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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딴짓하면 퇴장" 군함도 전시관, 황당한 취재 지침

입력 2020-06-2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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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설명서] "딴짓하면 퇴장" 군함도 전시관, 황당한 취재 지침

지난 15일 일본 정부가 100% 예산을 지원한 산업유산정보센터가 문을 열었습니다. 3월 31일 개관식을 했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때문에 문을 닫았다가, 6월 15일부터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게 운영을 시작한 겁니다. 

저를 비롯한 도쿄특파원들은 센터 측에 취재를 요청했는데, 개관 뒤 7일이나 지난 23일에나 취재를 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센터 측 관계자는 "JTBC만 취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면서 고압적인 자세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준수사항을 확인하고, 반드시 지키겠다는 싸인을 하라"고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서약서를 쓰라는 얘기인데, 그 내용이 무척 황당합니다.

총 16개 항목을 내걸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개 항목만 살펴보겠습니다.
 
[취재설명서] "딴짓하면 퇴장" 군함도 전시관, 황당한 취재 지침 산업유산정보센터가 JTBC 측에 보낸 '취재 관련 준수사항'


◇필기도구, 카메라, 노트북 "안돼"…관람 도중 사적인 대화 금지

8. 전시관 입장시 카메라 기자는 카메라 1대만 갖고 들어갈 수 있다. 기자는 사물함에 가방, 스마트폰, 아이패드, 노트북, 녹음기, 필기구, 메모장 그 외 휴대품을 모두 맡겨놓고, 센터 측이 제공하는 볼펜 2자루 (검정, 빨강) 및 노트 1권을 갖고 들어갈 수 있다.

9. 센터 측은 취재 풍경을 녹화해 기록하며, 나중에 그 영상을 이용한다.


기자의 메모장은 안되고, 센터가 주는 메모장만 쓰라는 겁니다. 사전에 질문을 적어가는 건 안되는 모양입니다. 사진 촬영도 안되고, 안내자의 설명 내용을 녹음하는 것도 막았습니다. 사진이나 설명 내용이 다른 곳에 이용할까봐 그런 것 같은데, 어디에 쓰면 좋을까요.

또 취재하는 모습을 기록해 영상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한 것도 깨름칙 합니다. 취재 신청 때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주소 등 개인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영상까지 확보한 것인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 지 몰라 찝찝한 게 사실입니다.
 
[취재설명서] "딴짓하면 퇴장" 군함도 전시관, 황당한 취재 지침 산업유산정보센터 입구


5. 취재는 전시관 안내가 1시간 30분, 질의응답이 20분으로 전체 약 2시간이 걸린다.

12. 센터 측이 하는 시설 내 안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도중에 퇴장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전시관 측은 2시간에 걸친 관람을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여기엔 약 30분 짜리 영상 관람도 포함돼 있습니다. 일본 근대화 업적을 알리는 홍보 영상이겠지요. 

사실 한국과 관련된 부분, 즉 군함도와 강제징용 부분은 전시관의 가장 후반부 제3전시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 근대화의 역사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23개 시설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들으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군함도의 역사를 다르게 이해하게 될까요.
 
[취재설명서] "딴짓하면 퇴장" 군함도 전시관, 황당한 취재 지침 [사진 제공=산업유산정보센터]


마지막입니다.

10. 전시물을 파손하는 행위, 큰 소리 등으로 위압적 언동, 실력행사적인 행위 등을 강하게 금지한다.

13. 안내자의 인솔,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또는 안내자가 전시물 내용을 설명하고 있을 때, 개인적으로 말을 하거나, 불규칙 발언을 할 경우, 안내자에게 논쟁을 거는 경우 등엔, 센터 측이 시설관리권에 기반해 즉시 퇴장을 명령할 수 있음을 이해한다.


위 조항은, 기자들을 거의 폭도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취재현장에서 전시물을 파손하거나 큰 소리로 위압적 언동, 실력행사를 하는 기자는 없습니다. 저는 간혹 우익집회에서 큰 소리의 위압적 언동을 접한 적은 있습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듣지 않고 '딴 짓'을 한다고 퇴장시킨다는 것 역시, 어떤 전시관이나 박물관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강압적인 조항입니다.

이런 서약서까지 써야 취재를 허가해준다는 건, 한국 언론사를 상당히 불신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언론 사전 공개 때도 사진촬영 금지

사실 지난 14일 언론사들에 처음으로 취재를 허가했을 때도 센터 측은 비슷한 자세였습니다. 처음엔 JTBC 같은 외신의 취재는 받아주지 않았고, 특파원협회를 통해 겨우 3개사가 대표로 취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사진이나 영상 촬영은 허용하지 않았고, 센터 측이 사진 몇 장만 제공했을 뿐입니다.  또 센터와 정부 관계자들이 기자들 동선을 일일이 체크하고, 조금이라도 설명을 듣지 않거나 다른 곳을 보거나 하면 "왜 그러십니까"라며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취재설명서] "딴짓하면 퇴장" 군함도 전시관, 황당한 취재 지침 [사진 제공=산업유산정보센터]


◇약속을 헌신짝처럼…180도 태도 바꾼 일본

일본 정부는 "약속을 잘 지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당시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 가혹한 조건 하에서 노동했다는 점을 알리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한 걸 말합니다.

22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지금까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와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일본 정부가)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 왔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14일 도쿄 특파원단의 대표 취재 등을 종합해보면, 약속을 헌신짝처럼 여긴 것은 일본 정부입니다. 전시관엔 "한국인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워해줬다"라는 군함도 주민의 증언이 영상으로 무한 반복되고 있고, 대만 출신 노동자가 받았다는 월급 봉투가 전시돼 있습니다.

또 일본 정부가 발령했던 징용령이 게재돼있는데, 이는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이 모집이나 알선 등 자발적 의지로 징용됐다는 걸 주장하려는 걸로 보여집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원문을 전시한 것도, 징용 노동자들에게 금전적 배상을 모두 끝냈다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로 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떳떳하게 공개 못할 이유 뭔가

센터 오픈을 굳이 3월 31일에 강행한 것도 "(회계연도) 2019년까지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군함도와 메이지 근대 유산에서 1200km 나 떨어진 도쿄에 센터를 개관한 것 자체가, 처음부터 약속을 제대로 지킬 의지가 없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전시관의 관람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떳떳하게 운용하면 될 일입니다. 비판이 합리적이라면 겸허하게 수용하면 되고, 아니라면 반론을 하면 됩니다.

전시관 측은 당당하게 취재를 허용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아닌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취재를 지금보다 자유롭게 허용할 때까지,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취재는 당분간 보류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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