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아티클 바로가기 프로그램 목록 바로가기

[앵커브리핑] '그런데 50여년 후에도 그럽니까, 거기는?'

입력 2017-12-27 21:43 수정 2017-12-27 22:08
크게 작게 프린트 메일
URL 줄이기 페이스북 트위터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964년의 초여름. 저는 제가 살던 서울 필동의 대한극장 앞 네거리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 나이로 아홉 살. 제 앞에서 벌어진 풍경은 연기 자욱한 최루탄과 돌팔매질을 하던 대학생들, 그해 6월 3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6·3 항쟁의 시작이었지요.

아시는 것처럼 6·3은 당시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 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한 운동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고, 청구권 문제 등에서 한국 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국가 재건에 필요한 돈을 일본으로부터 하루속히 받아낸다는 명분으로 한일 협정을 밀어붙였습니다.

사실 이 한일 기본조약의 태동은 그보다 2년 전인 1962년, 그러니까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해, 즉, 공화당 정권이 탄생하기도 전에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 간에 밀실협의에서 나온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의 얼개가 그곳에 이미 들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과거사와 관련된 한일 관계의 모든 불협화음은 바로 그 메모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러나 당시 한일 협정은 언론에 의해 정당화되었고,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영웅담처럼 미화되고는 했습니다.

"36세의 김종필이 만난 청구권 협상 상대는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 52세의 노련한 정치인. JP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두견새를 함께 달래서 울려보자"고 했다. 오히라는 "그 고사를 어떻게 아느냐"고 감탄했다…" (2015년 5월 1일 중앙일보/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결국 김종필은 이렇게 결심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완용이 되겠다"

지금부터는 그로부터 반세기도 훨씬 더 넘겨서 나타난 데자뷔입니다.

대통령은 아버지에서 딸로 바뀌었고, 협상의 주인공은 역시 정보기관장인 이병기 국정원장과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

성노예 표현 불가, 소녀상 철거에 협조, 10억 엔의 위로금, 그리고 결국 위안부 문제의 불가역적 해결… 밀실 협상의 결과였습니다.

53년 전 자신의 집을 찾아온 김종필을 맞이하기 위해 기모노 바람으로 뛰어나왔다는 자민당 부총재를 흉내 낼 필요도 없이 일본은 조급증에 젖은 한국 외교를 상대로 또 한 번 승리를 거둔 것일까…

그 옛날 6·3항쟁의 최루탄과 돌팔매 시위의 한 가운데에 멋모르고 서 있었던 아홉 살의 소년이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50여 년 후에도 그럽니까, 거기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으면 뭔가 많이 변했겠죠?"

오늘(27일)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사족입니다.

저는 2008년에 일본의 방위대신이었던 이시바 시게루와 인터뷰한 바 있습니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 내내 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일까…. 저는, 그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관련기사

JTBC 핫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