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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 국제사회 호소…김복동 할머니 별세

입력 2019-01-29 20:43 수정 2019-01-29 22:49

일본 사과받지 못한 채…"끝까지 싸워달라"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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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과받지 못한 채…"끝까지 싸워달라" 유언

[앵커]

국제 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혔던 김복동 할머니가 어젯밤(28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끝내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한 김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습니다.

최규진 기자입니다.
 

[기자]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14살 소녀는 1940년 일본군에 위안부로 납치됐습니다.

중국과 홍콩, 싱가포르 등을 끌려다니다가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92년 고 김복동 할머니는 40년간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세상에 처음 꺼냈습니다.

[고 김복동 할머니/영화 '낮은 목소리 2' 中 (1997) : 내 우리 엄마하고 큰형한테만 내 얘기를 했지. 이런 일로 당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 이거야. 그러고 나보고 거짓말을 한대.]

1993년 빈 세계인권대회를 시작으로 세계를 돌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렸습니다.

유엔 인권위원회와 국제전범재판에 출석해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을 찾아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고 김복동 할머니 (2013년 8월 14일 수요집회) : 일본 정부는 사죄하라!]

2016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두고서는 피해자들의 뜻을 반영하지 않았다며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고 김복동 할머니 (2016년 5월 31일) : 되지도 않는 돈 몇 푼 받으려고 싸우고 있는 건 아닙니다.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배상을 해야지.]

김 할머니는 본인의 아픔조차 나눔으로 베풀었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재일동포 등에게 기부하고 동일본 대지진 때에는 성금을 보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할머니는 항상 희망을 갖고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고 김복동 할머니 (2018년 11월 28일) :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내 뒤를 따라. 희망을 잡고 삽시다.]

몇 년동안 암과 싸워 온 할머니는 이달 초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바뀌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것 같았습니다.

[고 김복동 할머니 (2018년 5월 8일 어버이날) :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그것도 병마로. 굉장하게 아픈 병마가 있네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 달라. 나를 대신해 재일조선 학교 아이들 지원도 끝까지 해 달라.

- 고 김복동 할머니 유언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할머니는 일본 정부를 향한 강한 분노와 당부의 말을 남겼습니다.

평생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바랐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화면제공 : 최은영 샌드아트 디렉터·고 김복동 할머니 그림(나눔의 집 제공)·미국 하와이대학교·정의기억연대)
(영상디자인 : 이지원)
 

기획위안부 '피해자'|기억과 기록

할머니들의 말씀과 모습을 함께 기억하고 기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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