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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썰]'똑똑한 유리벽' 무인주문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입력 2021-04-08 15:32 수정 2021-04-08 15:52

[취재썰]'똑똑한 유리벽' 무인주문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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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썰]'똑똑한 유리벽' 무인주문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키보다 큰 기계 앞에 서 봅니다. 손을 갖다 대니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메뉴를 고르라는데, 보이지 않으니 무얼 파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점자가 있는지 기계 이곳저곳을 만져보지만, 나도 모르게 원하지도 않은 음식들만 선택됩니다. 도움을 줄 직원은 없습니다.

시각장애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무인주문기 모습입니다. 요즘 식당과 카페, 영화관, 마트 등 어디를 가도 키오스크, 즉 무인주문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면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입 한번 떼지 않고 결제까지 쉽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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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모두에게 편하기만 할까요. JTBC 밀착카메라팀은 무인주문기가 불편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디지털 소외계층'이라고도 말합니다. 먼저, 시각장애인의 시선에서 무인주문기는 얼마나 벽 같은지 알아보겠습니다.

◆관련리포트
[밀착카메라] '아이스크림' 시키려다 '아이스티' 누르는 노인들
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998740

① 고민하는 사이 화면은 '초기화' 된다

대학생 은빈 씨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입니다. 어느 정도 사물의 형체나 색깔은 흐릿하게 보여 주변 환경이 어떤지 대략 파악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키오스크를 찾아 이용하는 건 아주 어렵습니다.

은빈 씨와 한 푸드코트를 찾았습니다. 메뉴 주문부터 결제까지 함께 해보기로 했습니다. 무인주문기는 식당 3곳의 메뉴를 모두 띄워 그 수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은빈 씨는 '등심 돈가스 세트'를 먹기로 했습니다. 페이지를 하나하나 넘기며 키오스크에 가까이 다가가 최대한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화면이 사라졌습니다. 그새 초기화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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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를 한눈에 보고 고를 수 있는 비장애인이라면 그 시간이 짧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한 디지털 소외계층에겐 다릅니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고,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벽은 더욱 커지겠지요.

② 카드를 넣으라는데 주문기마다 위치 달라

어렵게 메뉴를 선택했어도, 결제가 또 다른 산입니다.

'신용카드를 카드 리더기에 삽입해주세요' 라는데, 카드 리더기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쉽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은 카드 리더기가 위에 있든 아래에 있든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제각각 다르면 비장애인에겐 또 다른 큰 어려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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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은빈 씨는 '그냥 카드 갖다가 대충대충 해봐요.'라고 했습니다.

③ 누군가에겐 '터치'도 벽이다

이번에는 대학생 은산 씨와 함께 무인주문기를 이용해봤습니다. 은산 씨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총명한 안내견 세움이와 함께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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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 씨는 키오스크 이곳저곳을 천천히 만져보았습니다. 혹시 장애인용 점자나, 터치가 아닌 버튼식 주문이 가능한지 살핀 겁니다. 하지만 없었습니다. 그 사이, 은산 씨의 터치를 인식한 키오스크는 고르지도 않은 음식들을 장바구니에 담을 뿐이었습니다.

④ '도움' 버튼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키오스크엔 '도움' 버튼이 있었습니다. 이마저도 앞을 볼 수 있어야만 확인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도움 버튼을 눌렀을 때 직원이 호출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화면엔 안내 전화 하나만 떴습니다. 음성 서비스는 없었기에 이마저도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은산 씨는 무인주문기를 이렇게 부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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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걸 '똑똑한 유리벽'이라고 불러요. 뭔가 말을 하고 동작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저한텐 벽이나 마찬가지라서요."

대학 입학 후 학생식당에서 마주한 '벽'

은산 씨가 무인주문기의 벽을 처음 느낀 건 대학 신입생 때입니다. "대학 들어가고 나서 한 일주일 뒤였나요. 동기들이랑 밥 약속을 많이 잡잖아요.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게 됐는데 그때 키오스크를 딱 마주쳤어요. 저는 전혀 준비가 안 됐으니까 막막하게 있던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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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 씨는 그 후로 무인주문기가 없는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렇다 보니 학생식당에서도 파는 메뉴를 더 비싼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시각에 제약이 있다는 이유로, 두 배 세배 가격을 주면서 키오스크 없는 다른 상황에서 항상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꼈어요. 앞으로 점점 많아지겠구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직원 구분도, 도움 요청도 어려워

물론 직원이 상주하며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각장애인이 겉으로 티가 나는 건 아닙니다. 은빈 씨는 겉으로 봐서는 거의 시각장애인인 걸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난처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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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각장애인인 게 티가 안 나니까 '왜 도와달라고 하지?'라고 생각할까 봐 주저하게 돼요. 또 남들은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데 저만 따로 가게 쪽에서 수고를 해줘야 한다는 마음에 불편해지기도 하고 위축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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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직원인지도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보니, 민망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으면 '직원이세요?' 한 번 물어보고. 근데 아니면 민망하죠. 유니폼이 있으면 제일 편하고, '도움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얘기하고 있는 분이 계시면 그게 제일 알아보기 쉬워요."

"개발 단계에서부터 배려 필요"

은산 씨는 소외 계층을 위해 대단히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게 절대 아니라고 말합니다. "키오스크에 나오는 화면 내용을 읽어주는 음성 안내, 그리고 터치스크린을 버튼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설비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가 엄청난 비용 증가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장애인의 기술 이용에 관한 이슈가 생길 때마다 관련 부서나 기업에서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이유로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소외 계층도 똑같은 소비자로서 고려해 개발하고 보급했다면 불필요한 교체 비용이 들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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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디지털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만 몰입될 것이 아니고, 소외 계층들이 잘 소화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식당과 카페 같은 요식업, 그리고 교통 분야의 키오스크 정보 접근성 기능 개선을 추진하기 위한 사업자 공모를 진행 중입니다. 연말까지 소프트웨어 표준 모듈을 완성해 키오스크 제작자, 운영자 등 민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보급한다는 계획입니다.

단순히 '밥을 못 먹어서 불편한' 문제가 아닌 이유

은빈씨와 은산씨는 일상에서 느낀 불편함을 계기로 소외 계층의 주문을 돕는 웹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은빈 씨와 은산 씨가 속한 대학연합동아리 키위(Ki-WE, '우리 모두의 키오스크')에서 함께 기획하고 있는데, 이달 말 1차 완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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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취재가 끝난 후, 은빈 씨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습니다. 은빈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순히 저희가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못하고 밥을 못 먹어서 이렇게 불편한 것이 아니에요. 키오스크라는 것을 처음 마주했을 때, 우리는 소비자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애초에 처음부터 고려 받지도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절망스럽게 다가왔습니다.

학생 식당에서 저희가 키오스크론 혼자 주문할 수 없으니 개선을 해달라고 하면 항상 돌아오는 대답이 '도우미를 쓰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거든요. 장애인들은 밥 하나를 먹는 데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차차 인식하게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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