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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땅 밑에 숨어있던 조선시대 흔적…일반에 공개

입력 2021-05-10 13:50 수정 2021-05-10 17:42

조선시대 우물·청기와 발견…일제시대 전신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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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우물·청기와 발견…일제시대 전신주도

〈사진=조선시대 사헌부 터에서 발견된 우물 터〉〈사진=조선시대 사헌부 터에서 발견된 우물 터〉
광화문 광장 공사 과정에서 조선 시대 흔적이 대규모로 발견됐습니다. 조선 시대 주요 관청 터, 도자기, 우물 등 다양한 역사 자료 등이 광화문 광장 아스팔트 밑에 숨 쉬고 있던 겁니다.

서울시는 2019년 1월부터 광화문 광장 문화재 발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발굴 조사 대상 지역만 1만 제곱미터에 이릅니다. 이 중 40% 지역에서 조선 시대 유물이 나온 겁니다.

먼저 우물입니다. 옛 조선 시대 사헌부 터에 위치한 우물로 추정됩니다. 사헌부는 주로 관리들을 감찰하거나, 인사 행정에서 왕이 임명한 자를 검증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한데 우물의 위치가 독특합니다. 사헌부 입구 쪽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우물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 관계자는 "우물의 연대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며 "보통 우물이 입구 쪽에 자리하지 않는데 이 우물은 독특하게도 입구 쪽에 위치한 걸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우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는 앞으로 있을 추가 연구에서 밝혀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진=조선시대 배수로 터〉〈사진=조선시대 배수로 터〉
초기 조선 시대, 배수로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5m 폭의 배수로는 지금도 정교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배수로에 사용된 목재의 형태도 지금까지 상당히 잘 보존되고 있었다는 게 시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시 관계자는 "폭의 너비, 목재 형태 등을 봤을 때 '상당히 공을 들여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진=육조 거리에서 나온 조선시대 청기와〉〈사진=육조 거리에서 나온 조선시대 청기와〉
다양한 도자기와 기왓장도 이번에 새롭게 발견됐습니다. 눈에 띄는 건 청기와입니다. 조선 시대 땐, 청기와를 화려하고 사치스럽다고 인식한 경우가 많아 극히 일부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궁궐에도 일부 건물만이 청기와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창덕궁의 선정전만이 유일하게 청기와를 덮은 궁궐 건물로 남아있습니다.

시 관계자는 "청기와가 어느 건물에 쓰인 지는 현재로썬 알기 어렵다"면서도 "전체 기와를 청기와로 하지 않았더라도 일부만 청기와를 썼거나 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사진=조선시대 육조 거리에서 나온 도자기〉〈사진=조선시대 육조 거리에서 나온 도자기〉
이번에 유물이 나온 장소는 흔히 '육조 거리'라 불리던 곳입니다. 조선 시대 중앙 관청이 모여있던, 일종의 조선 시대 판 '세종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출토된 도자기도 당시 일반 평민이 쓰기 어려운 고급스러운 도자기란 게 시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사진=일제시대 나무 전신주 일부분 모습〉〈사진=일제시대 나무 전신주 일부분 모습〉
조선 시대 유물만 발견된 건 아닙니다. 일제시대 때 있던 '나무' 전신주의 일부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무 윗부분이 잘려 땅에 묻혀 있었지만, 옛 문헌 등을 참고할 때, 시 관계자는 "일제시대 때 쓰였던 나무 전신주의 일부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공개된 이곳의 유물은 시민들에도 공개될 예정입니다. 오는 21일부터 29일까지 하루에 2번 시민들에게 현장을 공개합니다. 현장에 직접 오기 어려운 시민들을 위해서도 5월 말부터 유물 발굴 과정 등이 담긴 영상을 서울시 홈페이지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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