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1980년 5월, 많은 광주의 부모들이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어느덧 39년이 흘렀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못했습니다. 피해자와 가족들을 모욕하는 망언에는 가슴이 또 한번 찢어진다고도 했습니다.
김지성 기자입니다.
[기자]
사진 속 막내 아들은 앳된 소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1980년 5월 고등학교 1학년이던 고 안종필 열사는 시민군이 되어 전남도청을 지켰습니다.
[이정님/고 안종필 열사 어머니 : (아들을) 못 나가게 하려고 (옷을) 물에다가 다 집어넣어 버렸는데 교련복을 입고 또 나간 거예요 도청으로.]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진입을 시도한 계엄군의 총탄에 안씨는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고 장재철 열사, 운전을 배워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던 의젓한 큰 아들이었습니다.
23살 청년이던 장씨는 다친 시민들을 병원으로 옮기다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김점례/고 장재철 열사 어머니 : 가운을 탁 걷었어. 집에서 입고 간 옷이여. 그런데 얼굴은 못 알아보고.]
5·18 망언은 가족들의 상처를 더 아프게 팝니다.
[임근단/고 김경철 열사 어머니 : (우리를) 괴물 집단이라고 할 때, 폭도 놈이라고 했을 때도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39년의 세월이 흘러도 자식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습니다.
[이정님/고 안종필 열사 어머니 : 하루도 널 잊은 날이 없고 엄마는 날마다 너 생각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