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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매혈의 비릿한 기억…'동짓날 밤의 기차'

입력 2015-03-2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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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 2부의 문을 엽니다.

'꿀알바'

정신이 아득할 만큼의 힘든 노동이 아니라 쉽게, 그리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그야말로 꿀 같은 아르바이트 방법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 쉽게이지 자칫 몸을 축낼 수도 있는 알바가 있습니다. '매혈' 즉 임상시험을 위해 피를 뽑는다는군요. 아르바이트 꺼리를 찾지 못하거나 일거리 하나로는 견뎌내기 힘든 학생들이 이런 식의 꿀알바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비단 요즘의 얘기는 아닙니다.

지난 1955년 영등포공고 야간학부에 다니는 신동균이란 학생이 있었습니다. 고학생이었던 신군은 아버지 제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른바 매혈을 결심합니다. 혈액 1그램에 10환짜리. 혈액은행에 피를 파는 행렬에 동참했지요.

그러나 피를 팔아 돈을 쥔 신군은 결국 고향에 가지 못했습니다. 사후 처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인지 끝내 목숨을 잃게 된 겁니다.

당시 어려운 사정은 누구나 마찬가지여서 피를 팔아 생계를 이으려는 사람들이 혈액은행 앞에 장사진을 이룰 정도였다고 하지요.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쪼록꾼'입니다. 매혈을 일삼는 사람을 '쪼록꾼'이라고 불렀다는군요. 유리병 속에 피가 들어갈 때 나는 소리를 흉내낸 겁니다. 그러니 그 쪼록이란 의성어는 얼마나 가슴이 짠한 소리였을까요.

중국작가 위화의 작품 <허삼관 매혈기=""> 속에도 허삼관이라는 가난한 노동자가 가족을 위해 매혈. 즉 피를 팔아 돈을 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피를 판 날 허삼관은 식당을 찾아가 이렇게 주문합니다.

"볶은 돼지 간 한 접시와 황주 두 냥, 아, 황주는 따뜻하게 데워서."

가난한 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이들이 갖고 있는 비릿하고 아픈 추억일 겁니다.

앞서 1부 리포트에서 임상시험을 위해 피를 뽑는 학생들의 모습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그 시절 비릿한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되는 걸까요?

'투잡이 가능한 데다 보수가 높아 돈이 급할 때 한다'는 학생의 이야기는 나이 많은 세대의 마음을 부끄럽고 미안하게 합니다.

"밤 기차를 탄다 피를 팔아서 함박눈은 내리는데 피를 팔아서 뚝배기에 퍼담긴 순두부를 사먹고 어머님께 팥죽 한 그릇 쑤어 올리러 동짓날 밤 기차를 탄다 눈이 내린다"

시인 정호승의 '매혈' 중 한구절입니다.

물론 지금의 이른바 꿀알바와 그 옛날 처절했던 매혈기를 같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또 임상시험을 위해 피를 뽑는다는 요즘의 매혈이 예전의 매혈과 같을 수는 없겠죠.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정도가 차이가 난다고 한들 자신의 피를 돈과 바꿔야 하는 그 짠함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모두가 비슷하게 못살던 시대의 매혈보다 이렇게 100층 이상의 빌딩이 올라가는 시대의 매혈이 한결 더 애잔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정호승 시인이 탔던 동짓날 밤의 기차. 아직도 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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