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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썰] 법이 지키지 못한 '특수고용직'…차별금지법이 구제할 수 있을까

입력 2021-07-06 16:50 수정 2021-07-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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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일하는 기계'였다"

골프장 캐디로 일하던 배 씨의 죽음을 취재하던 중, 배 씨의 동료 A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골프장 캐디들의 현실을 표현한 겁니다.

아파서 조퇴해도, 손님이 골프채 잃어버려도 '벌점'
지난해 9월, 경기도 파주시의 한 대학 소재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던 배 씨가 직장 상사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쳤습니다. 일하는 동안 배 씨는 "뚱뚱하다고 못 뛰는 거 아니다, 뛰어라" "넌 뚱뚱하니까 조금만 먹어라"는 등 폭언은 물론 지속적인 험담과 괴롭힘에 시달렸다고 유족과 동료들은 증언합니다.

배씨의 동료 A씨 인터뷰. 〈JTBC 뉴스룸〉배씨의 동료 A씨 인터뷰. 〈JTBC 뉴스룸〉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골프장이 캐디들에게 요구한 행동규칙을 한 번 보시죠.

배 씨가 일하던 골프장 '캐디 행동수칙'배 씨가 일하던 골프장 '캐디 행동수칙'
지각과 조퇴에 벌점을 주는 데서 나아가 고객과 소통이 미진해도 벌점을 받아야 했습니다. A 씨는 "무전에 세 번 이상 이름이 불리고도 대답을 안 하면 벌점을 받았다"라고도 말했습니다. 하루는 동료 캐디가 고장 난 카트에 발이 깔렸는데, '캡틴'이라 불리는 현장 반장은 치료는커녕 벌점부터 매기고 치료비용까지 자비로 부담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가혹한 근무 환경 속에서 배 씨는 1년이 넘도록 혼자 끙끙 앓았습니다. 부모님에게도 사망하기 2주 전에야 본인이 근무하며 겪었던 부당한 일들을 처음으로 털어놓았습니다. A 씨는 골프장에선 "캡틴 말이 곧 법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업무 대부분이 캡틴을 위주로 이뤄지기 때문에 괜히 문제를 제기했다간 더 심한 괴롭힘이 돌아올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노동 하지만 '근로자' 아니다? 사각지대 놓인 '특수고용직'


배 씨는 숨진 뒤에도 차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골프장 캐디는 현행법상 근로기준법이 보호하는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골프장 캐디들은 '특수고용직', 일명 프리랜서로 등록돼 있습니다. 특수고용직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산재보험 가입이 필수가 아닙니다. 근로자가 원하면 '산재적용제외신청서'를 쓰고 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배씨의 동료 A씨 인터뷰. 〈JTBC 뉴스룸〉 배씨의 동료 A씨 인터뷰. 〈JTBC 뉴스룸〉
표면적으론 근로자들이 스스로 산재보험을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사정을 뜯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 회사들은 "보험료를 안 내도 된다"며 캐디들을 현혹해 산재적용제외신청서를 쓰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캐디들에게 반강제로 신청서를 쓰게 만듭니다.

A씨는 "회사가 적절한 설명과 선택권도 보장해주지 않은 채 '그냥 써라, 옆에 있는 샘플대로 사인하면 된다'고만 말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산재보험을 포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며 제대로 된 설명을 들었다면 산재 적용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결국 산재적용제외신청서라는 종이 한장이 세상을 등진 배 씨의 보상을 가로막았습니다.
산재적용제외신청서.산재적용제외신청서.


유족 "산재 인정해달라" 근로복지공단 "노무사와 상의해라"

배 씨의 유족들은 배 씨가 세상을 떠나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인정해달라"며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인정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배 씨 아버지는 수차례 공단에 전화를 걸어 딸의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담당자의 대답은 매번 같았습니다. "노무사와 다시 상의하시라"는 공단 관계자의 설명은 거절 의사를 에둘러 표현한 겁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이번 달부터 개정이 돼 법이 정한 '질병·부상', '임신·출산·육아' 등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산재제외적용신청서를 작성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미 적용 제외 상태인 특고직들도 다시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배 씨가 산업재해를 인정받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미 사망한 배 씨가 산재보험에 다시 가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취재가 시작되자 근로복지공단은 배 씨 사례를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라며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대화 말미엔 "산재 인정은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 노동부 "'차별금지법' 제정 신중해야"

유족들은 배 씨를 "국가가 차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특수고용직이라는 이유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국가가 이들을 '차별'하고 '배제'했다는 취지입니다.

유족들은 캐디뿐 아니라 다른 직종에서도 제2, 제3의 배 씨가 나오지 않기 위해선 "법이 보호하는 직종의 스펙트럼이 넓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현재 법사위에서 논의 중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은 고용형태, 성별, 학력 등 총 23가지 이유에 따른 차별을 모두 금지하고 있습니다. 차별 행위가 일어날 경우 가해자를 처벌하는 규정은 없지만,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시정 명령을 강제"할 수 있게 됩니다.

차별금지법안의 일부 내용. 차별금지법안의 일부 내용.
만약 이 법이 이미 제정됐다면 배 씨도 죽음 대신 국가를 향해 근로기준법의 개정과 보상을 요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아직도 이 법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장혜영 의원실에 보낸 의견서를 보면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신중히 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성, 연령, 고용형태에 따른 구제절차는 최근 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하려 하고 있으므로,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제절차까지 추가되면 중복될 가능성이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 (고용노동부, '차별금지법 제정안(장혜영 의원) 관련 검토 의견 中)

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고 당장 세상의 모든 차별이 사라지긴 어렵습니다. 다만 적어도 차별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향해 "당신은 지금 차별금지법을 위반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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