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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의 에떠 러시아] '대표팀 보려고'… 선수 이름 예습하고 어깨동무 '아리랑'까지

입력 2018-06-1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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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로모노소프 스파르타크 경기장에서 열린 팬 공개훈련에서 문선민과 선수들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연합뉴스 제공

"선수들 이름은 다 모르죠, 내가 아는 건 저기 김남일 선수랑 차두리 선수 뿐인데 이렇게 코치로 보니까 또 색다르네."
"여기까지 버스타고 1시간 30분 달려오면서 예습했어요. 선수들 23명 명단 뽑아서 버스에서 외웠어. 어려우니까 막내는 누구, 최연장자는 누구…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이렇게 국가대표 선수들 축구하는 거 볼 일이 또 있나요."

'대한민국 국가대표'. 굳이 등번호와 이름, 포지션과 포메이션을 달달 외우지 않더라도 선수들이 입은 붉은 색 유니폼과 가슴팍의 태극마크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이름이다. 지구촌 시대가 도래하면서 내셔널리즘이 점점 퇴색되고, 애국심 하나를 앞세워 축구를 보기엔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내 나라 우리 팀'은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역만리 타국에 사는 교민들에겐 특히나 더 그렇다.

신태용(49)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러시아에 입성해 처음으로 훈련에 나선 13일(한국시간), 대표팀의 훈련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로모노소프 지역의 스파르타크 스타디움 스탠드에 붉은 악마 티셔츠와 머플러, 태극기로 중무장한 50명의 교민들이 등장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의 카잔 성당에서 약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이들은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경기장을 방불케하는 열띤 응원으로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날 훈련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지정, 경기 전마다 각 대표팀이 의무적으로 시행해야하는 '오픈 트레이닝 데이'로 진행됐다. 한국의 오픈 트레이닝 데이에는 총 250장의 티켓이 발행됐고 대부분의 자리를 러시아 축구팬들이 차지했다. 주로 로모노소프 지역의 유소년 축구팀 코치와 선수들, 근교의 축구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중 '미니 붉은 악마'로 나선 50명의 교민들은 단연 눈에 띄었다.

스탠드에 모여앉은 교민들은 각자 태극기와 응원용 머플러를 펼쳐들고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봤다. 손흥민(26·토트넘) 기성용(29·스완지 시티) 구자철(29·아우크스부르크) 등 인기 스타들이 러닝하며 스탠드 앞을 지나갈 땐 환호성도 터졌다. 이어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한 청년이 나와 본격적인 응원을 이끌었다. 흡사 경기 때 서포터들이 외치듯이 23명 선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연호한 뒤 교민들을 일으켜 어깨동무를 하고 '아리랑' 노래도 함께 불렀다. 모자, 연인, 사장님과 러시아 현지인 직원 등 다양한 구성원의 교민들이 서로 어깨를 감싼 채 방방 뛰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부르는 모습에 러시아 현지 축구팬들도 어깨를 들썩였다.



사실 이날 교민들의 단체 응원은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회의 원래 계획은 전날 대표팀이 입성해 베이스 캠프 호텔에 짐을 풀 때 환영식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전 문제를 우려한 FIFA의 권고로 당초 호텔 외부에서 진행하려던 환영식이 실내에서 치러지면서, 대표팀을 보러 온 150여 명의 교민들은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미원(54)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회 회장은 "현지 교민들이 현대차의 도움으로 버스 3대를 대절해서 선수들 얼굴 보려고 환영식에 왔는데 못 보고 돌아가서 다들 아쉬워했다"며 "그래서 어젯밤 급하게 오픈 트레이닝 데이 참가 신청을 받았는데 3분 만에 50명 정원이 금세 찼다"고 귀띔했다.

대표팀을 보려고 먼 길을 달려오고, 붉은 옷을 꺼내 입고 땡볕에 서서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외쳤지만 이들이 모두 '열혈 축구팬'인 것은 아니다. 주재원인 남편을 만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가 오픈 트레이닝 데이에 참석해 열띤 응원을 펼친 한 여성은 "내가 아는 축구 선수 이름이래야 김남일, 차두리 뿐인데 저기서 코치를 하고 있다"며 웃었다. 다른 교민들 중에도 23명 선수들의 이름을 달달달 외우는 '열혈 축구팬'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타지에 살면서 월드컵이라는 큰 대회를 치르기 위해 이 땅을 찾은 국가대표를 보고 싶은 열망은 그 어느 '열혈 축구팬' 못지 않게 뜨거웠다.

[김희선의 에떠 러시아] '대표팀 보려고'… 선수 이름 예습하고 어깨동무 '아리랑'까지

이 회장은 "23명 선수 명단을 뽑아와서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나눠주고 '예습'을 했다"며 "밖에 나와 살다보면 선수들도 자주 바뀌고, 누가 누군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교민들끼리 '제일 어린 선수가 누구고, 제일 나이 많은 선수가 누구고' 하면서 공부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한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살다보니 잘 모르는 선수도 많은데, 혹시라도 사인이 한두 명에게 몰리면 선수들이 서운해할까봐 모든 선수들에게 골고루 사인을 받기로 미리 동선을 맞춰놓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민 수는 1300~1400여 명 정도 된다. 대체로 여행업, 관광업에 종사하는 교민들이 많고, 현대자동차 현지 직원들도 숫자가 꽤 되는 편이다. 이 회장은 "단기 연수생처럼 공식적으로 재외국민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면 숫자가 조금 더 늘어난다"며 "16년 동안 여기서 살면서 한인회에서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결속력도 뛰어난 편이지만 우리끼리 하는 행사와 월드컵이라는 큰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을 보는 건 기분이 아주 다르다. 목이 메이고, 본선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너무 자랑스럽다"고 벅찬 소감을 전했다.

아쉬운 건 대표팀의 조별리그 3경기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웨덴전이 열리는 니즈니노브고로드, 멕시코전이 열리는 로스토프, 그리고 독일전이 열리는 카잔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교민들이 응원하기 위해 직접 찾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좀 있는 편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의 경기를 보고 싶다는 열정은 교민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회는 희망자 대상으로 버스를 대절해 경기 도시로 '원정 응원'을 펼치러 가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1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뉴페터호프호텔 앞에서 축구대표팀 숙소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현지 교민들이 대표팀이 도착하자 환호하고 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연합뉴스 제공


언제 어느 대회든, 외국에서 열리는 경기 때마다 현지 교민들은 대표팀을 뜨겁게 반긴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든, 마음 먹으면 볼 수 있는 '대표팀'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방인으로 타지에서 살아가는 교민들에게, 태극마크를 단 '대표팀'이란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표팀은 원래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나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사람들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 곧 대표팀의 의무이고 가치였으며,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두가 3전 전패의 비관적 미래를 예상하는 지금, 신태용호의 반전을 기대하는 이유도 여기있다. 우리는 여전히 한국 축구대표팀이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에떠 러시아(Это Россия)는 러시아어로 “이것이 러시아다”라는 뜻으로, 일간스포츠가 2018 러시아 월드컵 현장에서 만난 생생한 소식들로 채워질 예정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김희선 기자 kim.heeseon@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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