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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의 기후 1.5] 전력수급, 진짜 위기? 원전이 해결책? 동문서답에 허송세월하는 탄소중립

입력 2021-08-23 09:32 수정 2021-08-23 09:33

'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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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93)

올해도 역시나 더웠습니다. 7월 평균기온을 놓고 봤을 때, 수도권은 올해 7월(평균 27.3℃, 평균 최고 31.4℃)은 1994년(평균 27.7℃, 평균 최고 31.7℃)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더운 달이었죠. 강원영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대 최악의 폭염으로 꼽히는 2018년, 1994년 여름과 함께 '폭염 톱3'에 들 정도였죠. 비록 8월 하순, 갑작스레 '다시 찾아온 장마'로 폭염의 기억이 흐릿해졌지만요.

날이 더울수록 (혹은 추울수록) 에너지 사용량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폭염과 함께 '전력 위기'라는 발언과 그 발언을 인용한 기사가 해마다 세트처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폭염으로 에어컨을 많이 틀고, 일부 매장에선 개문냉방(문을 열어놓고 냉방하는 것)을 하면서 블랙 아웃(대정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러한 이야기가 쏟아졌죠. 여기에 올해엔 “이게 다 탈원전 때문”이라는 첨언이 이어졌습니다.

#탈원전_때문에_전력이_부족해?
 
..

최근 10년간 원전의 발전량을 살펴봤습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전력 공급이 줄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주요 발전원(석탄, 원전, LNG, 신재생) 가운데 2011년보다 발전량이 줄어든 것은 석탄뿐입니다. 정부가 탈원전 선언을 한 것은 2017년 6월. 당시 선언은 '멀쩡히 가동 중인 발전소를 당장 폐쇄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규 원전을 추가로 짓지 않고, 정해진 수명을 다한 원전의 경우 이를 추가로 연장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일각의 주장처럼 “탈원전 선언으로 원전이 줄었다”는 이야기도, “탈원전 선언하더니 원전을 줄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도. 모두 틀린 주장인 이유입니다.

역대급 폭염이 찾아왔던 지난 2018년, 원전의 발전량은 최근 10년 중 가장 낮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우리 모두는 안전하게, 전력 수급에 문제없이 한 해를 보냈죠. 반대로, 원전 발전량이 적지 않았던, 원전의 발전 비중이 31%를 넘었던 2011년, 우리는 유례없던 정전 사태를 겪었습니다. 원전의 비중이 높다고 정전으로부터 안전한 것도, 원전의 발전량이 적다고 정전 위험이 높은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발전능력이_부족한_때는_지났는데
사실, 발전원을 놓고 수급 논란이 일거나 정전 우려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논쟁이 된 지 오래입니다. 과거에 대규모 발전소들을 막 짓던 시대, 전체 발전량 자체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을 때라면 “○○ 발전 때문에 전력 수급에 문제가 생긴다”, “◇◇ 발전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죠.

먼저, 역대급 폭염이 찾아왔던 2018년 8월의 전력수급현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의 그래프는, 당시 하루하루 가운데 가장 전력 수요가 높았던 때의 수치들을 모아둔 자료입니다. 그렇다 보니 평일엔 전력 피크 타임이 오후 5~6시, 주말엔 저녁 8~9시인 것을 알 수 있죠. 파란색 막대 그래프는 해당일의 공급능력, 주황색 막대 그래프는 수요를 의미합니다. 그에 따른 예비율은 노란색 꺾은선그래프로 그려봤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전력수급, 진짜 위기? 원전이 해결책? 동문서답에 허송세월하는 탄소중립

공급량(파란 막대 그래프)은 매번 실제 수요(주황 막대 그래프)를 크게 웃돌았습니다. 한 달 내내 10만MW 안팎의 전력을 공급해왔죠. 그렇다 보니 월평균 최저 예비율은 21.1%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전력 수요가 일시적으로 급증했던 날(13일, 14일), 예비율은 9.5~9.6%를 기록했지만요.

설명하기 간편하다는 이유로 흔히들 “예비율이 10% 밑으로 떨어지면 위기”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적절치 않은, 언론이 시민사회에 잘못된 잣대를 전달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실존하는 경보단계는 %가 아닌 MW를 기준으로 내려집니다. ① 정상, ② 준비(공급예비력 5500MW 미만), ③ 관심(운영예비력 4500MW 미만), ④ 주의(3500MW 미만), ⑤ 경계(2500MW 미만), ⑥ 심각(1500MW 미만)으로 구분됩니다. 당시 전력 수요가 가장 높았던 14일 상황은 어땠을까요. 예비율은 9.5%에 공급예비력은 8702MW에 달했습니다. 준비 단계 조차 아닌, 정상 수준이었던 겁니다. 당시 본격적인 첫 경보단계인 '관심'에 접어들려면 예비율은 6% 밑으로 떨어졌어야 했죠.

 
[박상욱의 기후 1.5] 전력수급, 진짜 위기? 원전이 해결책? 동문서답에 허송세월하는 탄소중립

일부 언론 매체의 보도만 보면 당장에라도 블랙 아웃이 찾아올 것 같았던 올해 7월은 어땠을까요. 단 한 번도, 예비율은 당초 우려처럼 한 자릿수로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평균 최저 예비율은 19.6%. 공급 예비력이 가장 낮았던 7월 13일에도 예비력은 8794MW로 정상 수준이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전력수급, 진짜 위기? 원전이 해결책? 동문서답에 허송세월하는 탄소중립

8월은 어땠을까요. 전력수급 위기 논란에 안 그래도 충분했던 예비력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공급예비율이 40%를 넘어서는 날도 있을 만큼요.


2018년 8월 당시 국내 발전설비 용량은 11만 7840MW~11만 7996MW에 달했습니다. 올해 7월 기준, 이 설비 용량은 13만MW를 넘어섰죠. “발전소를 없애서(실제 없애지도 않았습니다만) 그렇다”, “발전소를 늘리면 해결된다”… 이러한 논리는 근본 없는 궤변에 불과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캐파'는 충분하니까요.

#정전은_예상치_못한_때에
그렇다면, 우리는 정전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일까요.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발전시설이 부족해서 정전이 발생하는 일은 가능성이 거의 0%에 수렴합니다. 문제는, 정전을 부르는 이유가 '발전시설 부족' 밖에 없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전국 각지에서 전력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9.15 대정전입니다. 냉방 수요가 폭증하는 한여름도 아니고, 반대로 난방 수요가 폭증하는 한겨울도 아닌 9월에 찾아온 정전이었죠. 가을은 여름만큼 전력수요가 많지 않지만, 발전소 입장에선 여름 못지않게 바쁜 시기입니다. 여름 동안 쉴 새 없이 가동됐던 전국 각지의 발전 설비들이 겨울을 앞두고 차례로 정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2011년 9월 15일, 사상 최악의 정전 사태 이후 한전이 내놓은 대국민 사과문.2011년 9월 15일, 사상 최악의 정전 사태 이후 한전이 내놓은 대국민 사과문.


그런데 2011년 9월 15일, 예상치 못한 늦더위에 갑작스레 전력 수요가 치솟았습니다. 이날 전력거래소가 예상했던 최대 수요 피크는 6만 4000MW. 이날 오후 3시, 실제 최대 수요는 6만 7281MW에 달했습니다. 예비력은 3341MW까지 떨어졌고요. 결국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는 상황을 막기 위해 전력거래소는 긴급 순환정전에 나섰습니다.

공급자 입장에서야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의도한 정전'이었지만, 전력 사용자 입장에선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정전이었죠. 서울뿐 아니라 강원과 충청, 영남과 호남 등 전국 각지에선 전력공급 우선순위에 따라 전력 공급이 끊기게 됐습니다. 당시 목동구장에서 진행 중이던 프로야구 경기가 멈추는가 하면, 음식점에선 횟감으로 쓰일 활어가 산소 부족으로 폐사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대학교도 정전으로 수시 원서접수를 못 받아 원서 접수 기간을 하루 늘리기도 했고요. 엘리베이터에 승객이 갇히는 일도 속출했습니다.

이날의 전력 수요가 9월의 다른 날보다 크게 많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9월 1~2일, 7만MW 넘는 수요에도 전력 수급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죠. 사고 전날인 14일엔 전력 예비율은 무려 19.4%에 달했습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전력수급, 진짜 위기? 원전이 해결책? 동문서답에 허송세월하는 탄소중립

문제는 공급능력과 최대전력의 '갭'이었습니다. 월초와 같은 공급수준을 유지했다면 정전은 발생하지 않았을 테지만, 수요가 낮을 것으로 보고 발전량을 줄여놨던 게 화근이 된 것이죠. 물론, 전력 수요가 점차 늘어나는 과정에서 당국의 우왕좌왕한 대처도 한몫했습니다. 정전 다음 날인 16일에도 예비력은 3406MW로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지만 전날과 같은 정전은 없었으니까요.


“여름철 수급 위기가 맞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더위로 전기 공급 가치가 높아져 보다 적극 대처하겠다는 유의기간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럼 대정전은 발생하지 않는가? 오히려 봄, 가을과 같은 일상적 상황보다 정전 발생 확률은 낮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일 열린 긴급토론회 〈전력수급 위기와 탈원전, 무엇이 팩트인가?〉에서 김선교 한국과학기술평가원 부연구위원이 한 설명입니다.

김 위원은 “위기를 인지하고, 철저한 준비가 선행된 전쟁에선 패배할 확률이 낮은 것과 같은 이치”라며 “이러한 여러 위기를 신경 쓰지 않는 기습 상황일 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 것이 전력시스템의 특징”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전력수급 위기의 '탈원전 기원설'에 대해선 “탈원전은 장기계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현재 논란이 되는 실시간 수급 위기는 단기계획과 연관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장기적인 효과성이나 경제성, 국민 수용성, 탄소중립 기여도 등을 놓고 탈원전 정책에 대한 찬반 논의가 있을 수는 있지만, 탈원전과 단기 수요를 연관 짓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관건은_수요공급의_눈치게임
우리는 '내일은 얼마나 전기를 필요로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매일 찾으며 그날의 발전량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매일 이뤄지는 전력공급의 핵심은 정확한 수요 예측(혹은 관리)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요보다 적어도 문제일 뿐 아니라, 수요보다 지나치게 많이 전기를 만들어내도 심각한 문제를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기가 부족해도 정전이 발생하지만, 지나치게 많아도 정전이 발생할 수 있는 거죠.

비유를 통해 최대한 단순하게 풀어보자면, 전력망과 전력의 흐름은 물과 같습니다. 공급원에서 보내는 물이 수도관을 타고 곳곳의 수도꼭지(가정이나 회사 등)로 전해져 사용하는 거죠. 보내는 물의 양이 적으면, 아무리 수도꼭지를 돌린다 해도 물은 그저 몇 방울 떨어지는 데에 그치거나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보내는 물의 양이 급증하면, 수도관은 물론 수도꼭지까지 터져버릴 수 있죠. 그렇다면, 모두가 편안하게 물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도를 이용하는지, 그 수도관이 견딜 수 있는 압력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고려해 물의 공급량을 조절해야 합니다.

 
[박상욱의 기후 1.5] 전력수급, 진짜 위기? 원전이 해결책? 동문서답에 허송세월하는 탄소중립

비유는 단순하지만, 실제 전력사용량을 매일 예측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전력거래소는 최근 30년간의 발전량과 기온, 경제전망 등 여러 데이터를 조합해 공급량을 결정합니다. 기후변화는 이미 어렵고 복잡한 예측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고요. 갑작스러운 폭염이 찾아오거나, 조금 전까지 해가 쨍쨍하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거나, 4월인데 눈이 오거나, 한겨울인데 포근해지거나… '이상(異狀)의 일상(日常)화'가 과거 30년의 데이터를 무색하게 만드니까요.

이러한 불확실성은 수요 측면에서만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해 9월,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이 나흘 간격으로 잇따라 발생하면서 동해안에 위치한 원전들 역시 잇따라 가동을 멈췄습니다. 고리 3·4호기, 신고리 1·2호기, 월성 2·3호기 총 6기의 원전이 갑작스레 발전을 멈춘 겁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한껏 달궈진 바다와 거기서 만들어지는 잦은 태풍은 해안가에 위치한 발전시설의 예상치 못한 가동 중단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관건은 유연한 전원과 IoT, AI 기술 등을 접목한 스마트 전력망에 달려있습니다. 전영환 홍익대학교 전기공학부 교수는 위의 토론회에서 “최대 전력수요를 걱정할 때는 지났다”며 “지금은 저수요, 순수요가 줄었을 때 계통을 어떻게 안정화할 것이냐가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죠. 커져가는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좋은 '유연한 전원',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한 '스마트 전력망' 이 둘에 대해서 이미 해외 각국에선 기술개발과 투자, 상용화가 진행중입니다. 전력이 부족하다는 가짜뉴스, 그것이 탈원전 정책 때문이라는 근본 없는 주장. 이는 실제 데이터나 과학에 기반한 주장이라기 보단 '유연한 전원'과 '전력망 투자'를 막기 위한 프레임 만들기에 가깝습니다.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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