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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플러스 19회]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실종자 가족들 사연

입력 2014-06-22 23:36 수정 2014-06-22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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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두 달이 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월호 전과 후로 대한민국을 구분지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모든 국민의 가슴에 깊고도 고통스런 상처가 남았습니다. 300명이 넘는 고귀한 생명을 한 순간에 앗아간 대참사.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12명의 실종자가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탐사플러스는 그래서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진도 팽목항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리고 어렵사리 취재진에게 곁을 내어준,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실종자와 희생자 가족들의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기자]

지난 16일 진도 팽목항.

금빛 물살이 잔잔히 부서집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바다는 무심해 보입니다.

목탁소리가 퍼져 나갑니다.

팽목항 방파제에 붙은 노란 현수막.

"마지막 한 명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팽목항에 남은 실종자 가족들에게 소원이 있다면 이것밖에 없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 60여 일째.

팽목항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정부기관이 전부 모여 유가족 대책을 논의했던 팽목항 대합실은 원래 업무로 돌아갔습니다.

여객선도 다시 운항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반인은 많지 않습니다.

노란 리본이 나부끼는 사이로 자주 순찰을 도는 경찰들이 오히려 눈에 띕니다.

바다를 향한 스님의 염불 소리는 해가 저물도록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팽목항에 더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가족 지원 상황실 천막은 그대로 있지만 사람이 없습니다.

신원확인소는 적막합니다.

벌써 여러 날, 실종자 시신 발견이 중단됐습니다.

팽목항에서 차로 20분 가량 떨어진 진도체육관.

아직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7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이날 밤 9시.

체육관 안은 조용했습니다.

뉴스를 전하는 텔레비전 소리만이 정적 사이로 퍼져 나갑니다.

가족들은 넓은 체육관에서도 한곳에 같이 모여 있습니다.

외로움과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습니다.

다른 한쪽 화면은 수색 현장을 비추고 있지만,

모두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앞만 바라봅니다.

기자들이 장사진을 쳤던 체육관 윗층도 이제는 한산합니다.

밤 12시가 넘어갑니다.

가족들은 잠이 들지 않습니다.

새벽 4시반, 대형 텔레비전에는 섬광이 환히 비친 세월호 침몰 현장만이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지쳐 쓰러진 가족들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그렇게 진도 체육관에 다시 아침이 밝아옵니다.

오늘은 내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아침 7시. 축구 중계 소리가 들립니다.

이날은 한국과 러시아의 브라질월드컵 예선 첫 경기가 치러지는 날이었습니다.

간이 침대에 몸을 기댄 아주머니, 베개를 끼고 앉은 아저씨, 눈은 화면을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결정적인 기회를 놓쳐도, 상대편 반칙으로 다쳐도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축구 경기 옆 화면에는 역시 세월호 수색 현장 영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체육관에 혼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약을 챙겨 먹고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합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커피 한잔씩 해요.]

[네….]

탐사플러스 취재진에게 말도 편하게 건넵니다.

[술 안 먹으면 잠 안 와. 여기 시끄러워서. 두 달 이상 술로 의지해서 사는 거야.]

그가 이곳에 내려온 건 사고 당일인 지난 4월 16일이었습니다.

[열흘 동안은 적응 못했는데, 이제는 여기가 내 집인지…. 그렇게 생각하고 살다 보니까, 벌써 두 달 넘었지. (4월) 16일에 왔으니까.]

이분은 세월호에서 기적적으로 구조된 5살 권모 양의 큰아빠, 권오복씨입니다.

권양은 사고 당일 세월호에서 다른 승객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구조됐습니다.

[담요, 담요, 담요. 이리 줘, 이리 이리.]

[이름이 뭐야?]

하지만 권양의 아빠 권재근 씨와 엄마, 그리고 오빠는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권양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이사 가던 중에 변을 당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하고, 자녀들을 좋은 자연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는 꿈 하나로 향한 제주도행이었습니다.

엄마의 시신은 사고 발생 9일 만에 수습됐지만 아빠와 6살 짜리 오빠는 아직도 차디찬 바다 속에 있습니다.

권양은 아직도 아빠와 엄마가 하늘나라에 간 사실을 모릅니다.

[뭐라고 해요?]

[모르지. 걔는 아직 이런 사고 난 거는. 사고 나서 엄마 아빠가 사고가 난 거를 모르지. 근데 가끔 얘기를 해. 배가 넘어진다고.]

권양의 큰아버지인 권오복 씨는 생업을 접고 진도에 내려와 권양의 아빠와 오빠, 즉 자신의 동생과 큰 조카가 차가운 물 속에서 나와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고 이후로는 전혀 일 못하고 계신가요?]

[보건복지부 나왔잖아요. 써냈더니 살고 있는 (서울) 신도림동사무소에서 고용노동부에서 와 보라고는 하는데….]

오전 10시 55분. 권오복 씨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한 기업체의 자원봉사단이 들어옵니다.

모포를 가지런히 개어서 빈 자리에도 정성스레 다시 깔아놓고 바닥은 일일이 손걸레로 닦습니다.

신발도 정리하고, 바닥에 떨어진 작은 쓰레기 하나하나까지 줍는 손에서 진심 어린 정성이 묻어납니다.

점심시간, 체육관 앞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식사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체육관 바깥에는 임시 주택을 만들어놨지만 이곳으로 들어오는 실종자 가족들은 별로 없습니다.

빈집들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습니다.

권오복 씨가 팽목항으로 가는 셔틀버스로 향합니다.

하루 한 번씩 유일하게 하는 일과입니다.

[막 바로가서 그냥 회의 한다고.]

[매일 이 시간에 가시는 거예요?]

[4시 될 때도 있고, 5시 될 때도 있고. 일요일도 하니까.]

혹시나 하고 나서지만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

[가실 때마다 답답하시죠?]

[하루에 잠수사들이 한 거 다 브리핑하니까 답답하지. 성과도 없으니까.]

실낱 같은 희망.

[찾아야지. 끝까지 안 나오면 유품 챙겨놨다가 그걸로 초상 치르지 않게끔 끝까지 찾아달라고 해놨어요.]

영구 실종자가 되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몇 퍼센트나 찾고, 몇 퍼센트나 남을 것 같냐고. 영구 실종자로 남을 건가, 그것도 물어봤어요. 근데 누가 대답한 사람이 없어.]

[이게 될 일이 아니야. 계속 들어가 봤자 없다는데. 휴….]

팽목항. 천막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옵니다.

[기도해서 나올 것 같으면 밤새 하라 그러지.]

다리를 가득 메운 노란 리본.

하지만 시신마저 찾지 못한 가족의 생각은 한참 달랐습니다.

[리본도 묶여 있고. 저도 저기다가 묶었거든요.]

[그건 일반인들이나 하지 우리 같이 못 찾은 사람은 저런 거 할 겨를이 어디 있어, 리본도 단 사람이 없는데. 찾고 나서 올라갔다가 달고 내려온 사람은 있어도 그거까지는 신경 쓸 사람이 없어요.]

가족대책본부는 여전히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음을, 바깥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날 오후 늦게,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온 권오복 씨.

유일한 일과를 마친 권씨는 신문을 꺼냈습니다.

[전에는 사설부터 들춰봤는데, 누가 주필을 쓰니까 그거부터 봤는데, 지금은 앞면부터 봐요. 세월호도 보고 다 보죠. 세월호는 뒤로 넘어갔어요.]

같은 피해자지만 유가족들과 실종자들의 입장 사이에 불편한 순간도 있습니다.

[유가족분들 보면 어떠세요?]

[여기 내려와 있는 것도 힘든 거야. 찾고 내려와서 여러 사람들 입 닥치라고 그랬어. 입 달린 놈은 떠들지 말고 다 입 닥치라고.]

다음날 아침. 팽목항이 자욱한 안개로 뒤덮혔습니다.

바로 앞의 방파제 등대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

시간이 멈추고, 공간마저 단절된 듯한 팽목항의 세월호 참사 64일째 날이 시작됐습니다.

새벽 5시 반.

[잠깐만요. 한 잔 잡수고 가셔. 잡수고 가, 여기서.]

[두유차 한 잔 드릴까요?]

두유가 가득 담긴 통을 끌고 오늘도 새벽부터 나섰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들 안 계시네.]

큰 통에 든 두유 양만 150잔.

[그렇게 안 하면 지각이야. 책임감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 그런 거 있잖아. 내가 안 오면 "어디 갔다 왔냐"고 가족분들이….]

예전보다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세 분? 안에 세 병. 아이구, 저거 봐. 얼굴 안 봤으면 또 못보고 갈 뻔했네. 요새 사람이 점점 줄어가지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수고들 하세요.]

소방본부 천막에도, 길에서 마주친 경찰에게도 따뜻한 인삿말과 함께 두유를 건넵니다.

[한 잔씩 드세요.]

[예, 고맙습니다.]

[물 한 잔 드신다 생각하고, 건강차인데. 팽목항에서나 드실 수 있는…. 여기요, 수고하세요.]

잠시 쉬는 틈도 없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다 주세요?]

[되도록 다 드릴려고. 허허.]

새벽에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얼굴들입니다.

[이제는 오랫동안 해서 다 단골이에요. 어디 있는지 다 알아가지고 깨워서 부르기도 하고….]

두유 한 잔이라 생각될지 모르지만 일일이 찾아다니며 두 달을 하루같이 직접 나눠주다 보니 모두가 고마워 합니다.

그런데 방파제 위에 갑자기 멈춰 서더니, 두유를 따라 두 손으로 정성껏 바다를 향해 가져갑니다.

그리고 합장을 합니다.

두유 배달을 자원봉사하는 이분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안산 단원고 고 양승진 교사의 동생 양승찬 씨입니다.

[이분이 가족인 줄 아는 분들은 진짜 우리가 꼭 기도해달라 그랬거든. 꼭 좀 빨리 올 수 있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이 가족들인 거 다 아세요?]

[알겠죠, 뭐. 복장이 벌써 가족 복장인데.]

[다 고마워하시겠어요.]

[그 마음 나도 모르죠.]

언제까지 하려는 걸까?

[언제까지 매일매일 나오실 거예요?]

[글쎄요, 형님 나올 때까지 하면 좋겠는데….빨리 집에 가는 게 목표니까 집에 갈 때까지 하긴 해야 되겠는데 대타로 할 사람들이 없네.]

오전 9시, 고 양승진 선생님의 동생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어디 가세요?]

[법당 가지요. 매일 가죠, 이 시간에.]

양씨는 절을 하고 있을 때만은 마음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두 달째 매일 108배 하시는 거네요.]

[그런 셈이죠. 그래도 108배 하는 동안은 마음이 편해요. 이것도 일과라고 한번 시작을 하니까 손을 놓을 수가 없네요.]

가슴 속에는 형이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함 뿐입니다.

[형이 빨리 나오라고 하는 거죠.]

법당은 임시 천막에 있었습니다.

양씨가 들어가 절을 시작합니다.

1배, 1배 성심을 다합니다.

형님 고 양승진 씨의 이름도 붙어 있습니다.

[권ㅇㅇ, 권ㅇㅇ 어린이, 유ㅇㅇ, 허ㅇㅇ. 가족들의 품에 속히 돌아오도록….]

[이제 대조기 끝나지 않았어요?]

[오늘부터 작업을 많이 하더라고요. 좋은 소식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기도를 했으니까.]

양씨는 형님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가정지도력을 가지신 분이었어요. 겉으로는 굉장히 좋은 분이었는데, 내면적으로는 어딘가 모르게 강한 그런 분이었죠.]

평소 단원고 학생들에 대해 남겼던 말도 전했습니다.

[단원고 학생들은 굉장히 착하더라고…. 3학년 부장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면 말도 잘 듣고 혼낼 일도 없고 그러셨다고.]

양씨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실종자 가족들 모두의 마음이었습니다.

[형님이 꼭 오늘 나오실 거 같고, 오늘 아니면 내일 꼭 나오실 거 같고. 그러다보니 두 달이 됐네요.]

그러나 속절없이 하루는 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실종자 12명은 단원고 교사 2명과 학생 6명, 그리고 일반인 3명과 조리원 1명입니다.

진도에서의 취재가 끝나갈 무렵, 실종자 가족들이 긴급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기관 보고를 오는 26일부터 시작하기로 결정됐기 때문입니다.

[조원진/국정조사 특위 여당 간사 : 6월 26일부터 7월 7일까지 국조 기관 보고를 받는 걸로 합의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이달 말까지 정밀수색이 예정돼 있는 만큼 현장 상황을 고려해 일정을 늦춰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김병권/세월호사고가족대책위원장 : 여야 의원님들의 자식들이 저 차갑고 깊은 바다 속을 아직도 떠돌고 있다면 장관님, 해경청장님을 여의도로 소환하여 조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수색에 차질을 빚지 않게 해달라는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에 야당 측은 다음 달 1,2일 진도에서 기관 보고를 제안했지만 어떻게 결론날지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한 명이 가족들의 품에 돌아갈 때까지 팽목항은 잠들 수 없을 것입니다.

[재근아… 택수야… 빨리 돌아와… 꼭 같이 와…]

시신을 수습해 돌아간 세월호 유가족들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을까?

지난 20일 오전 인천연안여객터미널.

평일인데도 여객선을 타려는 승객들로 터미널은 만원입니다.

취재진이 도착한 곳은 인천에서 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자월도라는 섬이었습니다.

어렵사리 만난 장종열씨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장씨는 세월호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여기서 오면, 이게 어머니가 조개 캐고 있고 금방이라도 계실 것 같고 그래요. 그리운 모습이죠. 그리운 모습….]

내일 모레 24일은 살아계셨다면 어머니의 72번째 생신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생일상을 받을 수 없는 어머니.

[성인이니까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어머니를 모시고 생신상을 차려드려야 마땅한 건데. 자식 입장에서 어머니 영정을 모시고 생신상을 차려드려야 한다는 게….]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정씨였기에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그만큼 더 컸고, 정신적 충격도 컸습니다.

[아버님이 저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그럼에도 이 3형제를 홀로 키우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고생이야 말할 게 없죠.]

장씨의 집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자주 와 계셨으니까. 잔디도 어머니가 같이 심었던….]

[어머니가 저 강아지를 좋아했어요. 저 개도 데리고 다니고.]

장씨가 특히 마음이 아팠던 건 휴대폰을 받은 뒤였습니다.

휴대폰이 다 부서질 정도의 파손.

장씨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마지막에 탈출하기 위해 유리창을 내리친 것이라는 생각에 볼 때마다 더 가슴이 아픕니다.

[밑에 이만큼이 부서졌어요. 부러진 상태에서 가방에 있다가. 어머니가 핸드폰 급하니까, 잡히니까 집어서 유리나 이런 걸 치신 것 같아요.]

어머니의 시신을 바다에서 건져올리는 모습을 직접 본 장씨의 정신적 외상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다.

[장종열 : 꿈이었으면 좋죠. 꾸다가 깨면 현실로 돌아올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건 꾸다가 깨도…. 내가 어머니 사고 당하시고 제 꿈에 나타난 적이 있어요.]

장씨의 트라우마는 심각해 보였습니다.

바다 일을 하고 있지만 더는 바다에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장종열 : 생업이 다 바다에 있잖아요. 근데 이제는 바다에 못 가겠어요. 원래 잠수를 나가거든요, 전복이랑 소라 잡으러. 근데 저같은 경우는 바다에 못 가겠어요.]

[장종열 : 지금 나가서 배 운항을 못하나, 못한다.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공포가 생겨. 섬에서 나와서 지금 40년 넘게 산 사람인데. 그래도 불안해요, 저는.]

호전되지 않는 정신적 피해는 장씨를 점점 헤어나오기 힘든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있었습니다.

안산 정부합동분향소.

고 김주은 양의 어머니는 오늘도 분향소를 찾았습니다.

딸이 엄마를 알아보기라도 한 걸까.

분향소 내부에 설치된 화면에 때마침 고 주은 양의 얼굴이 뜹니다.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방명록에도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냐며 안부를 묻는 어머니.

하지만 딸의 영정 앞에 서자 또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 눈물은 언제쯤 마를까.

사진 속 주은이는 너무나 밝게 엄마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고 김주은 어머니 : 가슴이 무너지는 거지. 우리 딸이 정말 하늘나라 갔구나 그거가 믿겨지지 않는데 거기 가면, 안에 들어가면 딸이 갔구나.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집으로 향하는 길. 어머니는 차 안에서 쉬지 않고 주은 양에 대한 추억들을 얘기하고 싶어했습니다.

[고 김주은 어머니 : 귀요미로 친구들하고 놀면서 찍은 거 친구들이 나한테 전송해줬어. 수박하고 복숭아를 엄청 좋아했어. 수박, 복숭아.]

딸의 시신을 수습한 건 사고 사흘 만인 4월 18일이었습니다.

비교적 남들보다 먼저 딸의 시신을 데려올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습니다.

[고 김주은 어머니 : 절대로 살아 돌아올 거라 그렇게 생각하고 갔더니 주은이가 맞는 거예요. 기가 막히죠. 믿을 수가 없고, 만져봐도 그대로 있고. 어디를 만져봐도 살아있는 거 같은데….]

슬픔은 갈수록 더 커지기만 합니다.

[고 김주은 어머니 : 혼자 있을 때 딸 방에 가서 펑펑 울어요. 침대에 누워서 울고, 사진 보고 울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남들은 다 잊혀질 거라고 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보고 싶고, 그립고, 또 동영상 보면서 울고….]

딸의 방은 하나도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망신고도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고 김주은 어머니 : 못 치워요. 아직 마음에 못 보내고 있어요. 사망신고도 못했고, 그런 분들 많이 계시더라고. 호적에서 없애버리는 게 그게 너무 안 돼요. 그래서 그냥 그대로 놓고 있어.]

딸을 잃은 슬픔과 극심한 고통은 분노로,

[고 김주은 어머니 : 자기 혼자 살겠다고 시인도 안하고 지금 재판 과정에서, 그러니까 우리 부모들을 더 많이 죽이는 거예요. 한 번, 두 번, 세 번씩. 그러니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못 자요. 보고 싶은 딸이 꿈에 나타나야 하는데 그 선장이 꿈에 나타난다니까요.]

자책감으로,

[고 김주은 어머니 : 제가 주은이게 잘 해준 게 없어요. 매일 바쁜 엄마였거든. 혼자 키웠고. 그래서 더 못 해준 거 때문에….]

조울증세로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고 김주은 어머니 : 이러다가 정신병자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이제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죠. 이러면 안 되겠다, 그래서 다스리려고 하는데 혼자 있는게 두렵고 무서워요. 내가 왜 이렇게 되어가나, 감정 기복이 점점 심해지고, 조울증인가 이런 생각도 들고….]

고 김주은 양의 탁상 시계는 공교롭게도 세월호를 탄 그날 멈춰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삶도 함께 멈춰 있었습니다.

취재진은 세월호 안산트라우마센터를 찾아가 현재 진료를 맡고 있는 교수를 만나봤습니다.

그동안 만난 많은 희생자 가족들은 어떤 얘기를 하고 있을까.

[유빈/트라우마센터(국립서울병원) 전문의 :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많이 하시고요. 잠 못 자고 상황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는 분들 많이 있고요. 갑작스러운 죽음이고, 사고이고,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으니까요.]

형제자매를 잃은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두 겹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유빈/트라우마센터(국립서울병원) 전문의 : 네가 형이나 오빠의 몫까지 해야 한다는 걸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 안 그래도 자기 형제 자매가 사고를 당한 것 때문에 힘든데, 거기다가 부담까지 느끼면 특히 또 어린 아이니까.]

마지막 순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눈물 흘렸던 단원고 고 박예슬 양의 아버지 박종권씨.

박씨는 디자이너를 꿈꿨던 딸을 위해 해준 약속이 있었습니다.

[박종범/고 박예슬 양 아버지 : 나중에 크면 전시회라도 해주려고 했었는데. 그래서 모아 놓으라고 했었는데….]

비록 딸은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아버지는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트라우마 센터 측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힘들겠지만 무엇보다 휴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치유라고 조언했습니다.

[하규섭/안산트라우마센터장 :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많이 힘들고 지쳐있는 상태, 제일 권하고 싶은 것은 이런 상태에서 지키는 게 쉽지 않겠지만, 숙면을 취하시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끼니를 거르면 안 되고, 햇빛을 쬐는 거 그런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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