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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도광산 징용 피해자 구술 "하루하루가 공포 자체"

입력 2021-12-29 11:34 수정 2021-12-2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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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니가타현에 있는 사도(佐渡)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올릴 후보로 선정하기로 하면서 한·일간 새로운 갈등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일, 군함도 이어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과 마찬가지로 금과 은을 캤던 사도광산 역시 우리 징용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된 아픔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2015년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강제노역 사실을 알리고 희생자를 추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이 일본 문화심의회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됐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27일 보도했다. 사도광산 유적 중 하나인 도유(道遊)갱 내부의 모습. 〈사진=연합뉴스〉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이 일본 문화심의회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됐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27일 보도했다. 사도광산 유적 중 하나인 도유(道遊)갱 내부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그러면 사도광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9년 발간한 정혜경 ARGO인문사회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일본지역 탄광·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미쓰비시광업(주) 사도광산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보면 당시 참상을 일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논산 출신 징용 피해자 임태호씨 구술 기록이 유일

현재까지는 191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1940년 11월 사도광산에 동원됐던 임태호씨가 사망 직전 남긴 구술 기록이 유일합니다.

임씨는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살다가 1997년 9월 사망했습니다.

"자유 모집으로 생각했지만 도착하자 징용 사실 알아"

임씨는 1940년 11월 '자유 모집' 형태로 생각했지만 도착하자 '징용'이란 사실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지하에서 하는 작업은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었으므로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 매일 같이 낙반 사고가 있어서 '오늘은 살아서 이 지하를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졸이고 살았다. 사망자에게 인간 대접이라는 것은 없었고 아무런 조의도 없었다."

임씨는 살아남았지만 큰 부상은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병원도 못 가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지하에서 작업 중에 하시고(발판)가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정신이 든 곳은 병원이 아니라 함바(노동자 숙소)의 이부자리였다. 허리를 강하게 맞아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열흘 정도 누운 채 지냈다. 간신히 일어날 수 있게 되자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병에 걸려도 이틀 이상은 쉴 수 없는데 열흘이나 일하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던 임씨는 결국 광산을 탈출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 요구했지만…"

임씨는 구술을 마치며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했습니다.

"전후 반세기 이상(구술 당시 1997년)이 지났으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정부로부터 진심 어린 말 한마디를 들은 적이 없다. 죽은 동료들도 지금은 모두 성불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와 같은 경우에 있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성의있는 진정한 사죄를 받기를 원한다."

정부, 사도광산 징용 피해자 1200명 추정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무렵 사도광산에 동원된 우리 징용 노동자들이 1200명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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