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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신해철, '살고 싶어했던 마왕의' 마지막 인터뷰

입력 2015-10-2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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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30일. 고(故) 신해철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신해철은 6년만에 컴백을 앞두고 있었고, 난 네이버와 스타타임라인이란 인터뷰 코너를 진행 중이었다. 그 주의 인터뷰이는 신해철이었고, 그를 만나러 강남의 한 카페를 찾아갔다.

제 시간에 신해철이 나타났다. 강남에 나타난 연예인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의 평범한 옷차림. 그리고 생각보다 살이 찐 모습. 가장 놀라웠던 건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고, 승용차가 아닌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점이었다.

그는 컴백을 위해 운동을 하며 열심히 살을 빼고 있었다. 살을 빼고 다시 한 번 대중 앞에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6년 만의 컴백이라 뭔가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가득했고, 이후의 음악 인생에 대한 큰 그림도 그려놓은 상태였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보였고, 지나온 세월에 대한 아쉬움 같은건 보이지 않았다.

카리스마가 넘쳤고, 가정을 지키고 싶어했으며, 다시 살을 빼고 멋진 음악을 들고 나와 팬들을 놀래켜 주고 싶었했다. 그 때는 '마왕' 신해철과 나와의 인연은 이제 시작인 줄 알았다. 달변가에 이끌려 참 즐거운 인터뷰였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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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신해철의 음악 시계가 6년 전 멈춰 섰다. 누군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신념을 잃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신해철이 과거과 같이 질 좋은 음악을 더 이상 만들지 못한다'고 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앨범을 발표했고, 매 앨범 실험적인 음악으로 대중을 자극한 ‘마왕’의 실종은 가요계에도 큰 손실이었다. 실제로 신해철은 그 시기 비슷한 고민들을 했다. "내 노래가 세상에 더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타의로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신해철의 얼굴에 더 이상 어두운 그늘은 없다. 오히려 천진해 보일 정도로 밝고 활기가 넘쳤다. 그는 "데뷔 이후 가장 즐겁게 음악을 하고 있다"고 했고, "생활패턴부터 사고방식까지 근본적인 것부터 변화가 있었다"고도 했다. 신해철은 6년이란 시간동안 온전히 음악과 가족에만 집중했다. 근본적인 고민을 지운 것은 역시 가족의 힘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 최근 한 집에 모신 부모는 새로운 음악적 동력이었다.

새로운 음악 챕터를 연 신해철의 신작은 '리부트 마이셀프 파트1'으로 이름을 달았다. '마이셀프'는 신해철이 1991년에 발표한 솔로 2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46세 신해철이 자신을 '리부트'하면서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주 스타 타임라인의 주인공은 6년 만에 대중 곁으로 돌아온 ‘마왕’ 신해철이다. ‘6년 간의 마왕 실종 사태’의 이유와 현재의 신해철을 알아보고자 시계추를 과거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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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아마추어에서 프로페셔널로 ‘무한궤도와 대학가요제’

-천재 뮤지션 신해철의 음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5세때 부터죠. 당시 어머니가 누나는 피아니스트가 됐으면 했어요. 집안 형편이 썩 좋지 못할 때인데도 무려 대학 교수님에게 레슨을 부탁했을 정도니까요. 누나를 따라서 레슨을 갔는데 교수님이 엄마를 호출했어요. '얘도 피아니스트를 만들거냐'고 물었다더군요. 그 교수가 '난 그럴 능력이 없다'고 했대요. 보통 소질있는 친구들은 바이엘 1번을 치다가 70번으로 점프도 뛰곤 하는데 전 30번을 치다가, 1번으로 돌아가고 그랬어요. 엉뚱했어요. 바이엘을 잘 치려면 손가락 움직임을 연습해야 하는데, 전 피아노를 연구하고 있었던 거죠. 어려서부터 앓았던 다한증도 악기 연주에는 치명적이었어요."

-그래도 음악에는 관심이 많았죠.

"중학교 때부터는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찾는 거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밴드를 시작했죠. 강북에 사는 아이들에게 악기는 귀했거든요. 보통 악기 파트를 입으로 불면서 맞춰보는게 전부였죠. 고등학교 때는 우리 밴드가 강북에서 꽤 유명해졌어요. 따라다니는 여학생까지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음악만 팠는데도 서강대 철학과에 입학했어요.

"초치기였죠. 그 땐 사지선다형이었거든요. 제 별명이 '강북의 찍신'이었으니 말 다한거죠. 아슬아슬하게 들어갔지만 수업에는 잘 나가지 않아서 졸업은 못했어요. 몇해 전에 총장과 부총장님이 명예졸업장을 준다고 하시는데, 양복입고 가서 정중하게 거절하고 왔어요. 제가 명예졸업장을 받았다고 하면 씁쓸해 할 분들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대학가요제 때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가왕’ 조용필 씨였어요.

"조용필 형님도 계셨고, 위대한 탄생 형님들도 계셨죠. 용필 형님이 제게 대상을 준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시는데 위대한 탄생 형님들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 심사할 때는 듣지도 않고 졸았다더군요. 하하. 대상을 타기는 했지만 확 뜨지는 못했어요. 이미 대학가요제가 '끝물'을 탈 때였거든요. 초반의 전통 같은 건 사라졌고요. 저희 밴드가 참가번호 16번이었는데, 우리 앞 열 다섯 팀은 전부 발라드를 불렀어요. 대중 가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뒤였던 거죠. 대회 후에도 우리 밴드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어요."

-당시에 불렀던 '그대에게'는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어요

"당시에는 그렇게 히트하지 못했어요. 당시 노래 판권이 대학가요제에 귀속돼 매니저는 ‘돈도 안되는데 부를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그럼 언제부터 빛을 보기 시작한 건가요.

"90년대 중반쯤엔 지방 대학 행사를 가면, 응원곡이 돼 있었고요. 언젠가는 그 노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서 일부러 몇년간 부르지 않기도 했을 정도였죠. 제겐 저작권을 주는 대단한 효자이고, 대표곡인 것이죠. 19살 때 처음 쓴 곡이고, 지금까지 레코딩만 5번을 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젠 대중들의 곡이라고 생각해요. 제 의중과는 상관없이 자기 생명력을 갖고 가는거죠. '프로 뮤지션이 뭐냐'라는 질문에 이 곡으로 설명해요. '허세부리지 마라. 기교를 배워도 그게 음악의 중심은 아니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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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은 록밴드 넥스트의 탄생

-대상을 받은 뒤에도 무한궤도로 활동하지는 못했어요.

"우승을 하고 한 달 사이에 매니저 몇십명을 만났지만 결국 '솔로 데뷔'를 권유했어요. 밴드 얘기만 꺼내면 바로 거절당했고요. 한 번은 방송국에서 용필이 형을 만났는데, 제가 딱했는지 자신의 전 매니저를 소개시켜주더라고요. 당연히 도장은 찍었지만 밴드를 유지할 방법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 친구들이 학교로 돌아가면 난 프로들을 만나서 밴드를 구성해야 하는데 저처럼 반 아마추어인 사람이 밴드를 모으는게 쉽지는 않더군요. 대신 솔로 앨범 2장을 내면서 프로와의 교분을 만들었어요."

-당시에 솔로 앨범이 대박이 났어요.

"첫 번째 앨범보다 두 번째 '마이셀프' 앨범이 더 잘됐어요. 근데 발라드 가수는 앨범이 잘 돼도, 얼마 뒤에 다른 어린 가수로 대체되는 기간이 굉장히 빨랐어요. 매니저들은 '이렇게 내려가는 거다. 지금 빨리 밤무대를 뛰어야한다'고 그랬고요. 그때 갑자기 '재즈 카페'가 터지면서 살아나기 시작한거죠. 인기가 오르락내리락 하는걸 보면서 인기 하나만 보고 사는게 얼마나 비참한지 깨달았어요. 인기가 떨어지기 전에 밴드를 하자고 생각했죠."

-그렇게 넥스트가 탄생했군요.

"회사에서는 '나 가수 안해'라고 자빠지는 거 보단 낫다고 판단한거죠. 넥스트 1기는 이동규•정기송과 셋이 했어요."

-넥스트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요.

"2집 '날아라 병아리'를 발표하고 김세황이 합류해 코엑스에서 공연을 하던 날이에요. 관객 전부가 기립하는 걸 본게 처음이었어요. 7000명이 꽉 들어찼는데 맨 앞줄부터 뒷줄까지 동시에 점프하는 거에요. 이런 얘기하면 정말 옛날 가수 같은데 그 땐 앞 두 줄만 자리에서 일어나도 뒤에서 안 보인다고 앉으라고 할 때니까요."

-대표적인 록밴드지만 '날아라 병아리' 같은 말랑한 곡들도 내놨어요.

"동료들이랑 치킨을 먹다가 이승환이 '플란다스의 개'를 발표한 소식을 들었어요. 그 때 제가 '세상에 낼게 없어서 개를 가지고 노랠 내냐'고 했거든요. 닭날개를 들고 '이게 웃긴거야. 이런 닭도 병아리 때는 애완동물이라고 좋아했을 거 아냐'라고 말하는 동시에 가사가 그려지더라고요. 어머니 얘기로는 어려서 키우던 병아리가 죽고 제가 일주일간 밥도 먹지 않고 말도 없었다고 해요. 은수저로 병아리 무덤에 십자가를 만들어줬고요. 저녁에 어머니가 나무젓가락으로 바꿔놓기는 했다지만요."

-중고등학교 시절에 넥스트의 음악을 들으면, 부모님에게 '왜 염세적인 음악을 듣냐'고 한 소리 듣곤 했어요.

"청소년기나 청년기의 부정적인 생각들, 시니컬하게 보고 기성세대를 깔보는게 없다면 세상 자체가 멸망할거라고 봐요. 특히 전 그런 유전자를 타고 난거 같아요."

-40대 중반의 신해철 역시 시니컬한가요.

"부정적으로 본 것을 바꿔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겠죠. 20살에 데뷔했고, 팬들 역시 또래의 친구들이 많았아요. 넥스트 시절의 시니컬한 음악들, 대부분이 자아실현이었죠. 팬들도 그랬고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요, 근데 ‘이건 아니다’라고 부정을 해도 그거에 대한 결론은 또 없었거든요. 이번에 발표한 '리부트 마이셀프 파트1'의 이야기부터는 그 때 했던 질문들의 대답이 될 거 같아요. 그 대답을 하기 위해 마흔여섯이란 나이가 필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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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미국에서 찾은 사랑, 일본에서 올린 결혼식

-결국 넥스트는 해체를 하게 돼요.

"라인업 안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해외 진출의 기회가 있었는데 멤버들이 거부한거죠. 라인업을 전원 교체하느냐, 밴드 이름 자체를 없애느냐의 기로에 있었는데, 멤버들에게 예우를 해주고 싶어서 밴드를 없애기로 결정했어요. 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죠. 회사에서는 '솔로 앨범 몇 장만 발표하면 집도 사고 편하게 살수 있는데 왜 유학을 가냐'고 한소리했고요."

-영국에는 4년 가까이 있었어요.

"해외에는 전지전능형 프로듀서들이 있어요. 아티스트 발굴부터 트레이닝, 믹스 테크놀로지까지 갖고 있는 분들이요. 전 제 음악 후반기에는 후배들을 프로듀싱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양현석•박진영처럼 제작자가 되는 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후배들의 기타 사운드를 만들어주는 역할 같은 거죠. 프로듀싱•엔지니어링•쇼비지니어스 마케팅 공부를 했어요. "

-유학을 마치고 비밀결혼식 이야기가 나왔어요.

"결혼식을 동경에서 하게 돼서 그랬어요. 결혼식을 하고 그날 라디오에서 공개했죠. 처갓집이 동경에 있어서 우리가 가는게 맞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결혼으로 요란 떨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당시 신부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어요.

"그 이야기가 레전드처럼 돼 버렸는데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굴 사랑하게 됐는데 그 사람이 아픈걸 어쩌겠어요. 당시 영국에서 유학을 한 뒤 미국의 시스템과 비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뉴욕에 건너갔어요. 당시 와이프는 뉴욕에서 마무리 공부를 하고 동경의 지사로 옮기려던 찰나였는데 절 만났고요. 대륙과 대륙을 사이에 둔 연애가 시작된거죠. 장거리 연애를 하려니, 전화비도 많이 나오잖아요. 결혼할까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 때쯤,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죠."

-지금도 굉장히 행복하시죠.

"사실 신해철이 이혼 안하고 산다는게 가장 놀라운 근황 아니겠어요. 하하. 최근에는 와이프와 상의해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대가족을 이뤘어요. 부모님, 우리, 애들까지 3대가 모여 사는거죠. 장모님도 가까운 곳으로 모셨고요. 이젠 우리 부부가 원하던 궁극의 삶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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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고스트스테이션 ‘루저들의 진한 동질감’

-고스트스테이션의 인기가 굉장했어요.

"한국 사회에는 생각할 배경을 만들어주는 오빠•형이 부재했던거 같아요. 답답한 현실에 돌파구가 되기도 했고요. 우리 프로는 치기와 장난기로 그들과 놀아줬거든요. 그 프로그램에 제 생각을 뿌렸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거에요."

-그렇게 아낀 프로그램 여러 차례 방송사를 옮겼고, 결국은 문을 닫았죠.

"시스템과 굉장히 많은 충돌을 일으켰어요. 기존의 라디오 시장에 어떤 질서 같은게 있다면 우린 거기에 소속되지 않았어요. 제가 한 방송국과는 무보수로 계약을 하고, 대신 '고스트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을 갖겠다고 했죠. 다른 방송으로 이적할 때도 이름을 갖고 갈수 있었고요. 또 미운털이 박힌 이유가 되기도 했고요."

-마지막으로 방송을 접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나요.

"미디어의 사냥감이 돼 버렸다는 생각이었어요. 6년 잠복기 직전 상황이죠. 인격살해가 일어나더라고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한 이야기들이 기사화됐어요. 그 사람이 한 모든 이야기들이 보도된다는 건 그 사람 말의 가치가 0이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라디오에서 하는 자잘한 이야기를 다 끄집어 내면 처음엔 왜곡되고 그 다음엔 하지 않은 말이 등장하기 시작해요. 그 걸로 난도질을 당했고요. 씨엔블루 논쟁이 대표적이죠. 팬들과 채팅하는 창에서 '씨엔블루가 인디밴드면, 파리가 새다'라는 말을 했어요. 처음에는 정확한 보도가 나가더니, 어느 순간 '인디밴드'에서 '인디'가 빠지더라고요. 인격살해라고 생각했어요. 얼마 전 한 방송에서는 개그맨이 그 때 이야기를 또 꺼내더니 이번에는 씨엔블루에 FT아일랜드까지 붙여서 얘기하던데요."

-그래도 당시의 추억을 공유한 청취자들은 여전히 많이 있어요.

"소통의 보람이 있었죠. 한 번은 고스트스테이션의 식구라면 방 불을 껐다 켰다를 해보자고 했거든요. 굉장히 많은 아파트들이 나이트처럼 반짝반짝 거렸다고 해요. 라디오라는 게 DJ와 청취자 간 일대일 방송이잖아요. 근데 사연들을 듣다보면 '나 같은 생각을 하는 덜떨어진 루저들이 많이 있구나'라고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새벽 2시에 소속돼 있는 루저들 간의 동질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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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현재 그리고 내 음악

-신해철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떼놓을 수 없죠.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빠'하고는 정서가 다른 거 같아요. 전 그 분이 성공한 대통령이 될거라고는 기대한 적도 없어요. 카터처럼 현직에서는 욕을 먹어도 나이를 먹으면서 국민을 통합하는데 역할을 했으면 했어요. 퇴임 이후엔 버텨주기를 바랐는데 덜컥 세상을 떠났죠. 추모 공연에서 스테이지에 올라 울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무대에서 '노무현을 누가 죽였나. 내가 죽였다."고 했어요. 그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신념을 잃어버리고, 빨리 결과가 나오길 바랐던 사람들에게. 근데 아직까지도 그 말의 의미를 모르더라고요."

-넥스트도 곧 새 앨범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형식면에서 전과는 차이가 커요. 일단 넥스트 유나이티드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오케스트라 같은 개념이에요. 1진, 2진이 있고, 유스 오케스트라 형태의 어린 넥스트도 존재하고요. 밴드 멤버들도 유기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도 서태지 관련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 친구와 저는 보완 관계라고 생각해요. 가령 제가 먼저 어떤 주제로 발제를 하면 태지가 이어서 연구를 해 나가는 관계요. 우린 20대에 음악을 시작해서 중년이 돼도 음악하는 경험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세대라고 생각해요. 지난해부터 그런 중장년급 가수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언론에서도 그런 현상을 재미있게 봐주는 것 같고요."

-예전보다 음악을 들려주기 더 어려운 환경에 있어요.

"과거에는 숨소리만 담아서 녹음해도 팔리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신해철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하는 상황이고요. 그러면 당연히 과거보다 음악이 더 매끈하고 좋아야겠지요. 제 음악을 무조건 들어주던 시절에는 주위 동료들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음악을 하려고 했고요. 그런 힘들이 미약했을 때는 누가 들어도 신나고 좋은 음악, 근데 자세히 들어보면 뭔가가 더 있는 음악을 하려고 했고요. 음악의 신이 '지금 너의 음악적 파급력은 'D-'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문제를 낸거죠.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야되지 않겠어요."

-오랜 공백기 이후에 다시 음악을 시작했어요. 기분은 어떤가요.

"지금처럼 음악을 즐겁고 다이내믹하게 한 적이 없어요. 행복하게 음악을 하는 비결은 제가 행복하게 사는거라고 생각해요. 가족들이 나를 사랑하는 한, 내 음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요소는 없어요. 총각 때는 '만약 딸이 우리반에 나이키를 신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하면 표절도 하고 밤무대에도 나갈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근데 애를 키워보니까 돈이 절대적이지 않더라고요."

-공백기 전에 고민하던 문제들은 정리가 됐나요.

"결론을 내렸어요.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 뮤지션들은 불평을 많이 해요. '우리 대중은 사운드는 듣지 않고 멜로디와 가사만 중요시한다'는 거죠. 지금의 제 대답은 '그렇다면 좋은 멜로디를 만들어오라'는 거에요. 대중의 풍토에 대해 술 마시고 불평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일단은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불평을 하라는 거에요. 대중음악의 주인이 변덕스럽더라도 끝까지 맞춰보는 거에요. 그 와중에 30년을 버틴 놈이 나와야 우리의 음악신이 단단해지는 거죠."

엄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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