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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정진석 추기경이 직접 쓴 연명의료계획서…서울성모병원 입원중

입력 2021-03-05 05:02

차곡차곡 준비해 온 '마지막'이 말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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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곡차곡 준비해 온 '마지막'이 말하는 것들


정진석 추기경이 2018년에 작성한 연명의료계획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정진석 추기경이 2018년에 작성한 연명의료계획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내 주변의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저의 부족한 점을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십시오"

지난 2018년 9월 정진석 추기경이 작성한 연명의료계획서에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며 적은 글귀입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고 싶다던 정 추기경은 가장 먼저 감사와 사과를 말했습니다. 남은 이들의 마음을 안아주는 매듭의 말입니다. 지난 2006년에 이미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 기증이 실시될 수 있도록 부탁했던 정 추기경은 마지막까지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지난 달 자신의 통장 잔액도 모두 명동밥집, 아동 신앙 교육 등에 봉헌 하도록 했습니다.
2006년 추기경 서임 당시 정진석 추기경과 베네딕토 16세. 2006년 추기경 서임 당시 정진석 추기경과 베네딕토 16세.

1931년 태어나 올해로 90세, 고령의 추기경은 지난달 21일 노환으로 인한 통증이 악화되면서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틀 걸러 한 번씩 정 추기경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쉬운 이별을 앞두고 남겨질 사람들을 다독이는 건 추기경이 꾸준히 해 온 그 '준비'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도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올렸습니다. 허 신부는 정 추기경이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썼습니다. 어머니는 외아들을 사제로 키운 후 삯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죽어서도 좋은 일 할 수 있다며 안구를 기증했고, 바느질로 모은 유산으로 땅을 사 모두 청주 교구에 기증했습니다. 기증한 땅에는 초중성당이 세워졌고, 어머니의 세례명인 '성녀 루치아'를 모셨다고 합니다.

1970년 서른아홉 살에 최연소 국내 주교로 서품됐고 2006년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추기경이 된 정진석 추기경. 그는 신도들을 위해 거의 매년 책을 썼습니다. 집필한 저서가 50여권에 이릅니다. 10여년 전엔 책을 내면 종종 기자 간담회를 했었는데, 당시 영상에 추기경이 "이해합시다, 인정합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인정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고마움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로가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으로 악화하지만 서로가 인정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진석 추기경의 "저의 부족한 점을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십시오"라는 말도 어쩐지 10여 년 전 했던 "이해합시다, 인정합시다"와 맥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부족했던 모습을 겸허히 인정하고 겸손하게 이해를 청했기에 그렇습니다. 나눔과 감사 그리고 이해. 익숙하지만 추상적이어서 잘 납득되지 않은 단어들을 죽음 앞에 선 정진석 추기경이 구체화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과 멀지 않기에, 죽음도 이렇게 준비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추기경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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