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 시즌을 마치면 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산골 오지로 간다. 이곳에 일명 '소나무 선생님'이라 불리는 소병진 선생이 있다. 민간요법에 능하고 기치료에 조예가 깊어 선수들의 지친 심신을 잘 치료해 준다.
소 선생이 워낙 노출을 꺼려 알음알음 아는 선수들만 모인다. 오장은(31·수원 삼성)을 비롯해 구자철(27·아우크스부르크), 김재성(23·서울 이랜드FC), 국가대표 박건하(46) 코치 등은 소 선생과 인연이 깊다. 이들이 주축이 돼 만든 '추캥(축구로 만드는 행복)'이라는 자선 축구 모임이 10년 이상 이어져 오고 있기도 하다.
2015년은 권창훈에게 잊지 못할 한해였다. 소속 팀은 물론 국가대표와 올림픽대표를 오가며 맹활약을 펼쳐 이름 석자를 확실히 알렸다. 그의 아버지 권상영(57)씨가 제과점을 하며 아들을 뒷바라지 한 사연이 알려져 '빵훈이'이라는 별명으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후유증도 있었다. K리그 35경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8경기, 국가대표 7경기, 올림픽대표 4경기, FA컵 1경기 등 공식 경기만 55차례 소화했다. 챔피언스리그와 A매치는 장거리 해외 원정도 있었다. '철각' 권창훈도 탈이 났다.
작년 11월 29일 전북 현대와 최종전을 마치고 왼쪽 무릎 염좌 부상을 당했다.
권창훈은 함양으로 향했다. 언론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미련없이 산으로 가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권상영씨는 "아무 방해도 없이 푹 쉬면서 몸을 회복했다"고 밝혔다. 권창훈 에이전트 월스포츠 최월규 사장은 "(권)창훈이는 몇 년 전부터 겨울 휴가를 내내 산에서만 보낸다"고 귀띔했다.
산의 기운을 받은 권창훈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했다.
최근 컨디션 난조로 고생하던 그는 17일(한국시간) AFC U-23 챔피언십 C조 2차전 예멘전에서 해트트릭을 작렬하며 한국의 5-0 대승을 이끌었다. 한국은 우즈베키스탄과 1차전(2-1 승)에 이어 2연승으로 이라크와 마지막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8강 진출을 확정했다.
◇부상 49일의 여정
2015년 승승장구하던 권창훈(22·수원 삼성)이 쓰러진 날은 11월 29일이다. 수원과 전북의 K리그 클래식 최종전 뒤 왼쪽 무릎 염좌 진단을 받았다. 그가 다시 선발로 나서기까지 꼬박 49일이 걸렸다. 17일 예멘과 AFC U-23 챔피언십 2차전이 부상 뒤 첫 선발 출전이었다.
권창훈이 부상을 당하자 가장 먼저 올림픽대표팀에 비상이 걸렸다.
'에이스' 권창훈이 빠진 올림픽팀은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리우 올림픽 출전권을 따기 위해서는 권창훈이 반드시 필요했다.
올림픽팀 신태용 감독은 무조건 휴식을 줬다. 12월 초 열린 제주도 서귀포 전지훈련에 권창훈을 소집하지 않았다. 12월 중순 울산에서 열린 2차 전지훈련 때는 불렀지만 역시 무리를 시키지는 않았다. 강도 높은 훈련에서 제외하고 재활에만 집중하도록 배려했다.
당시 울산에서 만난 권창훈은 "몸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아직 미세한 통증이 있어 팀 훈련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며 "통증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챔피언십 대회에 맞춰 몸을 끌어올리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비판의 중심에서
어느 정도 통증이 사라지자 신 감독은 평가전에 권창훈을 투입시켰다. 경기 감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
100% 컨디션이 아니니 당연히 경기력은 기대에 못 미쳤다. 지난 4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 7일 사우디아라비아와 평가전 모두 교체로 나섰지만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일부 팬들은 권창훈의 부상은 고려하지 않은 채 실망감을 나타냈다.
지난 14일 AFC U-23 챔피언십 C조 1차전 우즈베키스탄전에서도 후반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았지만 몸은 무거웠다. 평가전이 아닌 본선이라 비판의 강도는 더 강했다. "개인플레이가 심하다" "팀 전술에 안 맞는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에이스가 졸지에 팀에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됐다. 우즈베키스탄전 다음 날인 15일 인터뷰에서 권창훈은 "아쉬운 경기였다. 경기는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고 인정하면서도 "몸이 이제 90% 이상 올라왔다. 다음에는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 예멘전에서는 공격적인 모습으로 다득점을 하겠다"고 독기를 품었다.
◇해트트릭 새 역사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예멘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새 역사를 썼다. 올림픽 축구에 23세 이하 연령 제한이 도입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최종예선 이후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 선수가 해트트릭을 성공한 건 권창훈이 처음이다. 2014년 5월 올림픽 대표팀 출범 이후 첫 번째 해트트릭이고 이번 챔피언십에서도 처음 나온 기록이다. 권창훈은 단숨에 득점 1위로 올라섰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권창훈이 '왼발'이 아닌 '오른발'과 '헤딩'으로 3차례 그물을 흔들었다는 점이다. 권창훈은 워낙 왼발 킥이 날카로워 '제2의 고종수' '제2의 염기훈'으로 불린다. 오른발도 못지 않게 위력적이라는 사실을 국제 무대에서 확실하게 입증했다.
그는 경기 뒤 인터뷰에서 "부상당하고 첫 풀타임이었는데 체력적으로 크게 무리가 안 와 다행이다. 앞으로 더 좋은 경기력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사실 권창훈이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알게 모르게 속앓이도 했다. 권상영씨는 "오늘 새벽 아들의 경기를 보며 어느 때보다 조마조마했다.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인다"며 그 동안의 마음고생을 내비쳤다.
신태용 감독도 "솔직히 골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3골이나 넣었다. 창훈이가 심리적인 부담을 훌훌 털어냈을 것이다"고 만족감을 내비쳤다.
더 기대가 되는 건 권창훈의 컨디션이 아직 100%가 아니라는 점이다. 신 감독은 "사실 오늘은 권창훈의 8강 리허설이었다. 몸이 90% 정도 올라왔다고 해서 풀타임을 뛰게 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다"고 미소지었다.
한국은 일찌감치 조별리그 통과를 결정지었다. 리우 올림픽 출전권을 따기 위해서는 8강 이후 토너먼트 경기가 더욱 중요하다.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한 권창훈이 있기에 신태용팀은 어떤 상대도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