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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취재] "인생 황혼에서야 내 편이 있다는 게 좋은 줄 알았지"... 70대 여성들 '노조' 만든 이유는

입력 2021-05-03 11:48 수정 2021-05-03 14:23

70대 여성 청소노동자 9명 모여, 생애구술사 책 내고 노조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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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여성 청소노동자 9명 모여, 생애구술사 책 내고 노조 결성

곱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임진순(75) 씨는 연거푸 말했습니다. "서로 편이 되어주려고. 이 나이에도 일을 해야 하니까 (직장에서) 써주는 건 고맙지. 그래도 서로 알아야지. 이건 잘못됐고 저건 그르다는 걸"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청소일을 해온 70대 청소 노동자 아홉 명이 모여 '노년알바노조'를 만들고, 책도 냈습니다. 이 나이대 여성들이 그려온 비슷비슷한 삶의 궤적 속,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이 되어 30년 넘게 바깥 노동을 해온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 빛이 났습니다. 방송 기사에 다 담지 못한 인터뷰 내용을 요약해 여러분께 전합니다.

#대학교 청소하고 받은 첫 월급 32만 원
 
 지난 30년 간 청소노동자로 일해온 임진순(75) 씨. 지난 30년 간 청소노동자로 일해온 임진순(75) 씨.
임진순 (75) 씨는 나이 서른이 넘어 가장이 되었습니다. 전기공사를 하던 남편이 당시 2000만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담보로 잡힌 집이 넘어간 겁니다. 처음엔 아는 친척의 소개로 망원동에서 함바집 일을 했습니다. 공사장 함바 일이라는 게 고정적이지 않다보니 중간 중간 이 건물 저 건물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소개를 받아 1999년 연세대학교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월급은 32만원. 그 뒤 4년 간 연세대에서 일하다 바로 옆 세브란스병원으로, 2006년도에 다시 연세대로 와 10년을 더 일했습니다.

대학교에서 일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한 학생을 꼽았습니다. " 우리가 청소해주면 수고한다하고, 졸업하고 취직한 다음에 다과를 사서 찾아왔더라고요. '취업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너무 감격했어요" 라고 전합니다.

시험 기간엔 엘리베이터에 늘 학생들로 가득차 공부에 방해될까, 쓰레기통도 계단으로 들고 조용히 오르락 내리락 했습니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가장 참기 어려웠던 건 용역 업체의 갑질이었습니다. "맨 처음 여기 오니까 김부장이라고 상납을 하면 괜찮고 마음에 안들면 힘든 관으로 보내고." 용역 업체는 학교와 청소노동자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힘'을 행사했습니다. 업체에 잘 보이지 않으면 이리저리 청소구획을 바꿨습니다. 그 때는 갑질이라는 단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2009년,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 노조가 생겼습니다. 그는 "정말 내가 억울한 일이 있으면 서로 말하고 의지하고 이런게 너무 좋더라고, 노조라는게 길거리에서 왜 저러나 학생들 공부하는 데 왜 길에서 시끄럽게 하나 이렇게 봤었는데 다르더라고..."라고 그 당시 느낀 '연대하는 소중함'을 전합니다.

노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 나이, 예순 둘이었습니다.

 
임진순 씨는 10년 전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 노조 결성 당시 생애 처음으로 '노조'에 가입했다. 임진순 씨는 10년 전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 노조 결성 당시 생애 처음으로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가 생기니 총장이 지나가도 숨지 않아도 됐습니다. "노조 없을 때는 무슨 총장이 지나가거나 그러면 숨었어요. 업체에서 보이지 말라고 총장님 지나가는데는, 그런 식으로 해놓고 청소한다고 2박 3일을 닦고 쓸고. 노조가 생기고 나서는 그런건 안한다고 했죠. 조금이라도 이게 너무 감사한 거에요"

노년 알바 노조에 가입한 이유도 이런 취지에서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들도 일할 수 있다는 거를 노인네들도 활동할 수 있고, 서로 연대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게 괜찮을 것 같아요"

임진순 씨는 지금도 신촌 부근 오피스텔에서 청소 일을 합니다. 하루 두 시간씩 오피스텔 복도를 청소하는 일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의 노동강도에 비하면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 말합니다. 임 씨는 "열심히 살아서 여기까지 온거에요. 칠십 인생, 잘 버티고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사무실 재떨이 비우고, 전화선 사이 비질하던 그 때
 
30년 넘게 서울 시내 큰 빌딩에서 청소노동을 한 하점순(73) 씨. 어깨와 무릎 등은 만성 통증에 시달리고 눈시림에도 시달린다.30년 넘게 서울 시내 큰 빌딩에서 청소노동을 한 하점순(73) 씨. 어깨와 무릎 등은 만성 통증에 시달리고 눈시림에도 시달린다.
"우리 사돈이 보면 안되는 데..." 하점순 씨는 카메라 앞에서도 사돈 걱정, 자식 걱정을 이어갔습니다. 하 씨도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운 뒤인 30대부터 청소 노동에 뛰어들었습니다. 8·90년대 당시 경찰청, 구 삼성 본관, 한화 본관 등 국내 큰 빌딩들을 여러 곳을 청소했습니다.

사무실 안에서 담배도 마구 피던 80년 대, 그 때 청소노동자는 화장실에 쌓여있던 담배꽁초, 사무실 재떨이를 비우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굵은 전화선이 얼기설기 얽혀있어 사이사이 비질을 해 먼지를 털어내고 나무바닥에 카페트를 깔아놓고 써 그 바닥을 왁스로 닦은 다음 세탁한 카페트를 본드로 붙여야했던 당시의 노동을 돌이켜봅니다.

하 씨는 "지금은 회사원들이 자기 자리 정리정돈하고, 분리수거 하는 데, 예전에는 담배 재도 회사 바닥에 털고, 그런 시절에 일을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한참 옛날 이야기를 하는데, 하점순 씨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옛날 생각하니 눈물 나세요?" 라고 던진 물음에 하 씨는 " 천장을 걸레로 많이 닦았는데, 특히 엘리베이터 천장을 가루 세제를 묻혀서 닦았는데 아마, 그게 나이 들어서 눈병으로 온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안해도 될 껄. 깨끗이 한다고. 하루에 눈약을 세 종류 넣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 씨의 남편은 마포구청에서 미화 일을 하다 쉰 두 살 때 사고로 숨졌습니다. 하 씨는 70세 때까지 청소노동을 했고,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고된 노동의 끝. 해방감도 왔지만 처음엔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 때는 그랬죠. 생활 패턴을 못잡아가지고. (그만두고 나서 ) 힘들었어요. 할 일이 없으니까 내 마음이 뭐부터 해야할지 생활이 뒤죽박죽 되더라고."

평생, 해가 뜨기 전에 출근하는 삶을 살았던 그. 은퇴 후엔 해가 떠있어도 잘 수 있다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은퇴 후에도 노년 노동자들이 만든 노조에 가입한 이유는 "30년 넘게 일한 경험이 지금 일하는 노년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 전합니다. 계약직으로, 파견직으로,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자신처럼 알게 모르게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임진순 씨와 하점순 씨 외에도 7명의 청소노동자 이야기가 더 담겨 '노동으로 일군 한 평생'이라는 책이 만들어졌다. 지난 30일 노년알바노조 창립과 책 출판을 기념하여 모인 이들.임진순 씨와 하점순 씨 외에도 7명의 청소노동자 이야기가 더 담겨 '노동으로 일군 한 평생'이라는 책이 만들어졌다. 지난 30일 노년알바노조 창립과 책 출판을 기념하여 모인 이들.

이 외에도 김금선, 김복자, 김은자, 남금자, 서미순, 이경자, 이창순의 이야기가 더해져 70대 청소 노동자 일곱 명의 삶이 담긴 구술집 '노동으로 일군 한 평생' 이란 책이 나왔습니다.

노년 알바 노조를 만드는 준비위원회,평등 노동자회가 엮었습니다. 박희정, 이호연, 홍세미, 홍은전, 희정 작가가 구술 작가로 참여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소리없는 그림자 노동으로 묵묵히 가족을 일군 아홉명의 여성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시작으로 노년 알바 노조는 정식 노조 창립을 위한 첫 발을 뗍니다. 청소 노동자로만 꾸려졌지만 앞으로 다른 직군까지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입니다.

노동자성,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조로 인정받기까지는 힘든 여정이 남았습니다. 허영구 노년 알바 노조 준비 위원장은 "한때는 청소 노동에 제대로 된 가치가 부여받지 않아 많은 시간을 유령인간 취급을 받으면서 노동하며 살아온 이들"이라며 "이들을 위한 노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노인빈곤율 OECD 중 1위인 대한민국, 평생동안 그림자 노동을 해왔고, 앞으로도 생존을 위한 노동을 이어가야 하는 이들의 연대에 우리 사회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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