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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00일' 아직도 가라앉은 진실…팽목항은 지금

입력 2017-01-09 20:34 수정 2017-01-1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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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세월호 참사로부터 1000일이 지났습니다. 기억하시겠습니다만, 참사 직후 저희들은 모두 여덟번에 걸쳐 바다에서 온 편지…. 즉, 아이들의 휴대폰에서 발견된 영상들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마지막 여덟번째 편지는 부모님과 친구에게 보내는 작별인사였지요. 사실 더 많은 편지들이 있었지만 그 편지 이후로는 차마 더 소개해드리기 어려웠습니다.

그 편지들은 하나같이 세월호의 진상을 알려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000일이 흐르도록 아이들이 보낸 편지에 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진상을 은폐하려는 청와대의 집요한 시도가 있었다는 단서가 포착됐고, 오늘(9일) 저희가 집중 보도해드릴 내용이기도 합니다.

서복현 기자는 참사 이후 100일 가까이 현장을 지켰던 기자이고, 오늘 다시 팽목항으로 가 있습니다. 팽목항 상황을 짚어보고 오늘 저희들이 단독으로 취재한 청와대의 은폐 시도 의혹을 집중 보도해드리겠습니다.

서복현 기자, 그곳은 많이 익숙한 곳이네요.

[기자]

제가 있는 곳은 팽목항에서 등대로 가는 길입니다. 팽목항에서 사고 해역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앵커]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은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바람은 늘 많이 부는 것 같은데요. 뒤에 노란 리본들이 나부끼는 걸 봐서도 현장 날씨를 알 수가 있는데, 리본에는 뭐라고 써 있습니까?

[기자]

'온전한 세월호 인양', 그리고 '미수습자를 가족 품으로'라는 글귀가 써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색이 바래져서 회색 빛이 도는 리본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건데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자리에 샛노란 리본들이 다시 채워져 있습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세월호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앵커]

팽목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몇 분 정도 계시나요?

[기자]

현재 세월호 가족 여섯 명 정도가 팽목항 컨테이너 박스에 머물고 있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앵커]

오늘 팽목항에서는 1000일을 맞아 행사도 열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다 떠난 것 같고요. 낮 상황은 어땠습니까?

[기자]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 날씨에서도 오후 4시쯤부터 촛불 붙이기, 공연, 연날리기 등의 행사가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행사가 모두 끝이 났고 적막함이 감돌고 있습니다.

[앵커]

오늘로 참사 1000일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혹은 남아 있고 9명이 아직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상황도 지난 2년 넘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건 어떤 걸까요?

[기자]

제가 3개월가량 취재를 하고 진도를 떠나면서 세월호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인사가 다시는 진도에서 만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000일이 지난 이 시간에도 가족들은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 12월 31일 다시 팽목항을 찾아 2015년 소망을 들었는데요, 바로 세월호 인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지금도 세월호는 찬 바닷속에서 인양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팽목항 현수막에는 유독 무섭다는 문구가 많습니다. '인양이 안 될까봐 무섭습니다', '가족을 못 찾을까봐 무섭습니다', '인양 작업 중 가족을 놓칠까봐 무섭습니다'

가족들은 무서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무려 1000일 동안이요.

[앵커]

서 기자는 세월호 구조 작업 때도 현장에서 취재를 했습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은 참사가 일어나고 시간이 좀 흐른 다음에 불거지기도 했지만요. 지금 최순실 국정개입 사건으로 7시간 의혹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당시 현장 상황에 비춰 7시간 의혹이 중요한 이유를 잠시 풀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자]

저는 세월호 참사 하루 뒤인 2014년 4월 17일에 내려왔는데요. 당시 에어포켓이 있다는 가정 아래 72시간의 골든타임이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경 매뉴얼엔 당시 수온 12도가량에서 6시간이 골든타임이었습니다. 저체온증 때문인데요.

오전 9시쯤 세월호 사고가 났으니 대략 오후 3시쯤이 골든타임이 끝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상 유일한 박 대통령의 행적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3시 20분쯤 머리 손질을 했다는 겁니다. 그 중요한 골든타임이 지나가는 시간에 대면보고, 또는 박 대통령 주재 회의 없이 그대로 지나갔고, 그 이후 머리손질을 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그마저도 지금까지 거의 유일하게 드러난 행적이고, 나머지 행적은 드러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앵커]

그 점 때문에 아마도 이럴 가능성이 높았다는 겁니다. 당시 현장에서 취재를 해서 알겠지만, 초기에 컨트롤 타워 부재 얘기가 계속 나왔잖아요? 그게 바로 어느 누구도 컨트롤타워가 될 수 없었던 상황, 청와대 상황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였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계속 나오지 않겠습니까?

[기자]

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유독 본부가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소방, 군, 해경, 그리고 진도에 사고대책본부, 서울에는 중앙재난대책본부가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혼선이 많이 빚어졌는데요. 만약 당시 청와대가 조율하는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조율의 문제, 컨트롤타워 부재 문제가 없었을 텐데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이 중요하고 주목받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이곳에 남아있는 세월호 가족들도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권오복/세월호 미수습자 가족 : 정부 대응은 없어요. 해수부에서 나가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가 있어요. 정부는 나 몰라라 해요. 세월호 특별법에 인양을 안 넣고 통과시키려던 사람들인데. 그래서 통과를 시켰잖아요. 인양만 했어도 우리가 왜 여기 있어요. 인양이란 단어를 넣으면 정부 책임이 되니까 굳이 뺀 거죠.]

[앵커]

청와대에선 내일, 그러니까 참사 1001일만인 내일 그날 7시간에 대해서 자료를 낸다고 했는데, 그건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진도 팽목항에 나가 있는 서복현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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