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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번 이상훈, 스포츠미디어에 대해 말하다

입력 2016-09-26 07:02 수정 2016-09-2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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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마. 이 단어를 들으면 LG 팬들의 가슴은 설렌다.

이상훈(45) LG 피칭아카데미 원장의 별명이다. 현역 시절 갈기 같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마운드에서 전력 피칭을 했다. 그는 미디어가 가장 사랑한 프로야구 선수기도 했다. 한 방송사 PD는 "메이저리그와 비교할 때 한국 선수들은 너무 점잖다. 방송은 색깔 있는 캐릭터를 원한다"고 했다. 지금은 중계 일선에선 잠시 물러난 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선수는 현역 시절의 이상훈이었다.

많은 야구팬들은 그의 역동적인 투구 폼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와 행동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원장은 자신에 대한 수식어와 이미지에 그저 "남들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했다. "원래 평가는 남의 몫"이라 말했다.

이상훈은 또 미디어와 불화했던 선수기도 했다. 할 말은 했다. 야구인, 그리고 직업인으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에선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는 미디어가 가진 힘을 높게 생각했다. 그래서 미디어가 더 엄격해지길 원했다고 한다. 예의와 진심을 갖추길 바랐다.

프로야구는 그라운드에서 뛰는 이들 외에 모기업과 스폰서, 관련 산업, 미디어가 뒤얽힌 하나의 세계다. 이 세계 한 구성원인 이 코치에게 스포츠미디어에 대한 생각을 가감 없이 들었다. 미리 '총대를 매달라'는 부탁을 했다. 현역 시절 47번을 등에 새겼던 이상훈에게 창간 47주년을 맞은 일간스포츠가 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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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인 시절부터 이상훈은 미디어에 할 말은 하는 선수였다.

"본분에 충실하고 싶은 선수도 있다. 선수에게 인터뷰는 의무가 아니다. 하지만 기자는 팬들의 관심을 충족시켜 주는 게 업이다. 그 점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마 위에 생선이 돼 '난도질'당할 마음의 준비도 했다. 다만 기본적인 예의와 틀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인 시절(1993년) 일이다. 대전에서 빙그레(현 한화)와 시범 경기를 치렀다. 경기 뒤 홍보팀 직원에 이끌려 인터뷰를 하러 갔다. 일간스포츠 기자였다. 물론 처음 봤다. 반말은 기본이었다. 불손한 자세와 말투였다. 인터뷰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까웠다. 기자가 아니라 투수코치와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성인이니 반말하지 말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날 당연히 내 기사에 좋은 내용은 없었다."

- 첫 단추가 잘못 꿰인 것 같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오해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주관이 있고, 기자도 직업관과 업무 관행이 있지 않나. 하지만 선수를 우습게 보는 분위기에서 '내 진짜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을까. 내가 확실하게 얘기를 해야, 한 명이라도 그런 대우를 받는 선수가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다."

- 인터뷰에 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등이 있던 기자들에게 종종 물었다. '전 국민이 보는 신문에 자신의 이야기가 실린 적 있는가'라고. 반대 입장으로 생각해 보라는 의미였다. 내가 걸어온 삶은 고작 몇 분 동안 대화를 나눈 남의 손에 쓰여진다. 기자의 추측이나 선입견이 반영되는 글이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대충하지 않았다. 사전에 질문을 받아 맥락을 파악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준비했다. 집중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진 촬영도 거절하곤 했다. 유난 떠는 게 아니다.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있도록 서로 잘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 인터뷰에서도 이 코치는 사진 촬영을 사양했다. 대신 휴대전화에 있던 사진을 제공했다.)

- '동업자 정신'이 필요하다는 의미인가.

"현역 시절 기사 내용에 불만을 가져 본 적은 거의 없다. 때로는 사전 합의 없이 먼저 보도가 되기도 했고, 기사에 왜곡도 있었다. 하지만 이해했다. 그래야만 다른 매체와 차별될 테니까.
야구로 치환하면 남들이 안 던지는 구종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 인정했다. 남과 다른 문구나 개성 있는 글을 쓰는 기자는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불편한 관계에 있던 기자 중에 그 능력을 인정한 기자가 있었다. 당연히 비난 섞인 내용이라도, 사실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미디어는 그런 노력을 얼마나 했을까. 인터뷰에 인색한 선수에 대해 '왜 그럴까'라고 의문을 가져 본 적 있는가. 관계를 개선하고, 오해를 풀고 진솔한 얘기를 하려는 시도를 얼마나 해봤느냐고 묻고 싶다. 내 생각에는 충분한 노력 없이 선수의 인성을 규정짓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많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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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이상훈이 인터뷰어가 됐다. 지난 2009년 일간스포츠와 '이상훈의 네버엔딩 스토리'를 진행했다.

"과정을 경험하고 싶었다. 좋은 내용, 참신한 얘깃거리를 뽑아내야겠다는 강박은 없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뛸 때 인연을 맺은 기자가 제의했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에 왈가왈부 없이 했다. 항상 인터뷰를 요청받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반대가 됐다. 스포츠계와 연예계를 가리지 않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섭외하려 했다. 유명하지 않아도 '자기 것'이 확실한 사람과 얘기하고 싶었다. 배우 진구가 대표적이다. 직접 섭외를 하다 보니까 과거 하찮은 인연까지 끄집어내 읍소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미디어의 입장이 돼 봤다."

-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에피소드라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할까. 한 방송사와 진행한 '이상훈의 MLB the city' 촬영차 미국에 갔다. 그 사이 '네버엔딩스토리'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기사는 나가야 했다. 그래서 당시 담당자들과 상의해 전과 다른 방식을 내세웠다.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던 박찬호, 추신수와 만난 뒤 내가 느낀 점을 기사로 내보냈다. 직접 사진을 찍어 현장감을 담기도 했다."

- 질문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나.

"'형식적인 질문'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하니까. 하지만 이전 기사를 검색해 만든 질문지라면 이미 다 나온 얘기가 아니겠는가. 인터뷰를 하는 입장에서 같은 얘기를 또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질문'이다. 나는 질문을 3개 정도 한 뒤, 말 그대로 '대화'를 했다. 상대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현역 시절에 그런 인터뷰가 좋았다."

- 재미는 있었나.

"그동안 했던 일이 아니었다. 한두 번 해서 재밌는 게 얼마나 되겠나. 시간이 지나서 얘깃거리가 생긴 건 의미가 있다. 지금 다시 한다면 다른 재미를 찾을 순 있겠다."

- 미디어는 어떤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나.

"'100%'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줘야 한다는 것. 사람과 현상을 세상에 올리고 내리는 게 언론이다. 그것만으로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바이라인의 무게감을 아는 기자는 그래도 선수들이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얘기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기사를 준비해야 한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그저 오래 찍고, 길게 내보내면 '휴먼 다큐멘터리'가 될까?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전해지는 게 전부가 아닐 때도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시간을 들여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 인터뷰를 통해 가장 하고 싶은 말인 것 같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나는 LG 트윈스 소속이다. 당신은 일간스포츠 기자다. 소속 조직의 '대표'라고 생각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 지위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회사 로고를 붙이고 다니는 차가 난폭 운전을 하면 어떻겠나. 호텔에선 객실 안내원이 첫인상을 좌우한다. 스포츠단도 마찬가지다. 선수 한 명이 물의를 일으키면 그와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비난을 받는다. 일에 관해서라면 책임감을 더 가져야 한다."

- 47주년을 맞은 일간스포츠에 축하 인사를 건넨다면.

"강산이 다섯 번 변하는 동안 한 자리를 지켜 왔다. 그런 매체가 나에게 의미를 둬서 고맙다. 그저 47번을 달고 운동했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일간스포츠가 손 편지 같은 신문이 되길 바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손 편지를 받으면 고마운 마음을 넘어 감동을 받는다. 그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길 바란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기사가 아니라. 지탄도 받았지만 현역 시절 마음을 나눈 기자들은 대부분은 팀장, 국장이 돼 아직도 있더라. 보면 기분이 좋다. 일간스포츠는 기와집 같다. 올드한 이미지도 있다. 나쁜 게 아니다. 정성껏 손으로 쌓아 올린 신문사다. 변화의 바람 속에 흔들릴 때도 있겠지만 손때를 묻혀 가며 버텨 내길 바란다."

이천=안희수 기자 An.heesoo@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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