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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플러스 21회] 은폐가 키운 상처…베트남전 내무반 총격사건

입력 2014-07-06 23:44 수정 2014-07-06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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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동부전선 GOP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 수사가 진행될수록 군 당국이 숨겼던 사실이 하나씩 공개되고 있습니다. 군 당국의 부실대처와 각종 은폐·왜곡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이번에 본 것처럼 진실을 숨기기만 급급한 군의 태도가 우리 군의 현주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고가 계속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탐사플러스는 43년 전, 베트남전 파병 부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의 진실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습니다. 취재진은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부대 관계자들을 만나 만나 사건의 실체를 추적해봤습니다.

손용석 기자입니다.

[기자]

지난달 21일 동부 전선 최전방 육군 22사단 GOP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

무장탈영병 한 명을 잡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고도 43시간 만에야 사태를 해결한 우리 군의 대응 능력은 국민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군이 상황을 은폐하고 국민을 속이려했던 상황들이 계속 드러난 겁니다.

애초 임모 병장의 총에 맞았다는 소대장은 수색 병력 간 오인 사격으로 다친 사실이 밝혀졌고,

당시의 상황은 CCTV 영상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달아나던 임 병장은 여러차례 수색 병력과 맞닥뜨렸지만, 허술한 거짓말로 전부 통과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습니다.

희생된 병사를 살릴 수 있었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노봉국/육군 22사단 총기사건 유족 : 그것도 골든타임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시간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초동대처, 아무런 응급대치가 없었기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는 병사를 그 누구하나도, 상부에서조차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 것을 숨기려 드는 군의 태도가 군 내부의 문제를 계속 키워왔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임종인/변호사 : 지금 임 병장 사건의 경우에도 2주일이 돼 가는데 국방부에서는 사건의 원인과 그 과정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국민들에게 또는 언론에게 사건을 은폐하려는 국방부의 나쁜 습관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취재진은 43년 전 발생한 내무반 총기 난사 사건이 아직도 논란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이 사건 역시 문제의 근본은 군 당국의 사건 은폐에 있다고 관련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보세요? (김문구 선생님이세요? 저희 쪽에 제보하신 것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제보했습니다. 제가 71년도에 베트남전에 참전을 했는데요, 참전 4개월 만에 밤에 매복근무를 하고 나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내무반에 총소리가 났다고….]

취재진이 김씨를 만난 건 지난 6월 말,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베트남전 참전자 사무실에서였습니다.

사무실 곳곳엔 아직도 전쟁의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번개5호 작전, 비호6호 작전, 밀림 속에서 소통하고. 이건 매복 나가는 거…. 전쟁 중인데 수도 서울(하노이)은 아오자이 입고 학교 가잖아. 노동자들은 시위를 하잖아. 반면 남쪽 지역에선 이렇게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다고. ]

성성한 백발이 말해주듯 김씨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건 벌써 43년 전입니다.

지난 1964년 미군 구축함이 피격됐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으로 촉발된 베트남전은 1973년 휴전협정에 따른 미군 철수, 1975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미국의 파병 요청에 따라 연인원 32만 명을 베트남전에 파병했습니다.

[우용락/월남전참전자회 회장 : 그 당시 미국에서 반전 여론이 심해 가지고, 미국 본토에서는 더 파병을 할 수 없는 미국 국내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월남에 우리가 파병 돼 가지고 8년 8개월 동안에 전쟁을 시행하면서 5,099명의 전우들이 전사 사망했습니다. ]

김씨가 참전한 건 전쟁 막바지인 1971년.

[우용락/월남전참전자회 회장 : (베트남전 당시) 국민 1인당 GNP는 87달러 정도밖에 안 됐어요. 아시아에서는 제일 가난했어요. 북한보다 못 살았습니다. 월남에 파병을 가서 저희들이 받은 수당. 또 우리나라 기업체 진출을 해가지고 많은 외화를 획득을 했습니다. ]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당시 상병이었어요. 가정도 어렵고 그러니까 월남전, 남자로 한번 태어나서 전쟁을 체험한다. 겸사겸사 장기근무 조건으로 월남전에 갔다고…. ]

하지만 그는 불과 4개월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갑자기 귀국명령이 나더라고. 원래 체류기간이 1년인데, 4개월 만에 귀국명령이 나서…. 졸병이니까 귀국명령 나면 가야지 뭐. ]

김씨가 귀국한 이유는 자신이 파병된 부대 내무반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밤에 야간 매복근무를 하고 밤 11시경에 갑자기 총소리가 '바바바' 나니까 불시에 베트콩이 쳐들어온 줄 알고…]

당시 우리 군이 주로 주둔했던 곳은 베트남 다낭과 나트랑으로 교전이 가장 치열했습니다.

특히 김씨가 소속된 백마부대는 나트랑에서 당시 적군인 베트콩과 대치 중이었습니다.

[이외천/베트남전 참전자 : 전투 나가면 30명 나가잖아요. 15~20명은 총맞거나 죽어와요. 다 온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작전 나가면 항상 공격을 먼저 받는 거예요. 밀림 속에 있다가 우리를 쏜다던가, 집에서 쏜다던가. 바나나 나무 뒤에서 쏜다던가, 전투 갔다왔으면 인원 수가 반 이상 줄었잖아요. 썰렁하죠. 허무한 거예요. ]

하지만 김씨가 부상당한 총기 사건의 범인은 적군 베트콩이 아닌 한국군 동료였습니다.

파견 근무에 불만을 품은 이모 병장이 술에 취한 채 내무반에 총을 난사한 겁니다.

적군이 쳐들어온 줄 알았던 김씨는 황급히 몸을 피하다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벙커로 뛰어들다 허리에도 부상을 당했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다리에 총 맞은 줄도 몰랐어. 사병들하고 벙커로 뛰어들어서 굴러버렸다고, 갑자기 총소리가 나니까. 눈 떠보니까 병원에 실려가 있더라고. ]

베트남 현지에서 치료를 받다, 결국 파병 4개월 만에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국군통합병원에서 파견명령이 나더라고. 수도경비사령부 3사헌병대가 대통령 경호실이에요. 근데 또 거기로 명령이 나더라고, 내가 몸이 안 좋으니까 고도훈련이 강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진급도 못하고 해서 스스로 옷 벗고 나왔어요. ]

제대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렸던 김씨는 근근이 군 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1983년 중사로 전역했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이게 파편이 들어간 자리고. 지금 파편 열 몇 개가 잘잘하게 들어가 있어. (지금 파란 거는) 파편이에요. 제거 못해요. (이게 고엽제 증상?) 응, 이게 고엽제. 이게 경도. 나는 이제 작전부대 칸부이(?)라 하거든. 작전부대. 몸 뒤에 보면 말도 못해. (이게 고엽제 증상입니까?) 부황 안 뜨면 못 살아. 민간 병원다니면서 관리받고 있는 거죠. 수술도 세 번 하고. ]

전시에 부상을 당한 김씨는 전역 후 육군 측에 '공상'을 신청했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공상이면 국가유공자가 되는 거죠. 총기난사 당시에 이 사람이 허리하고 다리가 다쳤으면 공상이고, 안 다쳤으면 공상이 아닌데…. ]

하지만 군 당국의 공상 처리절차를 준비하던 김씨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겪은 베트남 총기난사 사건 관련 기록 등이 우리 군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민간 육군본부에 97년도 3월에 신청했어요. 다리 파편하고 허리 부분을 했더니, 뭐라고 왔냐면 '원인이 없다' '다친 근거가 없다' 그래서 무슨 소리냐, 나는 병원에 두 달 동안 입원했고 조기귀국도 당했는데…. ]

군 당국의 답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육군본부에 계속 민원을 제기했어요. 총기 발사자도 없고 병원기록도 없고 그래서 비해당으로 내려왔어요. ]

취재진이 직접 육군본부에 확인해 본 결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육군본부 관계자 : 군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으면 돼요. 그러면 아주 간단해요. 그런데 그런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

특히 총기 사건이 일어났다면 당시 가해자가 처벌돼야 하는데, 그것조차 아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71년도에 총기 난사자가 전시에 총기를 난사했으면 총기 난사자는 사형 아니면 무기에요. 형법대로 해야 되니까, 전투 중이니까. 근데 처벌한 근거가 없다 이거예요. ]

결국 김씨는 제대 이후 18년 동안 당시 10여명의 부대원들을 일일이 찾아내 총기 사건이 있었다는 자술서와 내용증명서를 받아 육군에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청구는 다시 거절당했습니다.

육군 측은 김씨가 제출한 부대원들의 진술서도 신뢰하기 힘들다는 입장입니다.

[육군본부 관계자 : 이건 100명을 세워놓고 물어보면 99명은 생각 안 난다고 할 거예요. 물론 그 1명이 될 수는 있겠지만 사람이 일단 상식선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거잖아요. 그때 생각이 날 리가 없는데 그 사람이 계속 얘기를 해서 써달라고 한 거죠. ]

10년 넘는 세월 동안 7차례나 공상 심사를 받아온 김씨는 결국 해당 군 관계자들을 직권 남용으로 고발했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나도 화가 나니까 담당하고 소령, 담당과장을 직무유기·직권남용으로 형사 고발했어. ]

올해 66세인 그가 아직도 군 당국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보상 이런 걸 떠나서 베트남전쟁으로 내 인생이 이렇게 됐으니까. 베트남 참전용사 명예를 찾기 위해서 오로지 이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겁니다. 오로지 이 길을 걸어오고 있는 거예요. ]

취재진은 김씨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기로 했습니다.

김씨와 함께 당시 목격자를 직접 찾아보기로 한 겁니다.

먼저 총기 사건 직후 총상을 당한 김씨를 직접 치료했던 위생병 김창해 씨를 찾아갔습니다.

김씨는 현재 경북 봉화군 한 암자의 주지스님이 돼 있었습니다. 스님은 김씨의 부상 정도를 제대로 떠올리진 못했지만,

[김창해/경북 화암사 주지스님 : 지금 와서 50년 넘은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까 조금 당황스럽네요. ]

그를 치료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김창해/경북 화암사 주지스님 : 내가 (김문구씨) 물리치료도 해주고 외상치료도 해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세균이 들어가지 못하게 소독하고 외상치료는 내가 해준 적이 있어요. ]

당시 열악했던 치료 환경도 그의 기억을 되살려줬습니다.

[김창해/경북 화암사 주지스님 : 45도 이상 올라가는 뜨거운 데서, 거기서 안 살아본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조그만 가시 박힌 것도 엄청 고달프고 진물이 나고 햇빛이 뜨거워서, (김문구씨가) 아파서 못 버티니까 진통제도 주고 염증치료제 주사도 놓아준 적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당시 김씨와 함께 근무했던 전우들은 총기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까.

취재진은 당시 파병부대 선임하사였던 조상용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조씨는 43년이 지난 총기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조상용/베트남전 참전자 : 내가 누워서 쉬고있는데 왔더라고. 빨리 피하라고. 그래서 너나 피하라고. 그 말하고 있는데 총기난사 해버렸어요. 출입문이 닫혀있는 상태에서 갈겨버린거예요. 0530 그 상태에서 뚫려있는 자국이 18방이 있더라고. 탄창하나를 다 쏴버린 것 같아요. ]

특히 조씨가 당시 사건을 유달리 또렷하게 기억하는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총기를 난사한 이 병장이 겨냥한 대상이 김씨가 아니라 바로 조씨 자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상용/베트남전 참전자 : 총기난사를 하고 난 뒤에 내가 쫓아갔어요 왜 이런 행위를 했냐. 나한테는 선임하사가 이런 상태에 있는데 파견을 안보내줘서 그래서 불평불만이 있어서 총기난사를 했다 이거예요. ]

조씨는 당시 김씨의 부상 상황도 또렷하게 떠올렸습니다.

[조상용/베트남전 참전자 : 다리에 상처를 입고. 벙커로 가는 사이 여러 사람하고 같이 넘어지면서…. ]

김씨가 이같은 취지의 목격자들 진술서를 제출하자, 육본 측은 총기 사고가 일어난 건 인정할 수 있지만, 김씨의 의무 기록이 없어 공상 처리는 힘들다고 다시 통보했습니다.

[육본 관계자 : 굉장히 간단한 거에요. 그 당시 진료 기록만 있으면 100%예요. 100%. 안해줄 이유가 없잖아요. ]

하지만 43년 전 전쟁에서 일어난 의무기록은 이미 사라진 상황입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그러니까 15년 전. 제가 18년 째 싸우고 있습니다. 2000년도에 육군 본부로부터 받은 공문을 보면 5년이 넘으면 사단 의무대는 의무 기록이 없다고 회신이 왔는데 이 공문을 당신이 본 일이 있느냐…. ]

취재진은 김씨를 후송부대에서 치료했다는 당시 군의관 장종호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장종호 당시 군의관 : (장종호 원장님이세요? 4834 예전 베트남 전쟁 때 참전했던 김문구 하사님이라고요.) 네 뭐 만나서 얘기는 할 수 있죠. ]

베트남 전쟁이 끝날 무렵 국군통합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장씨는 현재 서울 강동구에서 정형외과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장종호 당시 군의관 : 74년도에 소위로 임관해서 첫 부임지가 청평의 저 59후송병원 외과 부장 겸 정형외과 과장으로 갔어요. ]

장씨 역시 김씨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장종호 당시 군의관 : 그 분이 이제 한 번 치료 받고 간 사람 같으면 기억을 할 수가 없죠. 그런데 이제 그 분이 지역에서 근무하는 헌병대 소속이자 하사관으로 자주 병원에 방문했고, 2년 동안에 수십 차례 만났으니까 얼굴을 기억하죠. 한 번 휙 왔다갔으면 얼굴을 기억 못하죠. 40년이 지났는데 기억하겠습니까? ]

당시 총기사건은 왜 은폐됐던 것일까.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당시 부대 소대장, 그 분이 하신 말씀이, 김문구 씨는 의무 병상일지가 없다. 1839 왜 없습니까는 당시 박00 중령이 대령 진급 예정자기 때문에 나를 가입실 시켰을 것이다. ]

대대장은 김씨를 기억했지만 은폐 사실은 부인했습니다.

[박OO/당시 대대장 : 병원에 간 게 아니라 거기(파병부대)에서 재직했다는 것만 인정해 줄 수 있지만 사건 자체가 계류된다는 건 전혀 모른다니까. ]

당시 가해자인 이 병장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육군 수사단에서 병장 이OO이 총기 난사했다. 근데 이사람이 진술을 거부해서 수사할 수 없고, 공소권이 없어 강제수사를 할 수가 없다. ]

취재진은 김씨와 함께 이 병장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씨는 총기 사건을 일으킨 직후 김씨와 함께 강제 귀국조치됐지만, 당시 사건이 은폐돼 아직까지 국가 유공자 신분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취재진을 만난 그는 후회에 가득했습니다.

[이모 씨/당시 총기 사건 가해자 : 잊을 수가 있나요. 내가 지금 뇌졸중 왔지. 그 전에 미화원으로 관리공단 공직으로 있었으니까. 안 잊죠. 후회 많이 했죠. 술에 취해서 그런 건데 뭘 알아요. ]

자신의 범행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이모 씨/당시 총기 사건 가해자 : 그날 내무반에서 회식을 했어요. 선임 하사님이 제가 당직 서기를 봤는데 엄청 괴롭혔어요. 그날 또 머리를 쥐어박고 그러니까 제가 술이 너무 취해서 발사를 하게 된 겁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

귀국 후 그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모 씨/당시 총기 사건 가해자 : 시골에서 농사 짓고 여기 일자리가 있다고 그래서 파주 와서 미화원 생활 이십 몇 년하고. 지금은 아파트 경비나 미화원 하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로 놀고 있어요. ]

사건은 감춰졌지만 40년 넘는 세월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토로합니다.

[이모 씨/당시 총기 사건 가해자 : 그걸 거울 삼아서 술·담배 끊어버리고. 그저 외국 한 번 못 나가보고. ]

수면제 없이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모 씨/당시 총기 사건 가해자 : 수면제를 먹은지 오래 됐어. 혈압약이랑 뇌졸중 약이랑 당뇨 약 먹고. 어떻게 한 번 일어난 일 돌이킬 수는 없고, 일단 하자는 대로 협조는 해줬으니까. 원망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 쓰러져 죽기 전에 잘 하쇼. ]

비록 가해자지만, 김씨에 대한 군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모 씨/당시 총기 사건 가해자 :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걸(진술서) 다 읽어봤으면. 쏜 사람이 시인을 했는데 그걸 안된다고 하니까 말이 안되지. ]

43년 만에 드러난 베트남 총기 사건.

최근 육군 22사단에서 발생한 임 병장 사건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임종인/변호사 : 1984년도에 이번 임병장 사건이 있었던 22사단, 그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경계 초소에서 사병이 내무반 안에서 총기를 난사해서 15명을 죽이고, 월북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89년에도 총기난사사건이 어느 사단에 있어서 15명이 또 죽은 사건도 있었는데 그것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임병장의 총기난사사건이 있었는데 이런 건 모두 다 언론에 밝혀지지 않고 국민에게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계속된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3일 김씨는 다시 육군본부를 찾았습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18년 동안 심사 일곱 번 했습니다. 사단 의무대에선 5년이면 의무 기록이 파기된다고. 벌써 40년 넘었는데 내 의무기록을 무슨 근거로 없다고 주장하십니까? 다시 공상 심사를 하는 주무 장교한테 줘서 의뢰는 하지만, 역시 그 또한 심의를 해서. ]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김씨, 그동안 가족들에게 미뤄왔던 미안함을 쏟아냅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내가 이렇게 외롭게 지금까지 육군본부하고 싸워올 적에 가장 미안한 건 내 부인이요. 부인 생각하면 미안하고 몸둘 바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한번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부인한테 보답하는 차원에서라도 공상을 인정받고 싶고, 내가 죽으면서 마무리 지을 거라고. ]

지난 2012년 미국 현충일 추모식.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참전 용사들을 한명씩 일으켜 세운 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버락 오바마/미국 대통령 : 심지어 우리 중 일부는 당신들에게 등을 돌렸지만 당신들은 조국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고국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버락 오바마/미국 대통령 : 여러분이 전장에서 귀환했을 당시 환영받아야 했지만 그렇게 못해준 것은 국가적인 수치이고,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입니다. ]

올해는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50주년.

하지만 취재진이 만났던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은 대부분 전쟁의 후유증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최성준/베트남전 참전자 : 67년 2월달에 파병 돼가지고 그 이듬해 3월달에 부상을 당했습니다. 작전에서 부상을 당했는데. 고국으로 돌아와 보니 아무런 혜택 없었어요. 내가 이 목소리도 거기에서 부상당한 겁니다. 우린 그렇게 고생을 했어도 과연 국가가 우리에게 뭘 해줬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

[이외철/베트남전 참전자 : 월남가서 총 맞고 왔잖아요. 워낙 고생을 하다보니까는 후유증이 많아요. 당뇨 오지요, 고혈압 오지요, 눈 나빠져서 수술 다 했죠. 2129 거의 다 죽거나 총맞았지, 멀쩡한 사람 몇 명 안돼요. 정부에서 보답을 해줘야 되는데 그게 없잖아요. ]

[이장원/베트남전 참전자 : 내가 내 옆구리에서 창자가 나온 지도 몰랐어요 '야, 이 하사' 하고 툭치는데 옆에 여기가 완전이 폭탄이 터져서 다 날라갔어요 지금 이 손도 이 안에 보면은 파편이 꽤 많아요 이 손을 제가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제가 귀국을 해서 국가유공자가 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어요. 참전자에 대한 예우가 미국이나 호주나 딴나라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대우를 지금 받고 있는다는 것을 만약 현역이 알고 있다면,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

[임종인/변호사 : 미군의 경우와 좀 비교를 해보면 우리가 좀 반성해야 되는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 미군은 월남 파병에서 죽은 사람들 유골을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군인 약 오천 여명이 베트남에서 죽었는데, 지금 유골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0602 이런 것들은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주는 것이 가장 기본인데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국가는 정말 문제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씨 역시 자신이 분노하고 있는 대상이 총기 사건 가해자인 이 병장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외면하고 있는 국가라고 말합니다.

[김문구/베트남전 참전자 : 나는 국가를 위해서 내 젊음을 다 바쳤는데 국가는 왜 이렇게 홀대하고 냉대한지 정말 대한민국에 산다는 자체도 부끄럽고. 내일 모레 칠십인데. 죽는 그날까지 내 명예를 찾고 죽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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