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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내외 악재 시달리다 끝내 탄핵된 박 전 대통령의 지난 4년

입력 2017-03-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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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10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인용에 따라 파면됐다. 총 5년의 임기 중 1년에 조금 못 미치는 351일을 남겨두고 대통령의 자리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것이다.

4년 전인 2013년 2월25일 박 전 대통령은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4대 국정기조로 제시하며 5년 임기의 첫 발을 야심차게 뗐다.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했지만 박 대통령은 임기 내내 예기치 못한 대내외 악재에 크게 흔들렸고 이를 수습하느라 국정운영에 큰 차질을 빚었다.

취임 원년부터 박 전 대통령은 인사난맥으로 괴로운 상황에 처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 낙마를 시작으로 장·차관급 고위공직자 후보들이 줄지어 사퇴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인사 트라우마'를 안았다.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와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김학의 법무부 차관 내정자 등이 박 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줄줄이 낙마했다.

특히 그해 5월 미국 순방 도중 벌어진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문 사태로 국제적 망신을 초래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향한 비판도 정점을 찍었다.

인사실패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해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 사퇴와 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자 낙마로 이어졌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인사수석실을 신설하는 등 청와대의 인사검증시스템을 개선했지만 이후에도 크고 작은 인사 사고가 발생, '수첩인사'라는 오점은 지워지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인사실패와 더불어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논란에도 내내 시달려야 했다. 집권 첫해부터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으로 정권의 정통성 시비를 겪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2014년에는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 조작으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송구스럽다"고 사과했고 이듬해에는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민간인 사찰 의혹이 정국을 강타했다. 대통령 소속 기관인 국정원이 정국의 핵으로 부상할 때마다 박 대통령은 국론분열과 민심악화를 겪어야 했고 이는 국정운영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집권 2년차인 2014년 들어 본격적인 성과 창출을 표방하면서 국정을 시작했던 박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비선실세 문건 파동으로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며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다.

당초 박 대통령이 집권 2년차를 맞아 던진 국정 화두는 경제였다. 박 대통령은 2014년 2월25일 취임 1주년 대국민담화를 통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제시하면서 본격적인 경제살리기 성과 창출에 대한 의지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해 4월16일 뜻 밖에 터진 세월호 침몰사고는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국정운영도 사실상 '스톱'상태에 빠져들었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사고현장을 방문하는 등 수색과정을 챙겼지만 이번 탄핵 사태에서 불거진 '세월호 7시간 의혹'만 남았다.

특히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한 대처와 부조리에 더해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청와대의 태도 등은 국민의 공분을 샀고 결국 박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에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박 대통령은 참사 한 달여 만에 대국민담화를 통해 해양경찰청 해체를 선언하고 국가안전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작업에 돌입했다. 그럼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두명의 총리 후보자가 연거푸 낙마하면서 끝내 사고 책임 차원에서 사퇴 의사를 밝혔던 정홍원 전 총리를 유임시키는 등 인사개편도 녹록치 않았다.

그해 11월말 최순실씨의 전남편인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은 정치권을 또 다시 격랑에 빠트리며 간신히 국정동력을 회복해 가던 박 전 대통령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박 전 대통령은 비선실세 의혹을 '찌라시' 수준으로 규정하면서 청와대 문건의 유출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당부했지만 문건 유출과 관련해 수사를 받던 최모 경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파장이 확대됐다.

또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과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청와대 내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정씨와 박 전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이 권력암투를 벌이는 모양새로 비쳐지면서 박 전 대통령의 부담을 키웠다.

그러나 이때라도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 시스템을 개혁하고 최씨와 거리를 뒀더라면 탄핵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임기 5년의 분수령인 집권 3년차에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순탄치 않았다. 2015년 온 국민을 떨게 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국정동력을 상실했고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측근들이 연루되면서 도덕성에도 타격을 입었다.

당초 박 대통령은 집권 3년차를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 구조개혁의 원년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국 경제 재도약을 위해서는 사회 각 부문의 강력한 개혁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2015년이 구조개혁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해 4월 자살한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금품 리스트' 메모가 정권에 메가톤급 악재로 작용했다. 이완구 전 총리와 전현직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이름이 담긴 메모는 실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성완종 리스트에 여론의 관심이 모두 쏠린 사이 중남미 순방의 효과는 희석됐고 박 대통령의 지지율도 20%대로 곤두박질쳤다. 파문은 현직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라는 사상 초유의 일로 연결됐고 이 전 총리는 결국 낙마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의 4·29 재보선 압승으로 국정동력을 회복하는 듯 했지만 메르스라는 암초를 만난다. 메르스 사태 초기 정부는 신종 감염병 앞에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이며 국가적 위기대응능력 부재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 사이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와 감염자가 급증하고 국민들의 공포도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해외 관광객들은 한국을 찾지 않았고 내국인들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피했다. 이로 인한 관광업 타격과 소비심리 위축은 실물경기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메르스는 38명의 사망자를 내며 종식됐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국가적 재난대응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이 드러난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됐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구조개혁의 시계도 느리게 흘러갔다. 진통 끝에 공무원연금 개혁이라는 성과를 거두면서 박 대통령이 강하게 추진해온 4대분야 개혁작업이 탄력을 받는 듯 했다. 당초 계획보다 미흡하다는 등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연금 개혁은 그나마 박근혜정부 최대 치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정치쟁점화되면서 국론분열을 가져왔다. 노동개혁은 노사정 대타협으로 빛을 보는 듯 했으나 노동계와 야권의 거센 반발로 지지부진했다.

이런 가운데 입법에 비협조적이었던 국회와는 대립각을 세웠다. 박 대통령은 구조개혁을 위해 필요한 법안들이 국회에서 발목이 잡히자 정치권이 당리당략과 정쟁에만 골몰하는 탓에 국민을 위하는 역할을 하기는 커녕 되레 국민의 부담만 되고 있다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회를 향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해 6월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도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국회법 사태는 야당 뿐만 아니라 국정 파트너인 여당에 대한 불신을 형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고 이는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의 축출과 거부권 행사란 결과로 이어졌다.

내치(內治)에 비해 후한 점수를 받아 왔던 외치(外治)도 이쯤부터 흔들렸다. 2015년 8·25 합의로 해빙기를 맞았던 남북관계는 이후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정부의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 조치 등으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전으로 회귀했다.

박 전 대통령이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오른 장면으로 상징되는 역대 최상의 한·중관계도 북한의 도발을 계기로 공론화된 주한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고 최근 중국 정부의 노골적인 보복으로 이어졌다.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반발과 강제 연행을 부인한 일본 정부의 언사, 주일대사관 앞 소녀상 갈등 등을 낳으며 양국 관계 개선으로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리고 집권 4년차에 들어선 지난해 박 전 대통령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면서 레임덕에 빠지게 됐다. 지난 16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형성되면서 박 전 대통령의 국정 동력도 크게 떨어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협치를 키워드로 삼았다. 하지만 사드 배치를 둘러싼 야당과의 입장을 좁히지 못했고 청문회 개최 요건을 완화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취임 후 두 번째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와의 협치도 물건너갔다.

지난해 7월 처가의 부동산 매매로부터 시작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은 박 전 대통령이 몰락해가고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우 전 수석을 내치라는 야당의 거센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를 오랜 기간 감쌌다.

이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은 우 전 수석을 직권남용과 횡령 혐의 등으로 검찰에 수사의뢰한 이석수 특별감찰관에 대해 언론 누설 의혹을 빌미로 청와대를 통한 역공에 나서기도 했다. 특별감찰관제는 다름 아닌 박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우 전 수석을 감싸는 동안 최순실이 현 정부의 비선실세라는 의혹이 점차 불거졌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도 확실한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4일 그동안 금기시됐던 '개헌' 카드를 전격적으로 꺼내들었다. 정치권 구도 자체를 뒤흔들 파괴력 있는 카드인 개헌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임기 말까지 정국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생각과 비선실세 의혹을 덮겠다는 의도가 깔린 전략이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제시한 당일 최씨의 태블릿 PC와 관련한 JTBC의 보도가 나오면서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박 전 대통령은 관련 보도 다음날 대국민사과에 나서는 등 총 세 차례 대국민담화를 했다.

이를 통해 새 국무총리 후보자에게 전권을 맡기고 자신은 2선으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여야가 자신의 진퇴 문제를 합의하면 그에 따르겠다고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씨와 그 일가의 국정농단 사태가 낱낱이 드러나면서 성난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고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과 헌재 탄핵심판으로 결국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파면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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