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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이브] "1920~30년대 청계천 '도시의 암종' 오명"

입력 2014-03-18 13:08 수정 2014-03-1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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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전우용 한양대학교 동아시아 문화연구소 교수

◇정관용-오늘 역사 라이브 한양대 동아시아 문화연구소 전우용 교수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전우용-안녕하세요.

◇정관용-청계천 복원 후에 걸어보셨어요?

◆전우용-여러 번 걸어봤죠.

◇정관용-어떤 분은 어쨌든 물 흐르니까 좋다는 분도 있고 이게 무슨 콘크리트 어항이냐는 분도 있고. 어느 쪽이셨어요?

◆전우용-좀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요. 2002년도에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님이 청계천 복원 구상을 밝히면서 관교와 수표교를 시민 여러분들께 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했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문화재 복원이라는 각도에서 접근하지 않고 임기 안에 그리고 정해진 제한된 예산 범위 안에서 공사를 하겠다고 하는 비문화재적 복원법을 쓰신 거죠. 그래서 결국 그 약속은 못 지켰던 것이고 그 상태로 일단 외형상 도심부에 물을 흐르게 하겠다고 하는 단기목표에만 집중하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청계천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거의 완전히 소멸된 채로.

◇정관용-지금 수표교는 어디에 있죠?

◆전우용-장충단공원에 있죠.

◇정관용-장충단공원에. 그걸 다시 옮겨놓겠다 했는데 못 옮겼군요.

◆전우용-그렇죠.

◇정관용-이번에 재복원하면서 그것도 한번 해 보겠다. 하지만 장기 프로젝트로 가는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될지 우선 천천히 지켜봐야 될 것 같고요, 그 문제는. 청계천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조선 시대에도 청계천이었습니까?

◆전우용-우리가 시냇물 그러는 건 도성 안에 흐르는 걸 시냇물이라고 하죠. 그런데 지금 이제 우리가 청계천이라고 불리는 이 시냇물이 아주 독특한 물이었어요. 두 가지인데요. 물의 형상하고 그다음에 성질에서 굉장히 좀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정관용-어떻게요?

◆전우용-아시다시피 한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죠. 그런데 청계천을 걸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반대 방향입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요. 한강의 지류인데. 이게 물의 방향이 서로 역방향이니까 이게 태극수라고 해서 명당수에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었다고 해요. 그런 점에서는 형상 자체가 서울을 수도로 만드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또 한 가지는 서울의 지형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왕, 낙타, 목멱 그다음에 백악산에 둘러싸여 있는 분지예요. 계곡이 많고요. 우리나라의 날씨가 비가 오면 한꺼번에 쏟아지거든요. 그러니까 요즘도 그런 일들이 가끔 나오는데 순식간에 물이 불어버리잖아요. 물의 성질이 굉장히 안 좋아요. 치수에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던 명당수라서 꼭 필요했던 물임에도 불구하고 치수에는 어려움을 겪었던 그런 물이었죠. 그래서 태종 때에 도성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치수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입니다. 그러니까 개천 양쪽에다가.

◇정관용-둑을 쌓고?

◆전우용-쌓고 그리고 좀 많이 휜 곳은 직선화하고 바닥도 좀 파고 이렇게 인공이 가해진 하천을 개천이라고 했어요. 개천이란 이제 하천을 판다, 이런 뜻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해서 인공으로 개척한 하천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두 가지 의미가 같이 사용됐기 때문에 조선 시대 내내 개천이라고만 불렸죠.

◇정관용-청계천이라는 이름은 없었군요. 보니까. 그러니까 자꾸 넘쳤나 봐요, 장마 때마다.

◆전우용-수시로 넘쳤고 그러다 보니까 개천 변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그런 땅이었던 셈이죠.

◇정관용-태종 때 공사를 한 이후로도 계속 넘쳤습니까?

◆전우용-태종 때 좀 많이 공사를 해서요. 상대적으로 안정화되기는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이후에도 세월이 흐르면서 둑이 무너진다거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는데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 거치고 나서 17세기, 18세기 지나면서 기후에도 문제가 변화가 생겼고 또 개천 상류부와 하류부 지형 또는 토지 이용방식 이런 것들에도 변화가 많이 생겼어요. 그러다 보니까 개천이 계속 쌓여서 영종 때가 되면 아예 교량 밑에 하천 바닥하고 맞붙을 정도가 돼서 하천 기능을 거의 수행할 수 없는 이런 정도로까지 망가졌죠.

◇정관용-그러면 망가진 상태로 놔뒀습니까, 아니면 영조가 어떻게 했습니까?

◆전우용-고민스러웠던 거죠. 비만 오면 넘치고 주변에 침수피해를 입고 하니까. 그런데 당시 토목기술이 불도저나 포크레인 같은 게 없을 때니까 말이죠.

◇정관용-다 손으로 해야죠.

◆전우용-그 한 10 몇 킬로미터 되는 구간의 폭을. 7, 8m 되는 폭을 다 파내려고 하면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이걸 공사를 하려면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야 되고 놔둬도 민폐고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 당시 신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기록을 보면 영조가 이걸 가지고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10 여년 동안 여론조사를 해요. 기회 있을 때마다 물어보는 거죠, 어떻게 하면 좋겠냐.

◇정관용-백성들한테?

◆전우용-그러니까 개천 가까운 데 사는 사람은 파줬으면 좋겠다고 할 테고 먼 데 사는 사람은 나는 관계없는데 내가 왜 돈을 내고 노동력을 내느냐, 이럴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과거 시험 문제까지 내서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 이런 걸 여러 차례 의견을 모으다가 결국은 여러 차례 모으다 보니까 의견이 10년 사이에 하나로 모아졌어요.

◇정관용-파자?

◆전우용-파자. 그러니까 백성들의 뜻이 모아졌으니 이제 하자. 그래서 준설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했던 거죠.

◇정관용-영조가 아주 민주적인 왕이라고 봐야 됩니까, 아니면 우유부단한 왕이라고 봐야 됩니까?

◆전우용-우유부단이라기보다는 결국 이건 누가 해야 되느냐면 백성들이 해야 될 일이에요. 노동력을 동원해야 될 것이고 사람도 내야 될 것이고 실제 공사 과정에서 노동력도 자발적으로 내고 돈도 백성들이 자발적 내서 공사를 한 겁니다.

◇정관용-민심을 모은 왕, 이렇게 봐야 되겠군요? 훌륭합니다. 그래서 그때 대대적인 공사를 다 해서 그 후로는 괜찮아졌나요?

◆전우용-처음에 공사를 했을 때는 파기만 했어요. 그런데 파고 나서 흙은 동대문 양쪽에다 쌓아놨었고요. 그리고 흡족해서 신하를 불러서 물었더니 아무래도 이것 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이게 계속 토사가 쓸려 내려와서 생기는 일이니까 정기적으로 준설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영조가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는 거예요. 영조 스스로는 자기가 거의 60년 정도 왕 노릇을 했는데 평생 3가지를 했다고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평생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첫째가 탕평이고 둘째가 군역이고. 군역의 균등화죠. 셋째가 준천이다. 탕평은 효과가 거의 없고 군역은 효과가 있을 듯 말 듯하고 그나마 효과를 본 게 준천인데 이것도 정기적으로 해야 되느냐, 그래서 많이 속이 상해했다고 합니다마는 그래도 방법이 없죠. 그래서 준천사라는 기관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준천을 하게하고 또 애초에 준천한 다음에 30년 지나서 양쪽 둑을 전부 석축으로 바꾸고 또 바닥에다가는 큰 묻어서 또 준천할 때 기준점을 만들고 그럴 정도로 신경을 썼어요.

◇정관용-제대로 했군요.

◆전우용-그래서 그 결과로 청계천은 조선 시대 또 동아시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하천 토목관리 기술의 정수가 돼 버렸던 거죠.

◇정관용-그렇군요. 자랑거리가 됐습니다, 이제. 그런데 그때까지도 이름은 개천이잖아요.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쓴 거예요?

◆전우용-상당히 재미있는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문화 현상인데요. 일본인들은 가만히 보면 건물에 무슨 현판 같은 걸 잘 안 붙여요. 대신 물에는 꼭 이름을 붙여요.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예요. 물에는 이름을 잘 안 붙였어요. 건물마다 무슨 당이니 무슨 각이니 하는 걸 항상 붙였는데 하천령이라고 하는 걸 일본인들이 제정을 하면서 조선에 이름 없는 하천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하나하나 이름을 붙일 때 그때 서울 도성 안을 흐르던 이 개천에도 상류 쪽에 청풍계라고 하는 곳이 발원지인데 그 이름을 따서 청계천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때부터 청계천이죠.

◇정관용-그럼 일제 시대부터 청계천이었던 거예요?

◆전우용-대략 1914, 5년경부터 그렇게 불리기 시작합니다.

◇정관용-상류의 청풍계라는 건 지금 어디예요?

◆전우용-백악산.

◇정관용-백악산. 그리고 일제 시대는 그러면 제대로 공사를 했기 때문에 범람하거나 이런 건 별로 없었겠네요.

◆전우용-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관용-그때도 범람했어요?

◆전우용-한국을 강점한 다음에 한 10년 동안 일본이 청계천을 방치를 해요.

◇정관용-방치.

◆전우용-그 이전까지 2, 3년에 한 차례씩 준설을 했는데 거의 방치를 해 뒀어요.

◇정관용-왜 그랬죠?

◆전우용-일단 그쪽이 일본인 거주지하고 좀 멀었던 데다. 일본인 거주지는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돈을 안 쓰겠다는 거였고요. 그랬다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마치고 조선총독부를 조선인 거주지, 즉 광화문 쪽으로 옮기기를 결정한 다음부터 1918년에 와서야 준설사업을 하죠. 그러면서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기적으로 준설을 하게 됩니다, 하게 되는데 궁극적인 해결책은 마련하지를 않죠. 더군다나 일제강점기 1920, 1930년대 되면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에서 벌어지는 폐기물의 종류가 달라지고 이러다 보니까 개천이 계속 더러워져요. 그래서 1920, 1930년대 되면 청계천에 별명이 생깁니다. 도시의 암종.

◇정관용-암종?

◆전우용-이건 실제로 통계를 보면 청계천 변에서 사는 사람들이 전염병 감염률이 훨씬 높아요. 더러운 물이 흐르는 것도 있고요.

◇정관용-그때만 해도 오수 차단시설 이런 거 없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전우용-없고 또 하나는 아무래도 위생관념이나 의식이 낮기 때문에 저쪽 왕십리 쪽에서 재배해서 수확한 이런 채소들을 청계천에 씻어서 그렇게 또 팔기도 했어요. 그런 걸 먹다 보니까 기생충 감염이라든가...

◇정관용-알겠습니다. 대개 도심 한복판에 흐르는 것이고 또 주변에 무슨 흔히 말하는 고수부지 같은 이런 것도 잘 없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더러워지고. 그러니까 청계천에서 빨리하고 목욕하고 하던 것은 아무래도 조선 시대 후기나 이때쯤일 것 같고요.

◆전우용-일제강점기에도 빨래소는 있었어요. 이게 번천이다 보니까 비가 오면 잠시 맑아져요. 비 온 직후에 빨래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이 됐죠.

◇정관용-그러니까 일제도 이걸 제대로 하려면 오수차단시설까지 다 해야 되는데 그것까지는 투자하기도 어렵고.

◆전우용-하려는 계획은 30년대 말쯤에 세워요. 양쪽으로 오수 차단은 빼고 청계천은 맑은 물이 흐르게 하고 양한에 공원을 조성해서 시민의 위락시설로 만들어주겠다, 30년대 말에 그런 얘기를 하는데 이미 전쟁 시작해서 할 수도 없는데 그냥.

◇정관용-그리고 나서 해방되고 복개된 게 언제쯤 시작이죠?

◆전우용-지천 복개는 일제강점기에도 일부 구간이 돼요. 그런데 본류 복개가 시작된 건 58년부터. 6.25전쟁 끝나고 한 5년 지나서부터 시작이 돼서 근 20년에 걸쳐서 청계천 전역이.

◇정관용-완전히 덮어버린 거죠?

◆전우용-덮어버린 건 20년 정도 걸렸죠.

◇정관용-그때 덮지 않을 방법이 없었었나요?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덮을 수밖에 없었나요?

◆전우용-도로에 대한 피력이 있었고요. 당시 서울시민들의 요구가 그거였어요. 냄새난다. 더럽다. 그걸 깨끗하게 만들 수 있겠다, 이런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눈에 안 보이게 해 달라 그래서 소망이, 숙원이 이루어진 게 청계천 복개인데 그러니까 그 숙원을 이루는 데 20년이 걸렸고 그리고 숙원이 이루어진지 20년 만에 이제 다시 걷어내 달라, 이런 요구가 시민 일각에서 나오기 시작했던 거죠.

◇정관용-알겠습니다. 그래서 걷어내기는 했는데 지금 좀 손봐야 된다. 제대로 손 봐야죠, 이번에 할 때는요.

◆전우용-시간이 걸리더라도 이걸 사실은 청계천이라고 하는 것의 이른바 하청토목관리 기술로 보자면 청계천은 한양도성에 비견되는 것이고 광교는 남대문에, 수표교는 동대문에 비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걸 문화재적 관점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복원했기 때문에 지금 문제가 생긴 거죠.

◇정관용-영조 때처럼 하면 될 것 같아요. 한 10년 동안 민심을 모아가면서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제대로.

◆전우용-앞으로 그런 식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정관용-기대해 봐야 되겠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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