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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취재] 청년 노동자 이선호를 살릴 수 있었던 '경우의 수'

입력 2021-05-19 09:02 수정 2021-05-1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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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수 한 사람 종일 세워 놓는 일당이 10만원입니다. 기업에서 그 10만원 아끼려다 저는 제 아이를 잃었습니다."

평택항의 일용직 노동자였던 23살 이선호 씨가 300kg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목숨을 잃은 지 오늘로 28일째입니다. 선호 씨의 아버지 이재훈 씨는 아직 아들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유족과 사고 대책위의 요구사항입니다.

선호 씨의 아버지 이재훈 씨가 13일 오후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아들의 얼굴이 새겨진 현수막 앞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고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선호 씨의 아버지 이재훈 씨가 13일 오후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아들의 얼굴이 새겨진 현수막 앞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고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하나만 제대로였다면…"

취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젊은 노동자가 우리 곁을 너무 쉽게 떠난 사건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코로나 탓에 대학이 문을 닫자 학비라도 벌겠다며 아버지의 일터에 나가던 아들이었습니다. 친구와 술잔 기울이며 "우리는 아직 젊다"는 희망을 얘기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이렇게 쉽게 보내기엔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지게차가 반대편 날개를 넘어뜨려 접으면서 생긴 충격으로 선호 씨가 있던 쪽 날개도 넘어졌습니다. (사진=노웅래 의원실)지게차가 반대편 날개를 넘어뜨려 접으면서 생긴 충격으로 선호 씨가 있던 쪽 날개도 넘어졌습니다. (사진=노웅래 의원실)
하지만 취재를 진행할수록 점점 선호 씨가 '쉽게 떠났다'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됐습니다. 그날 사고 현장에는 작업 유도원, 즉 신호수가 없었습니다. 현장 작업반장, 즉 작업 지휘자는 다른 작업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안전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난 개방형 컨테이너엔 날개가 천천히 접히도록 하는 스프링도 없었습니다.

쉽게 떠났다기엔, 선호 씨가 죽지 않을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신호수가 선호 씨를 봤다면 지게차 기사에게 멈춤 신호를 보냈을 것입니다. 경험 많은 작업반장이 있었다면 무리한 작업지시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전 교육을 받았다면 안전핀 빠진 컨테이너 아래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컨테이너를 점검해서 스프링을 달아 놓았다면 선호 씨가 몸을 피할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컨테이너는 날개가 부드럽게 접힙니다. 〈영상=유튜브 갈무리〉정상적인 컨테이너는 날개가 부드럽게 접힙니다. 〈영상=유튜브 갈무리〉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돼 있었다면 선호 씨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고와 직접 관련은 없을 수 있지만, 선호 씨는 가장 기본적인 안전모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작업 유도원 일당 10만원, 혹은 안전교육에 드는 시간 30분이라면 '죽지 않고 일할 권리'의 기본 비용치고는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예측과 예방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데, 돈 아낀다고 이걸 안 해서 사람이 죽었다." 아직도 빈소를 지키고 있는 선호 씨 친구의 말입니다.

'위험의 외주화'…항만은 관리 사각지대

4월 22일 사고 당일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선호 씨는 한 달 전에도 큰 사고를 당할 뻔했습니다. 화물을 점검하려 컨테이너 문을 열자 쏠려 있던 화물이 선호 씨에게 쏟아진 것입니다. 원청은 그때도 익숙하지 않은 컨테이너 작업을 시켰습니다. 안전교육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안전요원도, 안전모도 역시 없었습니다. 선호 씨는 그날 안전화를 신은 발등이 부을 정도로 다쳤습니다. "아침에 나오면 안전 조심하란 교육은 기본인데 아예 진행을 안 했다. 처음에 갔을 때 뭐 이런 데가 있나 황당했다." 선호 씨와 일하던 동료 노동자의 얘기입니다.

원청 업체가 이렇게 마음 놓고 '위험의 외주화'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원청 업체와 계약을 맺고 항만 운영 전반을 관리·감독할 권한은 해양수산부에 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항만 노동자의 작업 현장을 근로감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수부는 항만에 대한 안전관리 권한이 없어서, 노동부는 해수부 관할까지 감독할 인력이 없어서 문제를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원청, 해수부, 노동부 중 하나라도 제 역할을 했다면 선호 씨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경우의 수는 여기서도 많았습니다.

"가정 풍비박산"…'죽지 않고 일할 권리' 보장되길

경찰과 노동청은 이번 사고가 누구의 책임인지 아직 조사하고 있습니다. 쓰레기를 주우란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 건 누구인지, 원청 업체의 안전관리 소홀에 어느 정도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각 부처도 대안을 내놨습니다. 노동부는 항만 사업장들에 특별근로감독을 시작했습니다. 항만 안전관리를 해수부가 일차적으로 맡도록 하는 법 개정도 추진 중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후 경기도 평택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선호 씨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후 경기도 평택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선호 씨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제 아이가 죽는 바람에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호 씨의 빈소를 찾았을 때, 아버지 재훈 씨가 한 말입니다. 가족 잃은 슬픔을 평생 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하루 평균 7명의 이선호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만 원을 아끼려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잃는 일이 더 이상은 없길 유가족은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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