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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24시]평소와 달리 거액을? 금융사기 피해 막은 은행원

입력 2021-03-08 17:30 수정 2021-03-0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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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낮 1시 53분쯤, 강원도 평창군 대화농협에 50대 남성 A씨가 들어섰습니다. A씨는 현금인출기에서 600만 원을 찾았습니다. 돈을 더 찾으려고 했는데 한도 초과였습니다. 창구로 가 방법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창구에서 근무하는 박용란 과장이 A씨의 통장에서 400만 원을 더 인출해줬습니다. 아까 찾은 돈까지 도합 1천만 원이 A씨의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보이스피싱 자료화면 〈사진=JTBC 뉴스룸 캠처〉보이스피싱 자료화면 〈사진=JTBC 뉴스룸 캠처〉
평창군 대화면은 인구가 5천 명을 조금 넘는 작은 지역입니다. 농협은 지역의 몇 안 되는 금융기관입니다. 그래서 이곳 직원들은 지역에 사는 거래 고객 대부분을 잘 압니다. 박 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박 과장의 눈에 A씨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무엇보다 한 번에 큰 돈을 현금으로 찾는 게 평소 같지 않았습니다. 박 과장은 A씨에게 혹시 금융사기가 아닌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A씨가 대답했습니다.

"기계대금인데 현금으로 내면 할인해준대요."

A씨는 지역에서 방앗간을 운영합니다. 기계대금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박 과장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금융사기 같다며 주의를 줬습니다. 하지만 A씨는 끝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무턱대고 계속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게 A씨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인 3일 오전 10시 30분쯤, A씨의 아내가 급히 은행 창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혹시 우리 남편이 어제 여기서 1천만 원을 찾아갔나요?"

고객과 보험 가입 상담을 하고 있던 박 과장은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제 A씨가 돈을 찾아갔다고 배우자에게 알렸습니다. 머릿속에서는 금융사기를 떠올렸던 어제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A씨의 부인은, 남편이 집 앞에서 돈을 전달하겠다며 나갔다고 했습니다. 박 과장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A씨가 사는 아파트가 어딘지 떠올렸습니다. 다행히 은행 근처였습니다. 박 과장은 상담 중이던 고객에게 잠시 기달려달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달려나갔습니다.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A씨는 처음 보는 남성에게 돈을 막 건네려는 참이었습니다. A씨의 부인이 재빨리 돈을 가로챘습니다. 박 과장은 남성에게 다가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일이 잘못된 걸 알아챈 남성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박 과장은 부인에게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남성의 뒤를 쫓았습니다.

"어디 가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박 과장의 계속된 물음에 남성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나한테 그래요?"

남성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도중, 박 과장의 눈에 낯선 택시 한 대가 보였습니다. 경기도 수원에서 온 택시였습니다. 박 과장은 남성이 타고 온 택시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여기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택시기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15만 원을 받기로 하고 멀리 평창까지 온 기사가 황당해하는 것을 뒤로 하고, 다시 남성을 쫓아갔습니다.

때마침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순찰차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농협에서 가까운 파출소까지의 거리는 100m도 안 됩니다. 박 과장은 순찰차에 올라타, 남성이 걸어내려간 방향으로 안내했습니다. 머지않아 남성을 발견해 붙잡았습니다.

붙잡힌 남성은 54살 정 모 씨로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금책이 맞았습니다. 변변한 직업 없이 생활하던 정 씨는 어느 날 인터넷에서 '고액알바'를 구한다는 글을 봤습니다. 돈만 받아다주면 건당 15~20만 원을 사례로 준다는 말에, 보이스피싱인 줄 알면서도 범행에 가담했습니다. 범행과 관련된 지시는 모두 텔레그램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보이스피싱 자료화면 〈사진=JTBC 뉴스룸 캡처〉보이스피싱 자료화면 〈사진=JTBC 뉴스룸 캡처〉

보이스피싱 조직은 금융감독원을 사칭했습니다. 돈을 보내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된다고 A씨를 협박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할 때 직원이 물으면 기계대금이라고 답변하라고 시나리오까지 줬습니다. 금융감독원에서 왜 거짓말까지 시켜가며 돈을 보내라고 하는 건지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만, A씨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연기까지 하며 돈을 찾았던 겁니다.

경찰은 지난 5일, 박 과장에게 표창장과 보상금 20만 원을 줬습니다. 경찰서장이 직접 농협을 찾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박 과장은 이날 또 한 건의 금융사기 범죄를 막았습니다. 고객이 850만 원을 이체하겠다며 은행을 방문한 겁니다. 이 돈을 넣어야 저금리 대출로 갈아탈 수 있다고 해, 사위에게서 빌려왔다고 했습니다. '금융감독원' 번호로 전화가 왔으니 틀림없다고도 했습니다. A씨가 당했던 수법과 거의 똑같았습니다. 박 과장의 만류로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고객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강원 평창경찰서는 지난 5일 대화농협을 방문해 보이스피싱 피의자 검거에 기여한 은행원에게 표창장과 범인 검거 유공자 보상금을 수여했다. 〈사진=평창군청 제공〉강원 평창경찰서는 지난 5일 대화농협을 방문해 보이스피싱 피의자 검거에 기여한 은행원에게 표창장과 범인 검거 유공자 보상금을 수여했다. 〈사진=평창군청 제공〉

박 과장 덕에 피 같은 돈을 지킨 방앗간 주인 A씨는 오늘 은행에 떡 1말을 대접했습니다. 박 과장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했습니다. 처음 본 남성을 쫓아가던 그 때는, 사실 무서웠다고 털어놨습니다. 경찰도 이 부분에서 박 과장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과거 보이스피싱 인출책이나 수금책 조직원 중에는 흉기를 소지하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하지만 박 과장은 본인이 찾아준 돈을 눈앞에서 잃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갈수록 똑똑하고,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금융기관이나 경찰의 대처만으로는 뒷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경우에도 A씨의 부인이 은행을 다시 찾지 않았더라면, 박 과장이 고객과의 상담 때문에라도 조금만 머뭇거렸다면 피해를 막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 예방이 중요합니다. 수상한 전화나 문자메시지는 받지 말고, 의심스러운 파일이나 인터넷 주소는 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경찰이나 검찰, 금융감독원 같은 정부 기관은 절대 전화로 개인 정보나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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