. 기분이 안 좋으니까 이쪽으로는 가려고 생각을 안 해요.]

이 마저도 주차장을 만든다며 철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역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보류됐습니다.

지자체는 주민들과 협의해 개발과 보존, 두마리 토끼를 놓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합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 것으로 보입니다.

(화면제공 : 인천도시역사관 부평역사박물관·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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