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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안구단]'봉오동 전투' 이끈 홍범도 장군 아내와 아들도 독립 유공자 된다

입력 2021-02-25 14:44 수정 2021-02-25 15:34

국가보훈처, 제102주년 3·1절 맞아 275명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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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제102주년 3·1절 맞아 275명 포상


*JTBC 온라인 기사 [외안구단]에서는 외교와 안보 분야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알찬 취재력을 발휘해 '뉴스의 맥(脈)'을 짚어드립니다.

1920년 6월 7일, 한국 독립군은 첫 승전의 역사를 썼습니다. 홍범도(1868~1943)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입니다. 중국 지린성 왕칭현의 봉오동에서 독립투쟁 최초로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추격대와 전면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 역사적 기록입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74명,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그쳤습니다.

포수 의병대장 당시의 홍범도 장군포수 의병대장 당시의 홍범도 장군


1868년 평양에서 가난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했던 평민이었던 홍범도 장군은 39세이던 1907년, 누구의 지시나 부름도 없이 스스로 의병이 됩니다. 시작은 뜻을 같이 하는 포수와 농민 14명으로 꾸린 작은 의병대였습니다. 홍 장군의 의병대는 같은 해 11월 함경남도 후치령 산맥에서 일본 무기 수송대를 공격해 첫 승리를 거뒀는데, 이때 홍 장군의 곁에는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아들 양순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의병 부대에 합류해 그 역시 스스로 의병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겁니다.

일본군이 홍범도 장군 뿐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표적으로 삼은 건 이때부터 입니다. 홍 장군의 의병대는 꾸려진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아 500명 규모로 커졌는데, 일본군의 잔혹한 색출에도 의병대의 사기가 꺾이지 않자, 홍 장군의 아내인 단양 이씨(丹陽 李氏)와 아들 양순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홍범도가 산에서 내려온다면 천황이 백작 벼슬을 내릴 것"이라고 회유했지만 단양 이씨는 오히려 일본군을 꾸짖었다 합니다. 결국 일본군의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숨졌습니다. 일본군이 아들 양순을 내세워 홍 장군에게 회유 편지를 전달하려 했지만, 편지를 들고 온 아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정도로 홍 장군은 단호했습니다. 이후 아들 홍양순 선생은 아버지와 함께 함경도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1908년 6월 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어머니가 옥고로 숨진 이듬해, 당시 그의 나이 16세였습니다.

1921년 소련 크렘린궁 앞에 선 홍범도 장군1921년 소련 크렘린궁 앞에 선 홍범도 장군


아내와 아들을 모두 일본군 손에 잃은 홍범도 장군은 이후 더욱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1907년 의병대로 첫 승리를 이끈 후치령 전투 이후 열 달 안에 일본군과 60회가 넘는 전투를 벌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등지벌 전투, 갑산 간평전투, 구름을령 전투, 신성리 전투 등에서 홍 장군의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은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이후 13년 간 의병대를 대한독립군으로 키우고, 총사령관 직위에 올라 1920년의 봉오동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기까지 홍 장군의 꺾이지 않는 전의의 바탕엔 자신과 뜻을 함께한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홍 장군이 세운 승리의 역사에서 큰 조명을 받지 못했던 부인 단양 이씨와 아들 홍양순 선생이 3·1운동 102주년을 맞은 올해, 순직 110여년 만에 건국훈장을 받습니다. 이들의 공적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홍범도 일지'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일지엔 '그때 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만 내려 쓴 담담한 문체에서 오히려 홍 장군의 단장(斷腸)의 비애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국가 보훈처는 "독립운동이 한 인물뿐 아니라 전 가족의 숭고한 희생 속에 진행된 사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자필로 기록한 일지. '내 아들 양순이 죽고 거창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 되기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고 적혀 있다. 홍범도 장군이 자필로 기록한 일지. '내 아들 양순이 죽고 거창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 되기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고 적혀 있다.


올해 독립 유공자 포상 명단엔 1919년 4월 충북 진천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시위를 벌이다 현장에서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숨진 박도철 선생도 포함 됐습니다. 박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일제강점기 서울로 확산된 제2 광주학생운동에 앞장선 임복희 선생과 대한적십자사 간호부로 활동한 채계복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됩니다. 이들을 포함해 건국훈장 136명, 건국포장 24명, 대통령표창 15명 등 모두 275명이 새롭게 독립 유공자로 포상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독립 유공자를 발굴하고 포상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또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고도 타국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던 홍범도 장군, 1937년 러시아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사후 이곳에 묻힌 장군의 유해를 하루 빨리 고국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6월 "코로나19 때문에 늦어졌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참고자료_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자료 중 '홍범도장군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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