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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썰]강제동원 명부엔 '합사제'…가족도 모르게 일본의 '신'이 된 사람들

입력 2021-11-26 18:40 수정 2021-11-2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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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지 75년이 지났는데 아버지가 여전히 일본에 갇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강제동원 피해 유족들 얘기입니다. 다음 달 합사 철회 소송 항소심 재판을 앞둔 유족 세 명을 JTBC 취재진이 직접 만났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 합사된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최판룡씨의 생전 사진들. 〈사진=JTBC 뉴스룸 캡처〉야스쿠니 신사에 무단 합사된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최판룡씨의 생전 사진들. 〈사진=JTBC 뉴스룸 캡처〉

취재진이 유족들을 하루빨리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유족들이 첫 소송에 나선 건 2001년. 앞선 두 차례 소송은 모두 기각됐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소송의 원고들은 대부분 여든을 앞둔 고령자들입니다. 십수 년 간 소송이 이어지는 사이 먼저 세상을 떠난 분도 있습니다.

■ 일본 신사에 갇힌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는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해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 있습니다. '합사'란 '신으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유골이 아닌 '명부'가 보관된 것인데요.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큰 전쟁 범죄자들을 신격화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입니다. 전범들을 포함해 합사자는 모두 246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스쿠니 신사에 한국인 2만 1천여 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는 사실이 1990년대에 들어서야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일본이 당초 유족들에게 아무런 통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사된 한국인들은 대부분 강제동원 피해자들입니다. 강제 동원된 한국인 군인이나 노동자가 전쟁 중 사망하자, 일본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며 합사자 명단에 올린 겁니다.

이 문제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정보를 찾아 나선 유족들이 명부에서 '합사제'라는 문구를 발견하면서 수면 위에 떠오르게 됐습니다. 유족 이희자(78) 씨는 “일본이 숨진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가져다준 것이 전혀 없다”며 “유족과 시민단체들의 활동과 소송으로 겨우 찾아냈다”고 했습니다.

JTBC 인터뷰에 응한 박남순(78) 씨도 이 대목에서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박 씨의 아버지 박만순 씨는 박씨가 태아로 배 속에 있던 1942년 군속으로 징용돼 이듬해 사망했습니다. 박 씨 역시 얼굴도 못 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합니다.

JTBC와 인터뷰 중인 박남순 씨. 〈사진=JTBC 뉴스룸 캡처〉JTBC와 인터뷰 중인 박남순 씨. 〈사진=JTBC 뉴스룸 캡처〉

박 씨도 2011년이 돼서야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그는 “놀라고 기가 막혔다”며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통지도 없었고, 야스쿠니에 모셨다는 말도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박 씨는 “아버지가 '천황'을 위해 죽었다며 범법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식민지 시대가 끝난 지 언제인데,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일본에 갇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 일본의 '신'이 됐으니 이름도 못 빼?

일본 법원과 야스쿠니 신사 측은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 시설이며 일본 정부는 합사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정치적 공간이 아닐뿐더러 종교적 관행에 따라 한 번 '신'으로 이름을 올리면 명단에서 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에 전몰자 정보를 제공한 건 맞지만, 일반적인 행정 사무의 일환일 뿐, 합사는 야스쿠니 신사의 독자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상남 씨의 아버지 최판룡 씨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 증명서. 〈사진=민족문제연구소〉최상남 씨의 아버지 최판룡 씨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 증명서.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일본 후생성은 1959년부터 1975년까지 2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의 자료를 야스쿠니 신사에 제공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정책실장은 “일본 정부의 관여 없이 합사가 안 된다는 것은 명확하다”며 그 근거로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 회의에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참여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는 “누구를 합사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회의에 구 해군성과 육군성 관계자가 참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은 “합사 당시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라고도 하지만 이 또한 군색한 변명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남 실장은 “정작 전쟁이 끝난 뒤 더이상 일본인이 아니라며 보상에서 배제했다”며 일본의 주장은 모순됐다고 지적했습니다.

■ "자식 된 도리…'1엔 소송' 포기 못 해"

유족들은 소송을 준비하며 여러 차례 멸시를 당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박 씨는 2014년 야스쿠니 신사에 항의하러 갔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신사 측은 유족들의 출입을 막았다고 합니다. 박 씨는 “합사 철회 재판을 하고 있어 유족이 아니라는 억지 논리로 신사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며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빼면 오라 해도 안 온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했습니다.

2014년 7월 야스쿠니 신사에 방문한 한국인 유족들. 〈사진=민족문제연구소〉2014년 7월 야스쿠니 신사에 방문한 한국인 유족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2019년 5월, 7년 동안 준비한 재판이 1분 만에 끝났을 때도 유족들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당시 도쿄지방법원의 판사는 “원고의 모든 요구를 기각하고 소송 비용은 원고 측이 부담한다”는 짧은 판결문만 읽고 법정을 떠났습니다. 유족인 이희자 씨는 “재판이 몇 초 만에 끝나는 순간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박남순 씨도 “이게 뭐냐고 대성통곡하며 울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유족들은 앞으로도 쉽지 않은 싸움이 이어질 것으로 봤습니다. 그런데도 소송을 계속하는 건 '자식 된 도리'라고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아버지의 왜곡된 죽음을 바로잡고 추모할 권리를 찾겠다는 얘기입니다.

박 씨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면서도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 싶다”고 호소했습니다. 이 씨는 “아버지의 이름을 그곳에서 빼내야 우리 가족이 해방됐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최상남(81) 씨는 “돌아가신 분이 살아올 수는 없지만, 아버지를 내 고향 산천에 진정으로 모실 수 있게 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유족들은 위자료로 '1엔'을 걸고 아직 소송 중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라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남상구 실장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끝난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과거로 고통받는 유족들이 있는 한 오늘과 내일의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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