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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믄 마스크 단디 쓰고"…'늦깎이 시인' 할머니들의 추석

입력 2020-09-29 21:36 수정 2020-09-29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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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아파요' - 박옥영 : 내 15살 때 전쟁도 다 봤는데 웬일인지 다 아프다고 얼굴엔 마스크로 낯짝을 가리고 다니라고 하고…]

[앵커]

열다섯 살 소녀의 눈으로 봤던 6·25 전쟁보다 여든다섯에 겪는 '코로나 세상'이 더 희한합니다. 지리산골 할머니들이 늦게 배운 글로 풀어낸 시화의 한 대목입니다.

모이지 말라는 명절도 처음인데, 마음만은 이미 고향인 분들 위해서 김나한 기자가 미리 다녀왔습니다.

[기자]

매일매일이 다를 것 없는 고즈넉한 산마을에도 시가 익어갑니다.

[시 '아파요' - 박옥영 : 자주 오던 손자놈도 코빼기도 안 보이네 다 코로나 뭐이단가 죽일 놈 내 손에 죽이삐야 하는데]

여든다섯 인생에도 전 세계가 아프다고 아우성인 건 본 적이 없는데, 답답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또박또박 옮겼더니 한 편의 시가 됐습니다.

[시 '농사짓기' - 박순자 : 글농사는 밤이고 낮이고 마음 쓰니 잘 지어지는데 깨농사는 마음이 주저앉아버리네]

올해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 사무총장상, 행복글상 수상작들입니다.

지리산골 할머니 시인들이 일으킨 작은 돌풍입니다.

[깨농사를 짓는다…]

멋 부릴 마음 없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시는 할머니들의 삶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2, 3년 전 군청에서 연 문해교실을 다니며 겨우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글자,

[박순자(74)/경남 산청군 : 아무 학교 문 앞에도 안 가봤어. 못 먹고 살아가지고,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나…]

내친김에 끄적여 본 시인데, 시인이란 말은 뿌듯하면서도 쑥스럽습니다.

코로나로 여러 달째 만나지 못하는 요양원 간 남편도, 군것질 줄이시라 타박하는 아들도, 이젠 나보다 젊은 모습으로 꿈에 나오는 엄마까지, 할머니들의 시는 늘 가족을 따라갑니다.

마을 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만 봐도 손주들 생각이 나서, 지리산의 가을을 다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데 코로나로 모이지 말라는 명절, 나라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잘 감춰지지 않습니다.

[박옥영(84)/경남 산청군 :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된다. 올라믄 마스크 단디 쓰고 오이라.]

(영상그래픽 : 이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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