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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단역배우 자매 자살' 그리고 미투 두 달

입력 2018-03-30 13:33 수정 2018-03-3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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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단역배우 자매 자살' 그리고 미투 두 달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18분. 18층 건물 옥상에서 한 여자가 뛰어내렸다. 세상에 대한 저주를 모두 쏟아붓듯 다이어리엔 '18'이라는 숫자들이 가득찼고, 유서엔 이런 글을 남겼다. "단단히 나를 건드렸다. 35년 동안 갈기갈기 찢겨진 내 인생, 죽을 수밖에 없다"고.

 
[취재설명서] '단역배우 자매 자살' 그리고 미투 두 달



그녀가 숨지고 일주일도 안 된 9월 3일, 동생이 언니의 뒤를 따라 이번에는 13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동생은 유서에서 "엄마가 남아서 복수해 달라"고 했다. 두 달 뒤엔 자매를 한꺼번에 잃은 충격에 아버지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어머니, 약으로 고통의 나날을 버티고 있다.

믿기지 않는 이 가족의 사연을 접한 건, 사건이 일어난 지 꼭 3년 뒤였던 2012년 8월 말이었다. 당시 성범죄 친고죄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 관련 사례를 모으던 중, 한 후배가 서울시자살예방센터를 통해 알게된 사건이 있다며 알려줬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돼 서울시에서 관리를 받고 있었다. 어렵게 자매 어머니와 통화가 이뤄졌지만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이제 다 덮고, 나도 가려고. 둘째와 약속도 못지켰지만…"

일주일 넘는 설득에 만나게 된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후배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사연은 유난히 무더웠던 2004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송 일을 하던 동생은 대학원생 언니에게 재미 삼아 드라마 엑스트라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언니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엑스트라로 활동했다. 하지만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녀가 단역배우 활동 3개월 만에 달라졌다. 출장에서 돌아온 그녀는 이유 없이 벽을 할퀴고, 거실을 서성였다. 극도로 불안해했다. 집안 살림을 부수기도 했고, 이를 말리던 엄마와 동생에겐 평소 입에 담지 않던 욕설까지 늘어놓았다. 결국 가족들은 경찰의 도움으로 큰딸을 정신병원에 데려갔다. 병원 상담 중 딸의 입에선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활동 3개월 동안 엑스트라를 관리하던 드라마 반장 4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성추행을 가한 사람도 9명에 달했다. 어머니는 딸이 지목한 13명을 모두 경찰에 고소했다.

대학 시절 여성학을 공부하며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는 큰딸. 그녀는 경찰 진술에서 첫 번째 성폭행을 당한 뒤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무기력해졌다고 했다. 쇼크 상태에 빠진 그녀가 다른 피의자들에겐 오히려 '좋은 먹잇감'이 됐다는 것이다. 사건을 맡았던 수사관은 "흔히 말하듯 남자들이 한 여자를 갖고 놀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피의자들은 한결같이 "합의하에 이뤄진 성관계"라고 반박했다. 피의자들과의 끝없는 대질신문,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다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던 딸. 건강이 악화된 딸은 스스로 고소를 취하했고 피의자들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 후에도 계속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그녀의 악몽은 지워지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탐사코드J 2012년 9월 23일 방송] 영상 보기 ☞ https://bit.ly/2GkjygG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당시 정황을 입증할 자료는 거의 남지 않았다. 딸들의 3번째 기일을 지낸 어머니는 관련 자료들을 모두 불태워 버린 후였다. 이 때부터 어머니를 이끌고 자매가 당했던 고통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처음 찾은 곳은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는  자매가 자살한 지 모르고 있었다. 변호사에게 건네 받은 녹취록에는 가해자 중 한 명이 큰 딸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했던 사실을 발견했다. 적나라한 욕설로 가득한 녹취록을 어머니에게 다시 보여줄 순 없었다.

며칠 뒤 향한 곳은 두 딸이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국립병원이었다. 딸들의 병력서를 열람하려면 등본이 있어야 했다. 어머니로 하여금 망자로 돼 있는 딸의 등본을 떼게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렵게 접수를 하고 원무과 앞에 대기를 하고 있는데, 낯익은 이름이 울렸다.  '○○○씨 오셨어요?' 세상을 떠난 두 딸의 이름이 병원에 울려퍼졌다. 당시 주치의한테 가자 이번에는 '왜 따님은 안 오셨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제 3자인 나도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취재설명서] '단역배우 자매 자살' 그리고 미투 두 달



수사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찾은 검찰도 상황은 비슷했다. 검찰 수사기록은 5년 동안 보존하게 돼 있다. 2004년 발생한 사건이지만 2006년까지 조사가 이뤄져 수사기록은 2011년 폐기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폐기되기 직전 보존실에 자료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보호자라고 하더라도 수사 검사의 동의가 없으면 관련 기록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입수한 병력서와 수사기록에는 성폭행을 당한 후 세상을 등지기까지 5년 동안, 두 딸이 받았던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해당 사건을 조사한 수사관은 3명이었다. 처음 큰 딸을 조사했던 수사관은 실적 위주로 사건을 접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과 수시로 대질 신문이 이뤄졌다. 계속되는 가해자와의 대질, 그 즈음 병력서에는 딸의 병도 점점 깊어졌다. 이후 수사관이 교체됐지만 피해자에 대한 배려나 수사에 대한 적극성은 역시 없었다. 진술에 의존해 수사를 진행하면서 조사가 거듭될수록 딸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심지어 가해자들은 서로의 수사 상황을 공유한 정황도 포착됐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공모 여부는 가려내지 못했다. 이는 성폭행 수사를 경제팀에서 맡았기 때문이다. 경제팀 수사 자체는 대부분 신문을 하는 것이다. 사건 현장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만 보고 판단했다. 하다못해 성폭행이 이뤄졌다는 여관에서 CCTV를 찾아보거나 관계자들의 진술을 받은 노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가해자의 성기를 그려보라고 했던 수사관의 말은 실제 그 그림을 보기 전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딸은 수사 이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정신과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이를 바라보던 동생도 죄책감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결국 아버지는 2006년 큰 딸의 고소를 취하했다.

이제 '반장'들을 찾아야 했다. 010으로 앞자리가 바뀌면서 그들의 전화번호도 달라졌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가해자들은 아직도 대부분 드라마 현장에 있었다. 전화로 연결된 한 유부남은 '피해자와 모텔에서 성관계 후 택시비 5000원을 줬다'며 떳떳해 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냐며 당당한 그에게 자매가 자살한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묻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후 '후회는 안 드냐'고 묻자 '너무 후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자매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자기 와이프에게 미안해서'였다. 또 다른 반장은 '꽃뱀한테 당했다'며 '모녀가 무고로 처벌받았다'고 주장했다. 역시 자매가 자살한 지 모르고 있었다.

위력이나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해자가 피해자로,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된다. 대부분 신고를 못하기도 하지만, 실형 선고가 낮기 때문에 합의로 취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에도 서로가 같은 직장이나 같은 커뮤니티에 속해 있어 피해자들은 말을 못하고, 가해자는 더 말을 많이 하면서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것이다.

6년 만에 꺼내든 취재수첩에 드러난 '반장'들의 변명은 최근 '미투'로 소환된 성폭력 가해자들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고은), '성폭행은 아니었다'(이윤택), '아내에게 미안하다'(안희정) 등…

큰 딸이 가해자로 지목한 일부 반장들은 결국 법정에 섰다. 2015년 어머니가 가해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증인으로 선 나는 취재 당시 만났던 반장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당시 반장 측 변호인단이 기자에게 '사건을 직접 지켜보지 않았으면서도 어떻게 화간인지 강간인지 알 수 있냐'고 물었다. 난 '병력서와 수사기록을 본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재판부는 "가해 남성들의 성폭력 정황은 인정되나 소송 제기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 판결했다. 최근 '미투'로 고발된 남성들도 대부분 공소 시효 문제로 이같은 전철을 밟을 공산이 큰 것이 사실이다.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은 현재 청와대 청원 요청만 20만명이 넘었고, 경찰도 대규모 진상조사단을 꾸려 재수사에 착수했다. 단순히 '반장'들을 찾아나서기보다, 사회 내부, 관련 기관 내부로도 그 칼 끝을 향해야 할 것이다. 6년 전 망자인 큰 딸을 대신해 성폭력 증거와 증언을 수집한 경험을 비춰볼 때, 미투 폭로 당사자들이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관련 증거들을 직접 모으며 받게될 고통과 2차 피해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단역배우 자매 자살 재수사로 성폭력에 관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꾸고, 관련 법체계를 재정비하고, 무엇보다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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